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엔 이 길도 내 발로 걸었지요"

등록 2003.09.30 08:06수정 2003.09.30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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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태안읍 동문리 '샘골연립'의 바로 앞 길 건너에는 '삼성빌라'라는 이름의 3층 연립주택이 한 채 있지요. 그 연립주택의 202호에는 60대 후반의 어머니와 30대 초반의 아들, 두 모자가 살고 있지요.


아들의 이름은 남태현. 1971년생이니 올해 서른 두 살이 되었군요. 단란한 가정의 막내로 태어나서 귀염을 많이 받고 자랐답니다. 고등학생 시절에는 문예부장에다가 교지 편집장을 맡을 정도로 문학 쪽으로 재능을 발휘하기도 했고요.

그런 그가 대학 입시를 치른 다음 합격 통지서를 받고 그 기쁜 소식을 부모님께 빨리 전해 드리려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그만 사고를 당하고 말았답니다. 뒤에서 달려온 군용 트럭에 받힌 거지요.

그는 무려 15일 동안이나 혼수상태 속에서 사경을 헤맸지요. 모두들 그가 죽는 줄 알았답니다. 그런 지경에서 그는 15일만에 드디어 깨어났는데, 그러나 이미 온전한 몸이 아니었습니다. 몸의 왼쪽 절반의 신경이 완전히 마비되어 반신불수, 중증 장애인의 신세가 되고 말았지요.

정부로부터 보상은 받았지만, 그것도 순조롭지는 않았습니다. 국가를 상대로 재판을 벌여야 했고, 법원의 판결에 의한 보상금도 절반 정도는 변호사의 손에 들어갔다고 하더군요.

a 만리포 해변길에서. 장애인 남태현을 중심으로 태안성당 최스텔라 수녀, 필자의 모친 최오채 할머니.

만리포 해변길에서. 장애인 남태현을 중심으로 태안성당 최스텔라 수녀, 필자의 모친 최오채 할머니. ⓒ 지요하

겨우 차지한 절반 정도의 보상금으로 지금 살고 있는 28평 연립주택을 장만할 수 있었고, 남은 돈은 사업을 하는 형에게 빌려 주었는데, 형의 사업이 고전을 면치 못하여 그 돈이 현재 온전하게 남아 있는 상태가 아니라고 하더군요.


교육비 지출이 있는 것도 아니겠다, 단 두 식구 살아가는데 큰돈이야 들지 않겠지만, 그래도 살림을 하다보면 약값이다 뭐다 쪼들리기도 할 터. 그래서 어머니는 농번기에는 거의 매일 품을 팔러 나가지요. 본디 잔병 한번 치르지 않은 건강한 몸이었지만 이제는 나이도 70고개를 바라보게 되고 너무 무리를 한 탓인지 지난해는 허리 아픈 병이 생겨 물리치료를 다니느라 비용도 많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아들의 사고 이후 병을 얻은 아버지가 일찍 타계한 후 어머니는 곧 천주교 신자가 되었답니다. 집 가까이에 성당이 있어서 홀로 무작정 그곳으로 걸음을 한 것이 계기가 되었지요. 중증 장애인이 되어 미래에 대한 아무런 희망도 없이 비참하게 살아가는 아들을 평생 뒷바라지해야 하는 자신부터 무엇에 잔뜩 의지를 해야만 할 것 같았고, 아들을 위해 빌고 매달려야 할 대상이 필요했던 거지요.


그런 어머니 덕분에 태현이도 하느님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고, 집에서 혼자 오래 '통신교리'로 공부를 한 끝에 드디어 지난해 예수부활대축일 하루 전 날 세례를 받았답니다. (세례명 요셉) 그는 요즘 교회 서적들을 읽는 일에서 큰 기쁨과 위안을 얻는 듯싶습니다. 비록 몸은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지만, 불명확한 억양과 발음으로나마 의사 표시를 할 수 있고 두뇌 활동은 정상인 그는 특히 책읽기를 좋아합니다.

내가 태현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때는 1997년이랍니다. 내 아들녀석이 초등학교 1학년 때였지요. 그 해부터 다음해까지 2년 동안 나는 매주 토요일 저녁에는 아들녀석과 함께 태현의 집을 가곤 했습니다. 아직 신자가 아닌 태현과 함께 '저녁기도'를 하고 성가도 부르고, 그에게 하느님 얘기를 비롯하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지요.

그렇게 중증 장애인 남태현과 우리 부자가 함께 했던 의미 있는 '토요일 저녁'들이 좀더 오래 지속되지 못한 것이 다소 아쉽긴 합니다만, 그래도 2년 동안이나마 우리에게 그런 시간이 있었던 것을 나는 하느님의 큰 은혜로 여깁니다.

태현은 처음에는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거부했지요. 토요일 저녁마다 아들녀석과 함께 가서 놀아주곤 하는 나를 무척 고마워하면서도, 내가 영세 준비를 권유하면 고개를 젓곤 했지요. 언제라도 몸이 나아서 자신이 두 발로 걸어서 성당에 갈 수 있게 되면 그때부터 교리를 배우고 세례를 받겠다는 얘기였는데, 그 고집이 여간 아니었습니다.

그런 그가 나이 서른을 넘기게 되면서 마음에 변화가 생긴 듯 집에서 혼자 스스로 공부하는 방식을 취하더니 드디어 영세를 받고 하느님을 믿고 섬기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영세를 전후하여 한동안은 여러 사람의 차량 봉사에 의해 주일마다 성당을 다녔는데, 서울의 형님이 전기로 움직이는 차를 구입하여 보내 준 덕에 지난해 가을부터는 그 전기차를 이용하여 스스로 좀더 자유롭게 성당을 다닐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태현의 전기차는 아홉 시간 충전을 하면 하루를 이용할 수가 있는데, 성능이나 안전성도 우수하고 참 잘 만들어진 물건인 것 같습니다. 태현은 그 차를 타고 봄에는 유채 단지였다가 가을에는 코스모스 단지로 변하는 군청 앞 공지에도 가고, 가까운 군민체육관과 문예회관, 모교인 태안고등학교도 돌아보는 등, 좋은 날씨 속에서는 한결 밝고 흐뭇한 표정을 지어 보이기도 합니다.

나는 태현의 모습을 많이 보아온 터라서 반신불수 장애인의 어려움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가 집 안 거실에서 벽 앞에 설치해 놓은 철봉대를 잡고 일어선 다음 몸을 움직이다가 잘못해서 넘어지는 것을 여러 번 보았습니다. 내가 그의 집에 가서 놀다가 돌아올 때마다 그냥 앉은 채로(앉은걸음으로 거실 문까지 몸을 이동하기는 하지만) 인사를 하는 것이 미안했던지 한 번은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가 그만 중심을 잃고 크게 넘어진 적도 있었지요. 그때 나는 그가 얼마나 안쓰럽고 미안했던지….

(한 번은 그런 일로 해서 모자가 서로 부둥켜안고 몹시 울었다는 말을 내 어머니에게서 들은 적도 있지요.)

몸의 한쪽 신경이 모두 마비된 그런 반신불수 장애에 비한다면 몸의 하반신을 쓰지 못하는 장애는 얼마나 다행한 것인지…. 두 팔을 마음대로 쓸 수 있으니 스스로 손쉽게 휠체어에 오르내릴 수도 있고, 휠체어 바퀴를 굴려가며 농구 경기를 할 수도 있고…. 그런 하반신 마비 장애에 비하면 반신불수 장애는 행동의 제약이 얼마나 극심한지….

언제라도 몸이 나아 두 발로 걸어 성당에 갈 수 있으면 그때 정식으로 교리공부를 하고 영세를 받겠노라고 했던 고집을 버리고, 나이 서른이 넘으면서 스스로 마음을 바꾸어 집에서 '통신교리'로 공부를 하고 세례를 받는 태현을 지켜보면서 나는 한편으로는 그것이 다행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더욱 마음이 아팠지요. 그의 표정 속에서 어떤 희망과 체념이 동시에 얼비치는 것만 같은 느낌이 내 가슴을 에는 듯….

1998년 <태안문학회>를 창립하면서 나는 그를 정회원으로 참여시켰지요. 정회원이긴 하되 모임 참석과 회비 납부 의무를 지지 않는 회원…. 그에게 내가 만드는 <태안문학>과 <소설충청>은 물론이고 과거에 내 손으로 만들었던 <흙빛문학>과 대전교구 가톨릭문우회 작품집들, 그 외로도 많은 문학 서적들과 종교 서적들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글을 쓰도록 지도도 하고 격려도 했지요.

그가 책 읽는 일과 함께 글을 짓는 일도 열심히 병행을 한다면 그의 몸과 마음에 알게 모르게 어떤 좋은 작용 같은 것이 생기게 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를 나는 저버릴 수가 없었던 거지요.

나는 벌써 여러 해째 태현을 위해 거의 매일 기도를 합니다. 매일같이 백화산을 오르내리며 하는 '백화산 묵주기도' 30단에는 각 단마다 '지향'이 있는데, 제10단의 지향은 "지뢰 폭발사고로 부상당한 강원도 인제의 한 소년과 제 이웃 장애인 남태현을 위하여"이지요.

태을암에 접근하는 지점에서 제10단을 하게 되고, 태을암을 지나는 지점에서부터 아스팔트 길 옆에 설치한 지뢰 매설 경고판을 보게 되는데, 그때마다 나는 2년 전에 KBS '사랑의 리퀘스트'에서 본 지뢰 폭발로 큰 부상을 입은 강원도 인제의 한 소년과 십여 년 전 군용 트럭에 치어 장애인이 된 남태현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지요. 그래서 묵주기도 제10단의 지향을 그들을 위한 지향으로 설정한 거지요.

그렇게 태현을 위해 매일같이 기도를 하지만, 실제로는 그에게 자주 시간을 할애해 주지 못하는 것이 늘 미안하고 부끄럽습니다. 오늘 저녁에는 태현이한테 가봐야지 했다가도 실행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올 추석 전에 선물을 건네 주는 일도 어머니가 하셨고….

그러던 차에 모처럼 만에 태현과 꽤 많은 시간을 함께 할 수 있는 기회가 왔습니다. 우리 성당의 두 분 수녀님 중에서 '작은 수녀님'이라고 불리는 최 스텔라 수녀님 덕분이었지요. 지난 2월 우리 성당으로 부임해 오신 최 수녀님은 작은 수녀님으로 불리기는 하지만 오십 줄에 들어서서 중후한 인품과 함께 어머니 같은 자애로움을 발휘하시는 분이랍니다. 평소 독서를 많이 하고 글도 잘 쓰는 학구파 수녀님이기도 하고….

그 수녀님이 지난 월요일(22일) 오전 10시쯤에 우리 집엘 오셨습니다. 월요일은 성직자와 수도자는 물론이고 성당 사무장까지 쉬는 날인데, 그런 휴무일 오전에 수녀님이 우리 집에 오셨으니 나는 긴장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때 나는 거실의 컴퓨터 앞에서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작업 상황임을 아신 수녀님은 적이 미안한 표정으로 말을 머뭇거렸습니다. 그러다가 겨우 용건을 말했는데, 오늘 월요일에 태현과 함께 만리포에 가기로 며칠 전에 약속을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태현과 함께 만리포에 가려고 하니, 그의 전기차를 가지고 가야 하는데 그것을 택시에는 실을 수가 없어서 승합차를 가지고 있는 내게 도움을 청하려 왔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서둘러 컴퓨터를 껐습니다. 수녀님은 내 어머니께도 동행을 청했습니다. 미국에서 15년 만에 귀국했다가 21일 돌아간 딸을 배웅하러 전날 인천공항까지 먼길을 다녀오신 어머니는 잠시 누웠던 몸을 일으키고는 선뜻 외출 채비를 했습니다. 태현의 어머니가 오늘도 농촌으로 품을 팔러 가서 집에 없다는 말에 어머니는 동행을 사양할 수 없었던 거지요.

a 태현의 전기차와 보조를 함께하며 대화를 나누는 최 스텔라 수녀. 옆에서 잠시 앉아 쉬는 최오채 할머니.

태현의 전기차와 보조를 함께하며 대화를 나누는 최 스텔라 수녀. 옆에서 잠시 앉아 쉬는 최오채 할머니. ⓒ 지요하

삼성빌라 앞으로 가서 태현을 내 승합차에 태우고 뒷좌석 하나를 접은 다음 전기차를 실었습니다. 전기차가 생각보다 무거워서 그것을 싣는 일이 꽤나 힘이 들더군요.

하늘은 맑고 햇빛은 투명하고 한없이 좋은 날이었습니다. 한적한 만리포의 해변은 눈이 부실 지경이었습니다. 내 승합차에서 내려진 전기차에 타고 해변길을 보통 걸음 속도로 움직여 가는 태현은 행복한 표정이었습니다. 고교 시절 이후, 그러니까 그 불행한 사고 후로는 만리포에 처음 와봤다고 하더군요. 십수 년 전 그때는 만리포 해변을 자기 발로 걸었다는 말을 어느 순간 슬며시 중얼거리기도 하면서….

전기차의 운전대 한쪽을 잡고 보조를 맞추어 걸으며 태현과 '계 응'으로 묵주기도를 하는 최 스텔라 수녀님의 표정도 투명한 가을 햇살처럼 밝았습니다. 월요일 휴무일마다 앓는 이들, 장애인들, 외로운 노인들을 찾아 함께 지내는 것을 무엇보다 중요한 일로 여기는 수녀님이었습니다. 수련수녀 시절 소록도에 가서 봉사생활을 하기도 했고, 그때 맺은 나환자 양부모님을 찾아 지금도 한 달에 한 번씩은 꼭 '나자로마을'을 방문하는 분이었습니다.

우리는 선창의 한 생선횟집에서 우럭회와 매운탕으로 점심식사를 했습니다. 수녀님이 어느 틈에 선불을 해서 나는 음식값 지불할 기회를 잃고 그냥 얻어먹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태현은 양손을 사용할 수가 없으니, 생선회를 상추에 싸서 그에게 주는 일은 내 어머니 몫이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한 손으로 잘 받아서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오늘도 농촌으로 품을 팔러 가신 어머니 생각을 했습니다. 어머니는 하루종일 뼈빠지게 일을 하고 있을 텐데 자신은 맛있는 생선회를 먹고 있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 말은 들은 내 어머니가 "다음에 태현이 어머니가 노는 날 또 한번 와야겠구먼. 그때는 우리가 비용을 내고…"하셔서 나는 선뜻 명확한 소리로 확답을 했지요.

태현의 어머니 문옥춘씨는 내 어머니 표현으로는 '너무 청백한' 분입니다. 남한테 신세 지는 것을 되우 어려워하는데, 추석 전에 성당의 빈첸시오회(사회 구호 봉사 전담단체)에서 금일봉을 전달하려 하니 자신의 집은 아직 살만하다고 하면서 더 어려운 집에 주라고 끝까지 사양을 했던 분이지요.

그런 어머니가 계셔서 장애인 남태현의 삶은 아직 평온을 유지하고 있는 듯싶습니다. 하지만 남태현의 어머니가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똑같은 모습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벌써 일흔을 바라보는 그 분의 연세를 생각하면 절로 걱정이 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언젠가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태현이 그때부터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하지만 지레 너무 크게 걱정을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이 세상을 태현이 혼자 사는 것은 아니니까요. 중증 장애인인 그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는 최 스텔라 수녀님처럼 그를 예수님으로 여기는 사람들, 예수님 같은 사람들도 주변에 많이 있으니까요. 그때는 그때대로 좋은 방편이 그와 주변 사람들 사이에서 생겨나고 또 마련될 것으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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