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모교 동문 행사에 동행했습니다

등록 2003.10.07 08:56수정 2003.10.07 2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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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3일 개천절은 여러 가지로 좋은 날인 것 같습니다. 우리 민족의 역사가 시작된 날이라는 뜻을 높이 살려 '하늘이 열린 날'로 표현한 그 이름도 좋고, 집집마다 내 걸린 태극기를 보는 기분도 좋고, 가장 살기 좋은 계절 시월의 초입머리를 한껏 장식해 주는 높푸른 하늘이며 상큼한 기온도 좋고….


그런데 나는 며칠 전부터 어떤 처신으로 10월 3일을 살아야 할지 조금은 고민을 했습니다. 초등학교 총동창회 행사와 중학교 총동창회 행사에다가 아내의 모교(공주사대부고) 총동창회 행사가 겹친 탓이었습니다.

아내의 모교 동창회 행사도 나로서는 모른 척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일심동체인 아내의 모교 동창회 행사라는 그 사실 자체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지만, 모교의 동창회를 위해 아내가 오랫동안 노력해 온 일을 생각하면 그것은 정말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우리 부부는 일찍부터 서로의 모교 동창회를 위해 상부상조를 해온 처지였습니다. 과거 오랫동안 내가 고교 동창회의 총무를 맡아 시간을 쪼갤 때 통신문을 수십 장씩 복사해 오는 일과 봉투 작업은 으레 아내의 전담 사항이다시피 했지요. 그때는 편지 봉투를 육필로 쓰는 것이 보편적인 시절이었는데, 아내가 밤잠을 축내며 그 작업을 해줄 때마다 나는 아내의 보기 좋은 글씨를 예찬하곤 했지요.

총동창회 체육대회 행사를 우리 기(期)가 주최하여 치를 때는 총무 마누라인 아내는 앞장서서 앞치마를 두르고 숱한 사람들에게 음식 대접하는 일을 했고….

그런데 내가 마침내 동창회 총무 짐을 벗게 되어서 편지 봉투 쓰는 일도 하지 않게 되니 이번에는 아내가 자기 모교 동창회의 여자 동창 담당 총무를 맡는 것이었습니다. 아내는 내가 하던 방식대로 일을 하더군요. 꼼꼼하고 세세하게 통신문을 작성하고 복사를 해와서는 밤늦도록 봉투 작업을 하곤 했는데, 나도 거들어준 적이 많고, 최소한 그것을 우체국에 가지고 가서 발송을 하는 일은 내 전담 사항이었지요.


아내는 일년에 두 번은 고교 동창회 모임 일로 나들이를 하곤 했습니다. 여름방학과 겨울방학 때 일찌감치 날을 잡아 통보를 하고서는 공주나 서울, 천안 등지로 가서 하루씩 묵으며 동창회 모임을 하고 돌아오곤 했지요. 매번 지리적 불리를 감수하는 셈이었고, 그야말로 시간 쓰고 돈 쓰는 형국이었지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아내가 어렵게 통신문 작성과 봉투 작업을 하고 나까지 거들어서 60여 명 여자 동창들에게 정성껏 발송을 했는데도, 모임에 참석하는 동창들은 대개 대여섯 명이고, 많아야 예닐곱 명 정도였으니, 이곳 태안에서 먼 곳까지 간 아내로서는 헛심 빠질 일….


그래서 아내는 이번 10월 3일 행사를 앞두고는 걱정도 많이 하고 부쩍 신경을 썼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10월 3일 행사는 총동창회 행사인 데다가 그 행사의 핵심 사항은 바로 졸업 후 30년이 된 제15기생들의 '모교 방문'인 까닭이었습니다.

그 학교의 동문들은 해마다 졸업 후 30년이 된 동기생들이 대거 모교를 방문하고 장학금 등 특별한 선물을 모교에 전달하는 행사를 갖는 것이 이미 오랜 전통이 되었다고 하더군요.

그리하여 졸업 후 30년을 맞아 올해 모교를 방문하게 된 제15기생들은 오래 전부터 치밀하게 준비를 해서, 그런 기운은 내 아내를 통해 나에게까지 여실히 전달이 되었지요. 아내에게도 할당된 제15회 장학금의 개별 분담 금액 30만 원을 세 번으로 나누어 납부해야 했고….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 행사에 꼭 참석하기로 일찌감치 마음을 정한 아내는 내게도 동행을 요구하더군요. 당연히 나도 동행을 해줄 것으로 아내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여러 번 아내의 동창회 모임 때문에 공주로 천안으로 함께 나들이를 하며 운전기사 노릇을 해온 나로서는 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지요.

그런데 10월 3일을 일주일쯤 앞둔 시점에서 내게 개천절 공휴일로 날을 잡은 두 건의 행사를 알리는 우편물이 날아왔습니다. 하나는 초등학교 총동창회 총회와 체육대회를 알리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중학교 총동창회 총회와 체육대회를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동창들에게서 전화가 올 것은 당연지사.

동창들에게 차마 아내의 모교 동창회 행사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습니다. 매일같이 등산과 식이요법으로 내 두 가지 지병(당뇨, 통풍)을 관리하며 사는 처지를 설명하고 아무래도 두 군데 모두 참석하기가 어려울 것 같다는 말을 했는데, 사실은 미안한 일이었습니다. 고향에 몸을 놓고 살고 있는 처지에서 고장의 모교 행사들에 얼굴도 비치지 않는다는 것은 아무래도….

그런 사정을 잘 알면서도 아내는 내가 10월 3일 공주행을 하리라는 것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 눈치였습니다. 지난해 봄에 운전 면허를 따게 해주었고 그동안 운전 연습도 많이 했으니 차를 가지고 혼자 갔다 오라고 내가 슬쩍 빈말을 했더니 아내는 펄쩍 뛰며 눈을 흘기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결국 고장의 내 모교 동창회 행사들에는 불참을 하고 아내의 모교 동창회 쪽으로 동행할 것을 최종 결심하면서 내가 참 여러 가지로 바쁜 팔자라는 것을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도리 없이 또 한번 마누라 운전기사 노릇을 하게 된 상황이었지만, 아내에게는 그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동창회 행사 자리에 남편인 내가 동반 참석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나는 훤히 알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아침 일찍 출발을 했고, 공주에 도착해서 잠시 처가에 들렀다가 9시 30분쯤 아내의 모교로 갔는데, 역시 먼데서 사는 사람이 가장 먼저 달려온 형국이었습니다. 개천절답게 하늘은 한없이 높고 푸르고, 투명한 햇살이 온 교정에 가득하였습니다.

11시에 강당에서 기념식이 열렸는데 나는 아내에게 이끌려서 아내가 속한 제15회 동기들 속에 나도 함께 앉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일심동체인 아내와 함께 나도 그 학교의 제15회 동기생이 된 형국이었습니다.

참으로 다행인 것은, 그동안 내가 마누라 운전기사 노릇을 착실히 한 연유로, 아내가 전에 남자 동창들과 함께 했던 모임 자리에도 세 번이나 내 얼굴을 보인 적이 있어서 이미 친숙해진 사람들이 많았고, 또 그들 중에는 소설가도 한 명 있고 중학교 후배가 되는 사람도 있어서 별로 어색해하거나 꾸어다놓은 보릿자루 꼴을 할 필요가 없는 점이었습니다.

기념식이 진행되는 동안 나는 아내의 사진기사 노릇도 해야 했습니다. 사전에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인데, 아내가 학교장으로부터 '공로패'를 받는 순서가 있더군요. 제15회의 여자 동창 담당 총무로서 그 동안 많은 수고를 한 것에 대한 보상으로 공로패를 받게 된 것 같았습니다. 나는 카메라를 휴대한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당혹해하다가 공로패를 받으러 나가는 아내의 뒤를 기분 좋게 따라 나갈 수 있었지요.

제15회 동기생들을 대표하여 김선태 동창회장(전 충남도의원)이 모교에 1500만 원의 장학금을 전달하고 총동창회에 500만 원의 운영기금을, 그리고 전교생과 교직원들에게 기념품을 전달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큰 부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시골 신설 고교 제2기생인 나는 고교를 졸업한지 벌써 36년이 되었건만, 아내 모교 동창회의 이런 행사를 아직 꿈도 꾸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이상한 비애와 열패감 같은 것을 안겨 주는 기분이더군요.

더욱이 30년 전 학창 시절의 은사님들을 무려 20여 분이나 초청하여 단상에 모셔놓고 내 아내가 쓴 '은사님들께 드리는 글'을 김선태 동창회장이 낭독을 하고, 20여 명의 제자들이 단상으로 올라가서 옛 은사님들께 봉투 하나씩을 드리는 장면을 볼 때는 내 학창 시절의 은사님들에 대한 이상한 죄스러움도 느껴야 했습니다. 그만큼 그 장면은 아름답고도 인상적인 모습이었지요.

기념식이 끝난 후 15기생들은 본관 건물 현관 앞에서 기념 촬영을 한 다음 은사님들을 모시고 금강변의 한 음식점으로 모두 옮겨가서 별도 모임을 갖더군요. 나도 그 자리에 참석하지 않을 수 없었고, 아내에게 이끌려서 아내의 은사님들 한 분 한 분께 인사를 드렸지요. 15회 졸업 후 3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모두 정년 퇴임을 하신 아내의 은사님들은 마누라와 동반한 내게 무척 고마워하며 치하를 아끼지 않으시더군요.

아내의 은사님들은 한 분 한 분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불렀는데, 은사님들의 30년 전 '18번' 노래를 기억하고 요청을 하는 제자들이 많았습니다. 백발에다가 생활한복을 입으신 은사님 한 분은 제자들의 요청에 의해 30년 전의 장기였다는 동요에 맞춘 예쁜 무용을 다시 보여 주어서 많은 웃음과 박수를 받기도 했고….

아내는 누구보다도 기분이 좋은 것 같았습니다. 이번에도 60여 명 여자 동창들에게 정성껏 연락을 하고 나서 더욱 긴장하며 걱정을 했는데 스무 명도 넘는 여자 동창들이 참석을 했으니 그럴 수밖에….

그러나 아내의 기쁨 속에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음을 나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남자 동창들은, 특히 서울에서 버스를 대절하여 참석한 동창들 중에는 부인을 동반한 사람들이 많았지만, 여자 동창들 중에 남편을 동반한 사람은 내 아내뿐이었습니다. 나마저 동행을 하지 않았다면 여자 동창들의 남편 동반은 '전멸'을 할 뻔했다는 표현에서 아내의 기쁜 속내를 느낄 수 있었지요.

하여간 아내는 너무도 의기양양한 기색이었습니다. 그런 아내를 느끼며 나는 한편으로는 고맙고 한편으로는 미안한 심정이었지요. 내가 무슨 벼슬을 살았나, 돈이 있기를 한가, 별 볼일 없는 초라한 행색인데도 아내가 그토록 내가 동행해 준 것을 고마워하고 자랑스러워하니, 그런 대로 나는 아내에게 좋은 남편인 셈이었습니다.

좋은 풍경들을 볼 수 있었고, 좋은 느낌과 생각들을 얻을 수 있었던 고마운 하루였습니다. 비록 내 고장의 모교들, 초등학교와 중학교 총동창회 행사들에는 불참을 한 채 먼 공주까지 가서 아내의 모교 동창회 행사에 참석을 하고 왔지만, 아내에게 뭔가 '보답'을 안겨 준 사실만으로도 우리 부부에게는 보람 있는 하루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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