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번 딸아이를 보고 와서

등록 2003.10.21 07:05수정 2003.10.21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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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딸아이(고1)를 타지에 두고 사니 여러 가지로 신경 쓰이는 게 많다. 아침은 제대로 먹고 학교에 가는지, 학교에서 급식을 하지 않은 날은 점심과 저녁을 어떻게 해결했는지, 토요일 오후와 일요일은 어떻게 지내는지, 또 원룸의 기온이며 계절을 무시하는 모기며 이런저런 상태는 어떤지 궁금해지는 일이 많다.


딸아이에게 휴대폰도 하나 마련해 준 터라 통화료 증가를 무릅쓰고 자주 전화를 걸어 이런저런 상황을 쉽게 알고는 있지만, 마음이 온전히 놓이는 것은 아니다. 아이가 스스로 원해서 그리된 것이기는 하지만, 아이를 너무 일찍 고생시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내가 일찍부터 대처에다 삶의 터전을 마련하지 못하고 옛날엔 먼 오지로 불렸던 곳에 지금도 붙박여 살고 있는 것이 아이에게 미안해지는 때도 있다.

그리고 아이 때문에 먼길 출타를 좀더 많이 하게 되는 것 같다. 오로지 딸아이 때문에 먼길 출타를 하는 경우는 점점 줄어서 이제는 거의 없지만, 반드시 출타를 하지 않아도 될 상황에서 딸아이를 볼 겸 출타를 하기로, 그러니까 딸아이 때문에 쉽게 출타를 결정하고 실행하는 경우가 많아지는 것 같다.

최근에 있었던 서울 나들이도 그런 경우였다. 인터넷신문 <오마이뉴스>에서 실시한 '시민기자 전문연수'라는 행사가 이틀 동안 수원 KBS 연수원에서 있었는데, 참가 여부를 묻는 전화를 받는 순간 나는 대뜸 천안의 딸아이를 떠올렸다. 그 연수에 참가하게 되면 가고 오는 길에 천안에 들러 딸아이를 볼 수 있다는 생각에 나는 다른 생각 없이 얼른 응낙을 했다.

어언 오십대 중반을 살고 있는 세월이며, 심각한 지병을 갖고 있기에 집에서 충실히 식이요법을 시행하면서 거의 매일같이 산행이나 해변 도보를 생활화하고 있는 사정이며, 덩두렷하지 못한 작가 명색으로도 실속이야 있든 없든 늘 일거리가 밀려 있는 상황이며, 이런저런 것들을 생각하면 정말 먼길 출타가 쉽지 않은 일인데, 천안의 딸아이 때문에 쉽게 출타를 결정하고 또 실행하니 역시 부모 마음은 어쩔 수가 없는 것인 듯하다.

그런데 이번의 출타에는 좀더 특별한 여러 가지 심정적인 사정들이 결부되어 있었다.


하나는 얼마 전에 딸아이에게서 들은 말에서 연유한 것이었다. 딸아이가 원룸에서 혼자 자취를 하며 학교에 다니는 사실을 여태까지 몰랐던 친구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 사실을 안 친구들이 한결같이 놀라더란다. 그런데 그 놀라는 표정들 속에는 동정심 같은 것도 엿보이더란다. 그 얘기를 딸아이는 스스럼없이 웃으면서 했지만 그 말을 듣는 나는 아이에게 한결 미안해지는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며칠 전에는 딸아이로부터 2박3일 일정으로 경주로 수학여행을 가게 된다는 말을 들었다. 수학여행 하루 전 날 저녁에 전화를 걸었더니 내일 아침의 도시락 공사 준비를 지금 하고 있노라고 했다. 김밥은 엄두도 못 내고, 유부 초밥을 만들려고 유부와 몇 가지 채소를 사와서 처리를 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한 친구가 도시락을 두 개 싸오겠다고 하는 걸 사양을 했다나….


나에게서 그 얘기를 전해 들으신 어머니는 또 가슴이 짠해지시는 눈치였다. "부모가 싸주는 도시락을 받아들고 수학여행을 가는 것이 정상인데 어린 것이…" 하시다가 끝내는 눈시울을 붉히셨다. "세상에는 정말로 외롭고 어렵게 사는 소년가장들도 많아요"라는 말을 하며 어머니를 위로해 드렸지만 나도 마음 한 구석이 짠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머니는 나로부터 서울 나들이 계획을 듣고 얼굴이 환해지시더니, 내가 출타를 하는 날 일찍부터 몸을 바쁘게 움직이셨다. 마침 그 날은 딸아이가 수학여행에서 돌아오는 날이었다. 오후 6시 도착 예정이라고 했다. 딸아이가 먼 수학여행 길에서 돌아와서 반겨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원룸에서 혼자 피곤한 몸으로 저녁을 해먹거나 굶고 자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말을 어머니는 여러 번이나 하셨다.

그 날 아침에 뒷동에서 사는 제수씨가 김밥을 가져왔다. 유치원에 다니는 딸아이가 소풍을 가는 날이라서 김밥을 쌌다고 했다. 어머니는 잘 됐다며 그 김밥을 반도 넘게 다른 그릇에다 담으셨다. 손녀의 식성을 누구보다도 잘 아시는 어머니는 아이가 좋아하는 시래기 된장국을 끓이고, 오이생채를 만들고, 며칠 전에 손수 절인 갈치를 꺼내어 도막을 치고 했다.

그리고 어머니는 음식 보따리를 내 차에 실어주시면서 선선한 싱크대 위에 그냥 놓아둘 음식과 냉장고 안에 넣을 것과 냉장고의 냉동실에 넣을 것들을 다시 한번 단단히 일러주셨다. 나는 일단 천안으로 향하면서 어쩌면 내 딸아이가 누구보다도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언뜻 했다.

딸아이의 원룸 앞에다 차를 놓고 원룸 안으로 들어가서 어머니가 일러주신 대로 처리를 하고 서둘러 나온 나는 버스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결국 천안 딸아이의 원룸에 들르는 일 때문에 서울에는 다소 지각을 했지만, 그리고 지각 시간을 줄이려고 몸을 바삐 움직이느라 헐떡거리며 땀을 흘렸지만, 생각하면 그 역시 즐거운 일이었다.

수원 KBS연수원에서 이틀 동안의 연수를 통해 나는 내 나이와 상관없이 많은 것을 듣고 배웠다. 참으로 좋은 시간이었고 유익한 경험이었다는 확신에 가슴이 뿌듯하다. 내게 그런 기회를 베풀어 준 <오마이뉴스>에 감사하는 마음 크지만, 그것 역시 어느 정도는 딸아이 덕이기도 하니 딸아이에게도 감사하는 마음이다.

연수를 마친 나는 다시 천안으로 내려갔다. 딸아이의 원룸에서 성당에 간 딸아이를 기다렸다가 함께 밖에 나가 음식점에서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 영화관에 가서 영화 구경을 했다.

밤 11시쯤 함께 집으로 돌아갈 때는 길거리의 노점에서 잠시 어묵을 사먹기도 했다. 뜨거운 어묵과 국물을 호호 불며 먹는데 가을밤의 짜릿한 행복과 우수 같은 것이 내 등줄기에 얹히는 기분이었다. 객지에서 홀로 생활하는 딸아이와 가끔 함께 하는 이런 즐겁고 재미있는 시간도 언젠가는 먼 옛날의 추억이 되겠지…. 공연한 생각이지만, 이미 흘러간 시간과 추억이 많아진 나로서는 그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호떡도 사서 하나씩 들고 먹으며 한산해진 밤거리를 걸으면서 나는 잠시 소년 시절 누님에 관한 추억을 떠올리기도 했다.

가난한 집의 맏이인 내 누님은 중학교를 졸업한 후 그 해 겨울부터 몇 달 동안 남의 집에서 산 적이 있었다. 오늘의 내 딸아이와 같은 시기였다. 읍내의 한 의원(醫院) 집에 가서 의원 심부름도 하고 안집의 살림도 도와주는 일을 누님은 했다.

같은 읍내이긴 하지만 지금처럼 모든 집마다 전화기가 있는 시절도 아니었다. 그 집에서 생활하는 누님은 절해고도에 머무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가끔 누님을 보러 밤에 그 의원에 가곤 했는데, 환자 대기실의 연탄 난로를 지키고 앉아 있곤 한 누님은 나를 볼 때마다 어찌나 반가워하는지 몰랐다. 안에 들어가 나로서는 처음 보는 빵을 갖다 주기도 하고, 내 옷매무새를 여러 번씩 만져주기도 하며, 시간이 가는 것을 몹시 아쉬워하기도 했다.

어린아이가 너무 고생하는 것 같다며 몇 달 후에 아버지가 누님을 그 집에서 데려 와서 우리 남매의 간헐적인 상봉, 그때마다 누님이 내게 보여주었던 그 애틋한 모습은 곧 끝이 났지만, 누님의 그때의 그 모습은 내게 애틋하면서도 좋은 추억으로 남게 되었다.

나는 요즘 내 딸아이에게서도 내 누님의 그 시절 모습을 조금은 느끼는 것 같다. 녀석은 아빠와 만나 음식점에서 저녁을 먹을 때마다 동생 얘기를 하곤 한다. '뼈 없는 닭갈비'를 먹을 때도, 쟁반국수와 막국수를 먹을 때도 동생 생각을 했다. 동생이 그런 것을 먹지 못하고 살아서가 아니라, 동생도 함께 하는 오붓한 자리를 녀석이 그리워하고 있음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가까운 시일 안에 아들녀석을 데리고 다시 천안에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딸아이에게도 그 얘기를 해주었다.

우리 남매의 옛날 그 시절과 지금은 모든 사정이며 조건이 완전히 다르지만, 동생을 두고 사는 딸아이에게서 옛날 내 누님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참 재미있고도 다행한 일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아무튼 내 누님에게서도 나에게서도, 그리고 내 아이들에게서도 시간은 끊임없이 흐르고 있음을 다시 느낀다. 지금 이 시각에도 저 무상의 세계를 향해서 흐르는 시간을, 우수의 계절인 이 가을에는 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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