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안경과 시력

신작시 3편

등록 2003.10.17 07:28수정 2003.10.17 2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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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을 주었으므로


가을 한철 평일의
몽산포 해변엔
행복한 시절들이 흐드러지고 있었다
드라이브 차량도
말을 탄 팔자 좋은 사람도
경비행기의 소음도
하늘의 구름을 휘어잡는 듯했다
잔잔한 바다 위에 내리꽂히는 투명한 햇살
가물대는 무수한 물비늘도
그들의 행복한 시절을 고무하는
눈부신 축복인 것 같았다

적막한 곳을 찾아서
한참 광활한 해변을 걷다가
움직이지 않는 두 남녀를 보았다
무슨 사연이기에
저 젊은 두 사람은 저리도 꼼짝도 않는 것일까?
모래톱에 앉아서 오래 미동도 하지 않는 그들은
정물화 속의 물체들 같았다

도대체 얼마나 무거운 사연이기에
저들을 저토록 오래도록
꼼짝도 못하게 하는 걸까?
호기심과 궁금증은 곧
내게 무거운 짐이 되어 버렸다
저들이 그 무거운 짐을 극복하고
마침내 다시 움직일 수 있을까?
그리하여 나의 의문들은 곧
애틋한 연민과
간절한 기원이 되어 버렸다

내가 왜
누구인지도 모르는 두 사람에게서
사람의 온갖 마음을
오늘 다시 갖게 되었을까?

이유는 단 하나
내가 그들에게 시선을 주었으므로….


나는 안다

1.


나는 안다
병의 고통을
그 형벌의 십자가를

그것을 내가 어찌 알까
이유는 한가지
내가 그 십자가를 지고 살므로

2.

나는 안다
건강한 사람들의 쾌락을
벼랑을 향해 가는 분방함을

그것을 내가 어찌 알까
이유는 한가지
나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으므로

3.

나는 안다
후회해도 소용없음을
세상의 허무한 이치를

그것을 내가 어찌 알까
이유는 한가지
삶 자체가 내가 선택하지 않은 십자가이므로

4.

나는 안다
내 십자가가 내 삶의 과제임을
그리하여 그것이 내 희망임을

그것을 내가 어찌 알까
이유는 한가지
십자가를 지고 매일같이 기도하며 살므로….

색안경과 시력

중1 시절 5·16 군사 쿠데타를 맞으면서
박정희 육군 소장을 통해
색안경이라는 것을 처음 보았다
멋있는 것 같은 느낌 옆으로
이상한 두려움 같은 것을 느꼈던 기억이
지금도 내 뇌리 아니면 시신경의 어느 구석에서
묘하게 꼬물거리는 것 같다

색안경이라는 물건이
시력보호 뿐만 아니라
자신의 위력이나 가진 것을 과시하면서
상대방에게 위압감을 주기도 하고
뭔가를 감시하거나
때로는 흠탐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는 것을
세상을 살아가면서 알게 되었다

또 색안경이라는 물건이
묘한 작용을 낳을 수 있는 물건이라는 것도,
그리하여 착용 버릇이 발전하다 보면
색안경이 안겨 주는 변색에도 익숙해지고
그 놈의 변색이 자칫 단색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도
세상을 살아가면서 알게 되었다

내 일찍이 색안경을 혐오하여
운전대를 잡고서도
사시사철 원색 보기를 좋아하며 살아왔지만
어느 핸가 유행성 안질을 앓은 후로
한쪽 눈의 시선 안에
이상한 점(點) 하나를 갖게 되었다

특히 좋은 풍광이나
어떤 사물을 똑바로 보려 할 때마다
내 시선 안에 나타나서 함께 움직이는 점
똑똑히 보려 하면 할수록
내 시선을 따라다니며 뭔가를 훼방하는 점

그 작은 형체가 너무도 성가셔서
어느 날 색안경을 써보았다
신기하게도 그 점이 보이지 않았다
눈부신 양광 속에서도
눈부신 양광을 둔화시켜 주는 변색 속에서도
저 명료하게 보이는 풍광 앞에서도
내 시선 안에 그 점은 없었다

그 순간 묘한 두려움을 느꼈다
내 시선 안의 결점마저도 색안경이
완벽하게 봉쇄하고 은폐해 줄 수 있다는 사실이
내 모골을 송연하게 했다

수려한 풍광 앞에서 더욱
명확한 사물 앞에서 한결
뚜렷해지는 내 시선 안의 결점
그것이 나는 그리웠다
그런 현상을,
내 시선 안의 결점을,
그것의 인정을,
나는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백화산의 정상에서 보는 사방의 풍광은
내 시계를 한없이 확장시켜 주었다
새로 생겨난 수많은 사물들이
하나같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있었다
그 명확성의 실체 앞에서
나는 상쾌 통쾌 명쾌함을 심호흡하며
문득 내 시선 안의 결점을 찾아보았다

없었다
명징한 가을빛 속에서
투명한 시계, 드넓은 시야 속에서
수려한 풍광, 명확한 사물들 앞에서
그토록 성가시게 내 시선을 쫓아다니던
내 시선 안의 그 결점은 나타나지 않았다

일시적인 현상일지라도,
그리하여 나는
다시금 희망을 갖게 되었다
세상의 투명한 정화로 말미암아
내 시선의 결점도 치유될 수 있다는 것을!

그리하여 결국
세상의 정화를 위해
내가 더욱 기도하고 노력해야 함을!
명징한 가을빛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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