“봉평은 예나 지금이나 하얀 메밀꽃!”

<만나고 싶은 우리 꽃과 나무 22>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

등록 2003.09.15 13:20수정 2003.09.17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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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밀꽃 필 무렵3
메밀꽃 필 무렵3김규환
보부상도 혀를 내두르는 두메 산골

<메밀꽃 필 무렵>의 허생원과 조선달, 동이는 왜 장돌뱅이가 되었을까?


조선 개국이래 봇짐과 지게를 지고 다니던 보부상(褓負商). 현재의 ‘전경련’이라 하면 과장된 표현일까? 보부상은 조선 상권을 좌지우지했다. 조선 건국에 일조하고, 동학농민 전쟁을 무력하게 만드는데 혁혁한 공을 세우고, 흥선대원군의 사설 경비대 노릇을 하며 전국조직으로서 위력을 떨치기도 했다.

결정적인 순간 한 때의 안기부 노릇까지 톡톡히 해냈으니 정권의 애정은 남달랐다. 일제 시대에 들어 탄압 받는 존재가 되었을 뿐 영화(榮華)만 누리던 부보상단(負褓商團)이었다. 조정으로부터 상권을 보호 받던 보부상 단체의 힘이 미치지 않은 곳에 자생 전업 상인이 출현하기 시작한 때는 개항 전후다. 누가 강원도 평창에 나귀 타고 물건 팔러 가겠는가?

한 곳에 수천 수만 명의 인구가 밀집하여 살기 힘든 여건상 최소 30리(삼남지방)에서 100리(40km 강원과 이북지방) 이하에 요즘으로 말하면 시골 5일장이 곳곳에 등장하였다. 머리에 이고 다니던 행상은 장날에는 상업을 했지만 교통수단의 미비로 50리를 벗어나지 못했고 대부분 장사꾼은 농사지어 남은 산물을 갖고 나와 팔아서 다른 것과 바꿔 갔다. 물물교환과 부업(副業) 성격이 강한 때였다.

이곳은 기껏 모여 살아 봐야 현(縣)이나 군(郡)의 읍내가 5천명을 넘지 못한다. 평야지대가 넓은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경기도 여느 농촌지역과는 판이한 사회경제적 환경에 처해 있었다. 이는 1970년 중반까지 이어졌다.

전라북도 무주-진안-장수의 고원지역도 매한가지였다. 장수군(長水郡)의 경우 현재 여전히 장수읍(邑)과 장계면(長溪面) 두 축으로 인구와 경제력, 생활권이 분산되어 있다. 자연지형에 적응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궁한 처지를 말해주고 있다.


나귀타고 장에 가는 허생원 부자와 조선달
나귀타고 장에 가는 허생원 부자와 조선달평창군
평창 봉평도 변화의 물결에 예외일 수 없었다

1930년대 경성(서울), 평양, 원산, 함흥, 제물포(인천), 목포, 부산, 전주 등 열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는 큰 도시도 인구 10만~30만 명 넘는 곳이 흔치 않았다. 당연히 상설시장도 몇 곳 되지 않았다. 그러니 비상설 시장인 5일장 아니었던 곳이 없다. 상설시장이 들어서도 물건을 살 사람이 없으면 존재가치가 없으니 말이다.


평창 산골도 변화의 바람은 막을 수 없었다. 평창군 진부면 출신인 가산에게 <메밀꽃 필 무렵>의 배경이 될 만한 조건이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천만다행으로 화전(火田)을 일궈 강원도 두메 산골 호랑이 나오던 곳에도 드디어 인구 1~2천의 당시로서는 꽤나 큼지막한 도시가 곳곳에 만들어지면서 5일장이나마 들어선 시대 상황이 적절히 작용했다. 변화의 바람에 예외일 수 없었다.

대화장
대화장평창군
화전민들의 삶

현재 서울 강동구 천호동(千戶洞)은 조선말기까지 경기도의 큰 마을이었다. 그걸 감안하더라도 양반과 마름, 토호의 등쌀에 짓이겨지는 것보다 이런 데로 들어와 내 땅을 마련하고 맘 편하게 살고 싶어 집단 이주를 했으니 활기가 넘쳤으리라.

이중환(李重煥:1690~1756. 실학자 호는 청담(淸潭))의 <택리지(擇里志)[영조 27년 1751년 저술한 지리서]>에 따르면 인구 증가로 화전민(火田民)이 급속히 늘어나게 되었다.

이중환의 첫 방문기에 따르면 ‘대관령 넘는 길을 나흘 동안 걸어도 하늘과 해를 볼 수 없을 정도로 원시림이 빼곡이 들어서 있었다’고 한다. 두 번째는 ‘화전을 일구느라 숲에 잦은 방화(放火)로 인구는 늘어 임금의 덕은 대단하나 국토가 망가지는 걸 한탄’하기에 이른다.

이 때 옥수수, 감자를 주식으로 연명하고 메밀도 구황작물로 한 몫 거들었다. 그러던 것이 1970년대 중반 공비소탕 작전의 일환으로 화전민(火田民)을 영동고속도로 주변 통제가 가능한 지역으로 집단 이주시키면서 화전의 역사는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만다.

메밀꽃 필무렵1
메밀꽃 필무렵1김규환
달빛, 메밀꽃 반사되는 빛에 의지해 80리길 재래시장을 오가는 사람들

소설의 배경이 되는 두 곳과 진부 세 곳을 직선으로 연결하면 80리 내외로 걷기에는 다소 무리가 따를 수 있으나 나귀 타고는 그리 멀지 않다. 5일장이 하루, 이틀, 사흘 간격으로 열리니 한 곳이 파장(罷場)하면 국밥에 술 한 잔 걸치고 봉평에서 대화 또는 진부까지 옮겨다니기에 적당한 거리다.

효석도 서울 오가면서 봉평은 익히 익혔을 것이고 군청에 볼 일이 있거나 구경 삼아 평창 쪽으로 가다 대화에 갔을 법하다.

날씨도 아직 여름이라 서늘한 기운은 있지만 외투만 두껍게 걸치고 반딧불이, 달빛, 강물, 들꽃 등 자연을 벗삼아 옅은 빛에 의존해 길을 재촉하면 이내 도착할 수 있었다. 몸에서 열이 나서 다닐 만 했을 것이다.

뿐인가? 요즘이야 '해피700(HAPPY700)' 이라 해서 “해발 700m 대가 사람 숨쉬며 살기 가장 좋다”고 홍보하는 시대다. 그러니 세상사 모를 일이다. 당시는 추석 이전에 겨울옷을 꺼내 입어야 할 형편이고 이동도 쉽지 않은 곳이라는 점에서 보면 의아해지지 않을 수 없다.

그래도 답은 있기 마련이다. 작품을 읽다보면 해발 700m대 고지를 걸으면서도 평지를 걷는 듯한 느낌을 준다. 가산 이효석은 전지적 작가다. 세 주인공이 나귀를 타고 봉평-대화-진부 80리(각각 30여 km) 길에서 넘어지는 걸 허락하지 않는다. 마치 신천지를 찾아 떠나는 신자를 한눈팔지 않고 지켜보며 돕는 하느님 같다.

동이 엄마를 처음만나 위로하고 있는 허생원
동이 엄마를 처음만나 위로하고 있는 허생원평창군
고위평탄면 대화장으로 떠나는 장돌뱅이를 지키는 하느님, 이효석

작가는 늦여름이라 웃옷을 벗어 물레방앗간에 넣어 두기나 하라고 한다. 그래서 만난 사람이 나중에 동이 홀어미이자 홀아비 허생원과 생이별한 처(妻)다. 장돌뱅이에게 그만한 일 없이 고단하고 외로운 삶을 어찌 이어갈 수 있었겠는가?

세 사람이 ‘대화장’으로 떠난 밤 한가하게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붉은 대궁이 향기같이 애잔하고 나귀들의 걸음도 시원하다. 길이 좁은 까닭에 세 사람은 나귀를 타고 외줄로 늘어섰다. 방울소리가 시원스럽게 딸랑딸랑 메밀 밭 게로 흘러간다.(중략)"고 음풍농월 시적 풍경을 담고 있다. 수채화를 이리 그리라면 누가 그릴 수 있을까?

유달리 강원도 평창군(平昌郡)에는 평창, 봉평, 용평, 장평, 후평, 창리, 평촌 등 ‘평(平)’ 자 들어가는 지명이 많다. 평평(平平)한 넓은 땅을 간절히 원해서 지은 지명(地名)일 수도 있겠으나 여긴 상황이 다르다.

지형이 고위평탄면(高位平坦面)이다. 산중(山中)에서도 등고선(等高線)이 조밀하기는 하나 평평한 지대가 넓은 하천처럼 길게 이어져 산과 고개를 오르는 것과는 판이한 지형, 좁지만 순탄한 길의 연속이다. 하지만 군데군데 길가에 너와집 몇 채, 귀틀집만 구경할 수 있을 뿐이다.

봉평 드넓은 메밀밭
봉평 드넓은 메밀밭평창군
동이 홀어머니가 제천으로 간 까닭

지금이야 길이 뻥벙 뚫려 영동고속도로를 이용하면 서울에서 강릉까지 2시간 남짓이면 간다. 장평까지는 2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다. 6번 국도 타고 가도 2시간대면 접근이 가능한 곳이다.

지역 내에서도 31번 국도로 가면 평창(平昌) 거쳐 영월(寧越) 거쳐 충북 제천까지 1시간 30분이면 충분하다. 평창군 관내에서는 웬만한 곳도 1시간이면 이르지 못할 데가 없다.

그럼 곱상하던 동이 어머니는 어찌 해서 제천(堤川)까지 갔을까? 방앗간에서 울고 있던 성서방네 처녀를 허생원이 옷을 벗어 놓으러 들어갔다가 위로를 해주었을 거다. 어둠침침한 곳에서 위로하고 위로 받는 사이 정분을 쌓은 뒤 동이 어미는 아이를 갖게 되고 이차 저차해서 집안에서 쫓겨났다.

엉겁결에 일어난 상황이라 어찌할 수 없었을 테고 한번 지아비면 영원한 지아비인 시대, 생명의 소중함에 손쓸 수 없었던 처자는 당 시대에 맞는 인물이었다. 숙명을 달게 받아들였다.

한편 봉평에서 출발하여 대화에서 얼마 더 걸으면 평창이다. 평창강 따라 주천강에 합류하여 산 한 번 넘으면 충청도요, 도회지에 묻혀 살 수 있는 제천이다.

제천에서 강원도로 꽉 막힌 산을 바라보며 봉평, 친정 그리고 삶이 팍팍 할 때 ‘동’쪽에서 얻은 ‘허’생원의 귀염‘둥이’에게 “네 고향은 이 산을 넘어 강줄기 따라 올라가면 이승복이가 살았던 동네쯤이니 ‘어여, 떠나거라.’” 했을 것이다. ‘네 아비 이름도 모르는 허생원…’하며 눈물 삼키었겠지.

메밀 줄기
메밀 줄기김규환
메밀꽃과 메밀

이효석이 작품 활동을 할 때나 새마을 운동이 한창일 때까지는 강원도 전라도를 막론하고 ‘메밀’을 ‘모밀’이라 했다. 그것은 통일벼, 유신벼 등 다수확 품종이 나주평야를 점령하던 때-보릿고개가 끝나던 시점과 상통한다.

그러니 ‘모밀’은 토속적인 향기가 나고 ‘메밀’은 가공공장을 거쳐 나온 듯한 기계적인 맛과 느낌을 준다. 초기 표지를 보면 <모밀꽃 필 무렵>으로 되어 있다.

메밀은 서늘한 기후와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란다. 심는 시기는 중복(中伏) 무렵이다. 양력으로 보면 7월 20일 전후다. 대개 애당초 메밀을 심으려고 벼르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관개시설이 안된 천수답(淺水畓)이 대부분이었던 산간지방에서 한해(旱害)로 가뭄이 심하여 모내기가 불가능할 때나 심던 대체 작물이다. 거기에 한 번 심어 놓으면 잡초가 새로 날 염려가 없어 일손이 적게 드는 이점도 있었다.

메밀 줄기, ‘대궁’은 두엄자리를 후벼 파 막 꺼내면 강렬한 햇볕보고 ‘나 살려!’라 발버둥치는 지렁이에 가깝다. 선명하기가 이를 데 없어 곧 피가 터져 나올 듯 싶다. 가녀린 줄기에 꽃대 쑥쑥 자라 가을 바람에도 한들한들 흔들리는데 오밀조밀 그 작은 꽃을 어찌 피웠는지 신비롭다. 크지도 않은 수많은 줄기가 엉키지 않고 하늘만 바라보고 크는 사이 좋은 작물이다.

봉평장
봉평장평창군
굵은 소금

그런데 가산은 왜 굵은 소금에 비유했을까? 미국산 암염(巖鹽)은 정사각형 또는 타원형의 결정체로 빻아도 깨지지 않는데 반해 신안군 비금도나 부안 곰소 등 서해안 천일염 결정체를 보면 그 답이 명확해진다.

어느 누구도 흉내낼 수 없다는 육각(六角) 벌집 모양은 아니지만 사각(四角) 같으면서도 결코 사각이 아닌 서릿발 모양의 다각형(多角形)이 연달아 이어진 자연이 아니면 따라 할 수 없는 기이한 형체다.

꽃도 마찬가지로 가까이 다가가 보면 같은 종자의 꽃이면서도 더덕더덕 붙은 모양이 제각각으로 도무지 알 수 없다. 여기에 인공의 불빛이 아닌 자연스런 달빛을 받았다고 상상해 보라. 하얀 메밀꽃은 달밤에 보면 어렴풋한 어둠과 섞여 푸르스름하다. 메밀꽃 축제를 해도 낮에만 하는 현실이 안타까운 것은 나만의 억지일까.

이러나 저러나 "봉평은 지금이나 그제나 마찬가지지, 보이는 곳마다 메밀밭이어서 개울가가 어디 없이 하얀 꽃이야."<메밀꽃 필 무렵> 中 철이 조금 지났지만 메밀을 살짝 데쳐 된장을 으깨어 버무린 메밀 나물이 먹고 싶다. 효석문화제가 끝난 지금 한가히 걸을 수 있어 제격이겠다.

메밀꽃 필 무렵2
메밀꽃 필 무렵2김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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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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