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나의 꽃향기에도

신작시 4편

등록 2003.10.09 10:43수정 2003.10.09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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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눈물이 난다


점점 길어지는 내 삶의 그림자를
다시금 돌아보니
내 삶의 도정 안에도
확실한 분기점들이 있었다

중대한 분기점 앞에서
진로를 잘못 선택했으므로
가시덤불 된비알
자갈밭 에움길도 많았음을
느끼고 확인하며
한숨짓는 나날…

회한도 한숨도
다 부질없는 것임을 느끼며
다시 한숨짓던 어느 날

문득 내 아이들을 보았다
아이들이 홀연 내 가슴에
한아름 의문을 안겨 주었다

내가 젊은 날의 그 분기점 앞에서
진로를 그리 선택하여
이리로 걸어온 것은
이 아이들을 만나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내 가슴의 부성애를 스스로 실감하며
사랑으로 감사하고
사랑으로 행복하니
내가 이리로 걸어온 것은
신의 안배가 아니었을까

신의 안배를 확인하고 지키기 위해
내가 가진 조건 안에서
오늘도 최선을 다하는데
왠지 눈물이 난다


젊은 날의 분기점에서
진로를 잘못 선택한 아빠를
책망하는 철없는 아들녀석에게
그건 바로 너를 만나기 위한 것이었어
명확하게 설명까지 해주었으면서도
왠지 눈물이 난다

내 평범한 삶의
소박한 기쁨과 행복 속에서도
가진 것이 없는
사는 일의 고달픈 이치를 헤아리자니….


내 두 팔에 대한 명상

노끈을 찾아 펴놓고
신문지 더미를 두 팔로 들어 옮겨놓고
두 손으로 묶는 일을 하면서
내 두 팔의 존재를
열 손가락의 효용성을
다시 생각했네

문득 고마운 느낌을 삼키며
비록 통풍 결절로 측은한 꼴이지만
내 두 팔의 변함 없는 건재를 소망하며
감사와 청원의 뜻으로
잠시 기도했네

하던 순간
불현듯 떠오르는 기억 하나
십여 년 전 서울 여의도의
전교조 행사에 참가하고 돌아가다가
버스 전복 사고로 팔 하나를 잃은
경남 진주의 어느 여교사…

양치질을 할 때마다
자신의 팔 하나가 없다는 사실을
절감하곤 한다는 그녀의 말이
내 가슴에 충격이 되어
양치질을 할 때마다
오래 마음 아파했었지

옛날 전쟁터를 겪었으면서도
건재한 내 두 팔에 감사하는 오늘
문득 가슴을 치는 뜻밖의 각성
이 감사는
팔을 하나 잃고 사는
그 여교사의 몫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내 두 팔의 건재에 감사하는 대신
그녀가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도록
그녀를 위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하지 않을까

신문지를 마저 묶으며
내 분별의 몫을
다시 생각했네.


남은 40년 세월도
―채광원 매형님의 회갑을 축하하며


결혼도 하기 전에
처갓집 문지방을 넘던
호기롭던 시절
신접살이 깨소금 쏟아지던
그 꽃다운 시절이 바로 어제인 듯한데
슬하의 꽃송이들을 하나 둘 짝지어서
어느덧 할아버지 소리를 듣는가 했더니
성큼 이순의 세월에 이르러
오늘 드디어 화갑(華甲)의 날을 맞았구려

다사다난했던
애환의 60굽이 세월 만큼
번성해진 온갖 피붙이 인연붙이 모인 이 자리
함초롬히 피어난 축복의 꽃다발 속에서
온갖 풍상의 시름을 다 잊은 듯
조용히 머금는 미소가 더욱 온화하구려

힘들었던 세월
오로지 얻고 쌓으려는 삶보다는
잃기도 하고, 이리저리 나누며 살아온
인정 많은 품성 안에
하느님의 손길도 자리했으니
오늘은 그 누구도 부럽지 않은
은총과 행복의 화원이구려

인생의 길에서 가장 소중한
인간의 한계에 대한 통찰
절대자에 대한 겸손의 덕을 얻었으니

인생은 60부터라는 그 말처럼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최고의 보람을 추구하며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지혜의 꽃을
더욱 활짝 피워가며

어려움 속에서도 늘
유머를 즐기는 그 온화한 품성 안에서
남은 40년 세월도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오늘처럼 행복하소서.

(2003년 8월 17일, 안양시 만안구 '산동성'에서)


찰나의 꽃향기에도

유월 상순 어느 날
백화산 정상 부근 우물가로
목 축이러 가던 한 순간
아찔한 황홀감을 맛보았네

내 코를 스치는 꽃향기
깜짝 놀라고 코를 벌름거리며
세상에 이런 냄새가 어디서 오는 걸까
도대체 어떤 나무가 무슨 꽃을 피웠기에
이런 냄새를 풍기는 걸까
몽롱해진 눈으로 주변을 살폈네

그날따라 유난히도
식별 능력이 부실한 내 눈을 절감하는 순간
냄새는 어디로 간 것일까
아무리 다시 맡으려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도
한 순간 내 코를 스치고 지나간 꽃향기는
어디로 간 것일까

그립고도 아쉬운
그 신비로운 향기의 기억을 더듬으며
그 찰나의 무한한 감흥을 반추했네

찰나였기에 그토록
감미로웠던 게 아닐까
짧은 한 순간
내 코를 스쳐 지나간 것에서 빚어진
그 신비한 조우와 인연
그리고 감사…

그 찰나에서 영원을 감지하고
소멸과 회생의 반복
그 생명력의 지속 속에서
내일의 조우를 소망하며
아쉬움 속에서도 기쁘게 발걸음을 돌렸네

내게 순간마다
갖가지 선물을 베푸시고
오늘은 뜻밖의, 찰나의 꽃향기를 주신
백화산에도 계시는 신께 감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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