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잘 살고 있니?"

책 속의 노년(63) : 〈죽음, 가장 큰 선물〉

등록 2003.09.26 13:15수정 2003.09.28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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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말, 친정 아버지가 허리 수술로 병원에 입원해 계셨을 때의 일이다. 81세라는 연세 때문에 모두들 걱정했지만 다행히 수술 결과가 좋았고, 입원실에 머물며 회복을 기다리시던 중이었다. 밤에 아버지 옆에서 주무신 어머니가 잠시 쉬러 집에 가신 동안, 나보다 두 살 위인 올케와 내가 낮 당번으로 아버지 옆을 지키게 되었다.

수술 전후의 금식에 이어 미음과 죽을 드시던 아버지가 그 날 아침부터 드디어 밥으로 식사를 하게 되셔서, 올케와 나 둘 다 한시름 놓고 편안한 마음으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갑자기 아버지의 당황하고 다급한 목소리. 제대로 배변이 되지 않아 관장을 한 것이 결국 말썽을 일으킨 것이었다. 우리 두 사람 모두 처음 겪는 일이라 정신 없이 커튼을 치고, 휴대용 변기를 들이 대고, 정말 난리도 보통 난리가 아니었다.

급한 대로 처리를 하고 나니, 이제 씻겨 드리고 옷을 갈아 입혀 드릴 차례였다. 허리에 보조기를 채워드리고 네 발 보행기를 이용해 샤워실로 모시고 가는 데는 성공. 그러나 문제는 아버지가 허리를 굽혀 환자복의 바지를 벗거나 손수 골고루 씻으실 수 없다는 데 있었다.

샤워실에 자리를 잡으신 아버지가 문 밖에 서있는 나를 부르신다. 그래도 며느리보다는 딸이 좀 더 편하게 느껴지셨던 모양이다. 샤워실의 안전바를 단단히 붙잡으시도록 한 후, 아래옷을 벗기고 샤워를 시켜드리기 시작했다.

아버지를, 그것도 아랫도리를 씻겨 드려야 한다는 부담이 너무 커서 근심스럽던 마음과는 달리 막상 샤워를 시작하니 우리 아이들 씻겨 줄 때가 생각나 차분해지면서 아무렇지도 않았다. 앞쪽은 아버지가 직접 씻으시고 나는 엉덩이 쪽을 닦아 드렸는데, 평소에는 그렇게 체격 좋아 보이시던 아버지의 두 다리가 어찌나 살이 없고 가는지 쭈글쭈글한 피부가 오히려 쓸쓸하기까지 했다.

깨끗하게 씻고 새 환자복으로 갈아입으신 아버지가 침대에 누워 혀를 차며 말씀하신다. "쯧쯧, 내가 실수해서 너희만 고생했구나." 환자로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의 손을 빌려야 하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우리들이 살아가며 서로 주고받는 의존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수회 사제이자 심리학자로 '그리스도의 영성'에 대해 많은 글을 남긴 헨리 나웬은, 이 책 〈죽음, 가장 큰 선물〉에서 다른 사람에 대한 "의존"을 좋은 죽음을 맞이하는 일에 꼭 필요한 것으로 꼽으며, 우리 인생의 제2 유아기를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는 인생의 첫 20년 동안 부모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에게 의존하고, 그 후 40년이 지나면 다시 또 누군가를 의존하는 삶을 산다는 뜻이다. 어릴 때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한 것처럼 나이 들면 들수록 더 많은 사람의 도움이 또 다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들이 성장해 가면서 가장 큰 목표로 두고 있는 것 중의 하나는 독립을 유지하는 것이 아닐까. 그것도 최대한의 독립 말이다. 그런데 결국 인생의 마지막 부분은 다시 의존으로 돌아가야 하다니, 참으로 모순되며 받아들이기 어렵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헨리 나웬은 다른 사람에 대한 의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신적인 의존 안으로 들어갈 것과 거기에서 비로소 깊고 내적인 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강조한다.

〈죽음, 가장 큰 선물〉은 크게 '죽음을 잘 맞이하는 일'과 '죽음에 처한 사람을 잘 돌보는 일'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데, 죽음을 피하지 못하고 겪어야만 하는 인간은 그렇기에 결국 죽음이라는 가장 공평한 사건 안에서 하나로 이어져 있는 존재임을 역설하고 있다.

죽음 앞에서 누구도 예외 없이 힘없는 존재라는 자각은, 이미 세상 떠난 사람들과 또 지금 죽어 가고 있는 사람들을 나와 묶는 '위대한 결속감'의 시작이며, 그 깨달음이 결국 죽음에 처한 사람들을 잘 돌보는 길이 됨은 물론이다.

"우리는 모두 가난하게 죽습니다." 돈도, 권력도, 재능도 죽음을 막을 수는 없기에, 마지막에 목숨을 연장해 줄 그 무엇도 가지지 못한 우리 모두는 진정 가난한 존재이며 그러기에 연약함을 나누어 가질 수 있다는 이야기에 이르면 삶의 역설에서 나오는 진리의 향기를 어렴풋하게나마 맡을 수 있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늘 우리가 해야 할 일과 할 수 있는 일에만 온 마음을 기울이지만 결국 사람들은 '우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기억할 것이라는 헨리 나웬의 통찰에 이르면, 늘 무언가를 이루고 얻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지금의 삶이 결코 잘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또한 죽음을 앞둔 사람들의 마음은 다름 아닌 홀로 남겨짐에 대한 깊은 두려움이기에 침묵 가운데 함께 있어 주는 일이 참으로 중요하다는 가르침을 이 책은 예수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이야기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버림받은 경험은 누구에게나 뼈아픈 상실과 배척 당함으로 남아있겠지만, 십자가 위의 예수가 느꼈을 배척 당함과 버림받음은 전존재를 뒤흔드는 일이었을 것이다. 이 때 어머니 마리아가 해 주었던 것은 오직 하나, 그 곳에 있어 준 것이었다. 예수의 죽음과 그것을 통해 이루어진 것을 헨리 나웬은 '가장 위대한 약함'과 '가장 위대한 강함'의 만남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책은 죽음을 앞둔 연약한 사람들을 돌보는 일의 중요성과 함께 특히 그 일을 혼자보다는 여럿이 힘을 합쳐 해나갈 것을 권하고 있다. 죽어 가는 이들을 함께 돌보는 일은, 어느 한 사람 예외 없이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인간 공동의 운명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참으로 올바르고 귀한 일이기 때문이다.

죽어 가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서 그들을 돌보고 아울러 나의 죽음을 진지하게 성찰하며 준비할 때, 우리는 비로소 내 아버지가 잠깐이지만 내게 완전히 의존했듯이, 서로에 대한 의존을 우리들 삶의 한 부분으로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며 그것이 결코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아울러 내 삶이 무언가의 성취로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선물로 남을 때, 진정 우리들은 한 평생 잘 살았노라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결국 잘 사는 일은 잘 죽는 일이며, 스스로를 향한 "너 잘 살고 있니?"라는 물음은 참으로 짧지만 진지하게 마음판에 새겨야 할 금언인 것이다.

(죽음, 가장 큰 선물 Our Greatest Gift : A Meditation on Dying and Caring / 헨리 나웬 지음, 홍석현 옮김 / 홍성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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