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부유함과 진실만이 가득 쌓이게 하소서

박철의 <느릿느릿 이야기> 가을 기도

등록 2003.10.16 08:34수정 2003.10.16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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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느릿느릿 박철

가을 풍경은 저녁나절이 더 좋다. 가을 햇살이 대지에 반사되면 온 들판이 황금빛으로 변한다. 감미로운 가을 햇살에 취해 들판을 걷는다. 제일 먼저 내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감나무이다. 감나무에 감들이 주렁주렁 달렸고, 까치들 몇 마리가 홍시가 된 감을 쪼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들깨를 까불고 있는 기원이 할머니를 집 앞에서 만났다. 기원이 할머니는 큰 선풍기를 틀어놓고 검불이 섞인 들깨를 바람에 날린다. 검불과 쭉정이는 바람에 날아가고 잘 영근 들깨는 함지박에 떨어진다. 그 풍경이 참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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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느릿느릿 박철

“기원이 할머니, 올해 들깨 농사가 잘 된 것 같아요?”
“그럭저럭 된 것 같시다.”
“참깨는요?”
“참깨는 글렀어. 비가 어지간히 왔어야지. 참깨는 아무 것도 건지지 못했시다. 다 쏟아져버리고. 목사님네는 올해 깨 좀 심었시꺄?”
“저희는 올해 깨는 안 심었어요.”
“내가 기름 짜면 한 병 줄게.”
“아니예요. 말씀만 들어도 고마워요.”


구 이장댁 모롱이를 돌아 기재 쪽으로 돌았다. 황금들녘에 키가 큰 갈대가 바람에 춤을 추고 있다. 그 풍경이 내 시선을 압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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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느릿느릿 박철

아직도 점화되지 않은 들판
가을 햇살에 갈대가 바람에 나부낀다
사람들 맥박으로 날아오르는
가을 철새가 사람이 쉬하고 오줌 누는
소리를 내며 하늘을 지나간다


벼를 벤 논 한가운데서 은주 어머니가 콩을 털고 있다. 논을 가로질러 살그머니 접근했더니 작대기로 콩을 터는데 몰두한 나머지 내가 왔다는 것도 모르신다. 내가 헛기침을 하자 그제서야 고개를 돌리신다. 모자를 눌러쓴 사이로 들어난 맨 얼굴은 영락없는 누나의 얼굴이요, 어머니의 얼굴이다. 은주 어머니는 시집간 딸이 하나 있고, 아직 결혼을 시켜야 할 아들 하나 딸 하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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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느릿느릿 박철

“그거 밥에 놔먹으면 맛있겠다. 검정 콩 많이 했어요?”
“얼마 못했어요.”
“벼는 많이 베었어요?”
“계속 하는 중이예요. 지금 은주 아버지는 벼 베러 논에 나갔을 걸요.”
“은주 아버지 건강을 어떠세요?”
“힘들다고 그러지요 뭐. 당뇨는 괜찮은가 봐요. 힘들어도 일을 안 할 수 있나요. 목사님이 우리 은주 아버지 건강까지 신경 써주시니 고맙시다.”


벼를 베고 난 논배미의 논은 어떻게 생겼는지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자연의 누드와 같습니다. 경지정리가 끝난 논은 네모 반듯하지만 그렇지 않은 논들은 제 멋대로 생겼습니다. 길쭉한 논, 삐딱한 논. 그렇게 막 생긴 논이 더 정답고 친근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벼 베기를 끝낸 논은 왠지 썰렁합니다. 벼 베기를 마친 논 한 가운데를 지나 무학리 쪽으로 들어섰습니다. 점잖게 생긴 허수아비가 가을 인사를 합니다. 여름 내 긴 장마비를 맞아서 그런지 폭삭 늙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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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느릿느릿 박철

허수아비들이
날더러 허수아비라고 부른다
넓은 들판 진흙 속에 막대기 하나 박아 놓고
고작 입다 쓰다 버린 누더기와 밀짚모자를 걸쳐 놓고
날 허수아비라 부른다
몰려오는 참새 떼
굶주림을 워이워이 쫒아내라고
……
진흙속의 내 다리가 썩어가는 줄도 모르고
하나같이 날더러 허수아비라 부른다
(구재기 詩. 허수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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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느릿느릿 박철

허수아비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허수아비에게 미안한 마음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허수아비님, 고맙습니다. 아저씨가 참새 떼도 쫒아주고 들을 지켜주셔서 결실하게 되었으니 고맙습니다.”

허수아비는 자기 몫을 다하면서도 한마디 불평이 없다. 여름내 뙤약볕에서 그 뜨거운 햇빛을 온 몸으로 받아낸다. 하루걸러 지겹게 내리는 비를 꼴딱 맞고서도 달다 쓰다 말 한마디 없다. 장한 허수아비다. 들판을 지키는 일등공신이다.

다시 신작로 나왔다. 기재 정미소 앞에서 인사리 지호 할머니를 만났다. 지호 할머니가 네 발 오토바이를 몰고 가신다 나를 보자 멈추신다. 내가 ‘멋지시다’고 사진 한 장 박겠다고 하자 새색시처럼 부끄러워하신다. 오토바이 짐받이에는 고구마 한 자루와 방금 뽑은 콩대가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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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느릿느릿 박철

“올해 농사 잘 되었어요?”
“모르겠시다. 그럭저럭 됐는가 본데, 방아를 찧어 봐야 알겠시다.”


삼선리 정미소 앞이다. 정미소 앞에는 도정을 해야 할 볏 가마들이 산더미 같이 쌓여 있다. 지게차가 연신 볏가마를 실어 나른다. 도정이 끝난 벼들이 고운 쌀이 되어 쏟아지고 20키로 포장지에 담겨진다. 기계 굉음에 귀가 멍멍하다.

삼선리 정미소에서 일하는 김달호 씨가 멋지게 포즈를 취해 준다. 자기가 삼선리 정미소 일꾼들 중에 제일 잘 생겼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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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느릿느릿 박철

“목사님, 기왕 사진 찍어주시는 거 잘 나오게 찍어 주시겨.”
“그럼요. 요즘 무척 힘들지요?”
“말도 마시겨. 죽기 살기로 하는 거지요. 체력의 한계에 왔는데 깡으로 버티는 거지요.”


김달호씨는 무학리에서 모범청년이다. 아직 장가를 못 갔다. 길에서 만나면 늘 웃는다. 씩씩해서 보기 좋다. 빨리 장가를 가야 할 텐데…. 해거름, 저녁노을을 맞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마음이 차분에 가라앉는다. 녹차를 한 잔 하고 차분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기도를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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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느릿느릿 박철

풍성한 가을 햇볕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가을 한복판,
당신의 풍성한 생명의 역사가
이 땅의 가난한 자들의
삶의 곳간에 넘쳐흐를 수 있는
마음의 부유함과 진실만이 가득 쌓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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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 기자는 부산 샘터교회 원로목사. 부산 예수살기 대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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