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소리'를 들어봤나요?

등록 2003.10.04 16:37수정 2003.10.04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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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한국의 소리> 카탈로그 표지

<한국의 소리> 카탈로그 표지 ⓒ 김영조

山寺夜吟(산사야음)

蕭蕭落木聲(소소락목성) 쓸쓸히 나뭇잎 지는 소리를
錯認爲疎雨(착인위소우) 성근 빗소리로 잘못 알고서
呼僧出門看(호승출문간) 스님 불러 문 나가서 보라 했더니
月掛溪南樹(월괘계남수) "시내 남쪽 나무에 달 걸렸네요."


조선 시대 시인 송강 정철의 <한밤중 산 속의 절에서>라는 작품이다. 나뭇잎 지는 소리를 빗소리로 착각하여 스님에게 나가보라고 한다. 그런데 밖에 나가본 스님은 “시내 남쪽 나무에 달이 걸렸네요”라고 대답한다. 계절이 바뀌는 소리가 들리는가? 우리는 바빠서 소리를 들을 줄 모른다.

소리란 무엇일까? 좁은 뜻으로는 사람의 청각기관을 자극하여 청각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사람이 들을 수 있는 소리의 범위는 진동수가 16~2만 Hz에 불과하고, 또 사람에 따라서 세기 또는 주파수에 따라 더 좁아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물리적인 ‘소리’를 말하고, 감성으로 통하는 정신적인 소리도 있다. 이 감성적인 소리를 예민하게 들을 줄 아는 사람이 예술가일 것이다. 또 청각장애인들에게는 수화라는 또 다른 소리가 있다. 그들이야말로 마음의 소리를 내는 것이 아닐까?

나는 산사에서 들리는 풍경소리가 무척이나 좋다. 그 맑디맑은 고운 소리는 그야말로 극락의 소리가 아닐까? 거기다 범종소리, 법고소리, 목탁소리, 새벽 예불소리들은 우리의 속세에 찌들은 마음을 깨끗이 씻어주는 묘약일 것이다.

a 판소리 5명창 복각음반

판소리 5명창 복각음반 ⓒ 김영조

그럼 ‘한국의 소리’는 무엇일까? 소 울음소리, 밭가는 소리, 장닭 우는 소리, 떡치는 소리, 풍경소리, 다듬이질 소리, 노 젓는 소리 등은 우리의 옛 정서를 아스라이 불러일으키는 ‘한국의 소리’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들만이 진정 우리의 소리는 아닐 터이다. 우리의 선조들과 함께 전해 내려온 판소리, 대금과 가야금의 소리, 풍물의 소리가 바로 진정한 ‘한국의 소리’이리라.


신나라레코드(대표 정문교)가 지난 80년대 말부터 출반한 국악 음반들을 한데 정리한 카탈로그를 97쪽 분량의 <한국의 소리> 책으로 발간했다. 이 책에는 정악과 궁중음악, 한국의 민속기악, 판소리, 창작음반, 기획음반 등 지난 10여 년간 분야별로 출반한 총 147장의 음반들이 사진과 함께 소개됐으며, 국악의 각 장르별 해설, 역대 명창 100여명의 프로필을 정리한 판소리 명창사전, 판소리 전승 계보 등을 부록으로 실었다.

신나라레코드는 이 책자를 음반가게, 학교, 박물관 등에 비치용으로 배포했다. 신나라는 이 <한국의 소리>를 발간하면서 발간의 배경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한반도에서 자생적으로 일어난 소리문화, ‘한국의 소리’는 우리 선조가 남긴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한반도에서 피어난 소리문화는 우리 민족이 걸어온 파란만장한 삶과 운명을 같이 한다. 그래서 우리는 ‘한(恨)’이라고 하는 낱말을 ‘한국의 소리’의 중요한 특성으로 여긴다. 우리가 ‘한’을 언급할 때 ‘한’이 지닌 여러 의미 중 슬픔과 고통 등 부정적인 의미만을 인식하기 쉽다. 그러나 우리 선조는 ‘한’으로 ‘한’을 푸는 적극적 사고방식을 지닌 민족이었다. 그럼으로 해서 ‘한국의 소리’는 ‘한’ 속에 해학과 인내가 스며있고, 눈물과 웃음이 함께 한다.

a 유성기시대 최고의 판소리전집 불멸의 5대 명반

유성기시대 최고의 판소리전집 불멸의 5대 명반 ⓒ 김영조

한국의 소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의 진정한 이해가 우선하는 이유다. ‘한’으로 시작하여 ‘한’으로 끝을 맺는 ‘한국의 소리’는 때문에 ‘정신의 소리’요 ‘농익은 삶의 소리’라 불려진다. ‘한’을 ‘한’으로 풀어낼 수 있는 사람을 우리는 ‘명창’이라 부르고, 그의 소리에 ‘얼쑤’라는 찬사를 보내게 된다. 슬픔을 풀어내어 기쁨을 만들고, 슬픔을 더 슬프게 하여 아예 그 슬픔을 소멸시켜버리는 음악, 이러한 음악을 전 세계 어디서 찾아 보리요.

한국의 소리는 의식이 발달하는 21세기의 대표적인 음악이 될 것이다. 인간의 모든 감성이 녹아있는 우리의 음악은 이처럼 위대한 인류의 문화유산인 셈이다. ‘한국의 소리’를 보존하고, 계승하려는 작은 노력을 ‘신나라’에서는 함께 하고 있다. 우리의 값진 유산을 함께 나누고, 전 세계에 이를 알림으로써 ‘대한민국’의 함성처럼 ‘얼쑤’의 함성이 온 천지에 퍼지게 하는 것이 ‘신나라’의 소망이자 목표이다.


더도 덜도 할 수 없는 '한국의 소리'에 대한 설명이다. 이 책을 펴낸 신나라 정문교 대표는 음반 한 장이 나오면 그것을 홍보하기 위해 언론사에 직접 음반을 들고 뛰는 사람으로 유명하다. 내가 이 책에 대한 설명을 듣고자 연락했을 때 신나라는 다른 직원이 아닌 정 대표가 직접 전화를 해오는 정성을 보인다. 그는 책을 펴낸 사연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역사를 보존하고 기록하는 일은 누군가 분명 나서서 해야 할 일입니다. 나라가 못한다면 우리라도 사명감을 갖고 해야지요. 우리가 소리를 업으로 삼고 있으니 소리의 역사는 우리의 몫이라 생각했습니다. 돈이 되거나 대중들이 알아주는 것은 아니지만 의미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보람을 느낍니다. 이런 작업들이 국악의 대중화, 세계화에도 많은 도움이 됐으면 합니다.

a 민족의 노래 <아리랑> 음반들

민족의 노래 <아리랑> 음반들 ⓒ 김영조

신나라레코드는 국내 대표적인 음반 유통회사로서 정 대표의 말마따나 '사명감'으로 표현될 만큼 국악 음반작업에 십수 년째 매달려 오고 있다. 특히 다른 음반사들이 수익성 때문에 외면하는 유성기음반(SP음반) 복각사업은 그야말로 ‘사명감’의 발로란 말밖에는 할 수 없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소실되거나 명맥이 끊긴 우리나라의 전통 국악, 가요, 동요 등을 음반으로 복구, 우리나라 근대 음악사의 '보고' 역할을 해 온 것이다.

1900년대 초에 나온 유성기 음반을 열정을 가지고 복각해내는 것은 물론 명인, 명창의 연주를 음반에 담고, 창작음악을 발굴하는 일은 어떤 음반사도 따라오지 못할 정도로 정성을 쏟고 있다는 평을 듣는다.

-그런데 어떻게 돈도 되지 않는 유성기음반을 복각하려 생각하셨습니까?
"84년부터 음악감상 모임을 열었는데 한번은 1900년대 초 판소리 5명창의 목소리가 담긴 유성기음반을 감상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워낙 희귀한 음반이어서 당시 반응이 굉장히 폭발적이었어요. 그래서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음반을 듣게 할까 고민하다가 복각을 생각했지요."

그때 탄생된 것이 바로 전설처럼 내려오던 송만갑(1865-1939), 김창환(1854-1927), 이동백(1866-1947), 정정렬(1875-1938), 김창룡(1872-1935) 등 5명창의 목소리를 담은 최초의 유성기음반 복각판인 <판소리 5명창>이다.

이후 신나라레코드는 고물시장은 물론 각 지방과 일본, 미국 등 국내외 곳곳을 뒤져 5만 여장에 달하는 유성기음반을 수집했고, 이를 바탕으로 지금까지 복각한 음반만 110장, 수집한 축음기가 300대에 이른다. 이 가운데는 1935년 '폴리돌' 판 <적벽가>, <심청가>, 1936년 녹음된 '빅터' 판 <춘향가> 등 학자나 국악인들 사이에 근대 음악연구에 있어서 꼭 필요한 명반으로 꼽히는 것들도 수두룩하다고 한다.

a 한국의 범종소리들을 녹음한 음반

한국의 범종소리들을 녹음한 음반 ⓒ 김영조

신나라레코드는 복각 작업만 열심히 하는 것이 아니다. 나이 많은 명인, 명창들 육성을 담아 보존하기 위한 목적으로 지방 곳곳을 찾아다니며 녹음하고, 지금까지 150여 장의 국악 음반을 내기도 했다. 그것들은 정악, 궁중음악을 비롯 기악, 판소리, 창작음악, 민요, 아리랑, 전국의 '곡'(哭) 소리 등 다양하다.

-앞으로의 계획은 어떤가요?
“앞으로는 전국의 '굿' 음악과 '풍물' 그리고 북한의 민요 등을 시리즈 음반으로 만들 계획입니다. 또 그동안 수집한 여러 음악자료들을 모아 ‘소리 박물관’, ‘근대 가요 박물관’, ‘세계민속악기 박물관’ 등을 세우려고 합니다.”

숙명여대 송혜진 교수는 그의 책 <국악, 이렇게 들어보세요>에서 ‘한국의 소리’ 중 하나인 임방울의 '쑥대머리'와 '수룡음'을 이렇게 묘사한다.

‘쑥대머리’라는 말, 임방울의 노래를 생각하는 순간, 사람들은 벌써 흑백 영상처럼 떠오르는 고향의 언덕, 보고 싶은 어머니 얼굴, 유년기의 슬픈 기억에 휩싸여 가슴이 먹먹해질 것이고, 임방울 명창이 목메어 부르는 그 노래를 마치 ‘울고 싶은데 빰 맞는 식’으로 받아들이며 마음 놓고, 눈물을 쏟고 있을지 모른다.

이런 음악을 듣는 동안은 누구를 미워한다거나, 시시비비를 가려야만 직성이 풀릴 것 같은 분한 마음이 오래 머무르지 않아서 좋다. 여유있게 흐르는 <수룡음>의 가락이 봄기운에 녹아내리는 얼음물처럼 밉고 분한 차가운 마음을 풀어내기 때문이다. 음악을 듣다가 짐짓 나 혼자 지나친 ‘호사’를 누리는 기분이 들면, 마음으로 오래 사귄 친지들에게 드리는 봄 선물로 준비해도 좋을 것 같다. 얼었던 물 흐르는 소리처럼 메말랐던 사람들의 마음에 ‘느낌의 강’을 흐르게 할 봄 음악 <수룡음>을.


a 창작국악들/김호식의 명상음악 <장자의 나비>, 조선지심(朝鮮之心)

창작국악들/김호식의 명상음악 <장자의 나비>, 조선지심(朝鮮之心) ⓒ 김영조

한국의 소리’는 단순히 ‘한’의 소리만은 아니다. 우리 겨레의 심성 ‘더불어 살기’와 ‘여유롭게 살기’가 잘 드러내는 소리인 것이다. 엄청난 스트레스 속에서 정신을 못 차리는 현대인들은 먼 옛날 선조들이 들려준 마음의 소리를 복각한 유성기음반에서 느껴보며, 잔잔한 행복을 보듬으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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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으로 우리문화를 쉽고 재미있게 알리는 글쓰기와 강연을 한다. 전 참교육학부모회 서울동북부지회장, 한겨레신문독자주주모임 서울공동대표, 서울동대문중랑시민회의 공동대표를 지냈다. 전통한복을 올바로 계승한 소량, 고품격의 생활한복을 생산판매하는 '솔아솔아푸르른솔아'의 대표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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