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 상수리 줍기 내기합시다!"

박철의 <느릿느릿 이야기>

등록 2003.10.29 08:29수정 2003.10.29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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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릿느릿 박철
가을햇살이 눈부십니다. 추수가 끝난 논 자락은 장기판처럼 네모난 선이 그어지고 있습니다. 정미소에는 논에서 날라 온 볏 자루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습니다. 농촌은 이 맘 때가 가장 바쁜 때입니다. 아침에 들에 나가면 해가 지고 어둑어둑해져야 집에 들어올 정도로 농부들의 고단한 생활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래도 얼굴표정은 밝습니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봄부터 여름내 땀 흘려 가꾼 것을 자기 손으로 거두고 있으니 몸은 고단하지만 마음은 부자입니다.


농촌 아낙네들은 남편들 가을걷이 뒷바라지를 해주면서 틈틈이 상수리를 줍습니다. 길에서 동네 아주머니들을 만나면 "상수리 얼마나 주었어?"하는 말이 이 계절 인사입니다. 집집마다 마당에 거적을 깔고 상수리를 말리는 풍경이 정겹습니다.

점심밥을 먹고 신문을 보고 있는데, 아내가 상수리 주우러 가자고 성화를 합니다.

“어제 바람이 많이 불었잖아요. 상수리 엄청 많이 떨어졌을 거예요. 빈둥거리지 말고 얼른 채비해서 산에 갑시다.”


느릿느릿 박철
올해는 상수리가 별로 많이 달리지 않은 모양입니다. 여름 중간 만해도 올해 상수리 풍년들었다고 소문이 날 정도였는데 늦장마가 겹치면서 상수리가 제대로 영글지 못하고 다 떨어지고 벌레 먹고 해서 예년보다 적게 열렸습니다. 상수리도 이른 상수리가 있고, 늦은 상수리가 있습니다. 교동은 숲이 많은데 상수리나무가 교동인구보다 많을 정도로 숲마다 상수리나무가 빼곡합니다.

아내와 함께 산책도 할 겸 오랜만에 숲 속에 들어갔습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지나간 흔적이 있고 길이 반질반질합니다. 상수리 알이 낙엽이나 풀 섶 사이에 숨어 있기 때문에 기다란 막대기나 갈고리로 뒤적거리면 상수리가 톡하고 튀어 나옵니다. 눈이 좋고 행동이 민첩한 사람은 많이 줍고 우리 내외처럼 눈이 나쁘고 행동이 굼뜬 사람은 같은 시간이라도 남들 줍는 것의 절반 밖에 줍지 못합니다.

그래도 나보다는 아내가 언제나 많이 줍는 편입니다. 작년에 어머니가 상수리 주머니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헝겊으로 만든 것인데 저자거리에서 아주머니들이 허리춤에 차고 있는 전대와 비슷하게 생겼습니다. 그걸 허리에 차고 상수리를 줍습니다.


느릿느릿 박철
일단 숲에 들어오면 아무 생각도 없습니다. 상수리나무 사이로 가을햇살이 비치고, 수북이 쌓인 가랑잎을 밟으며 작대기로 툭툭 치면서 상수리를 줍노라면 세상 모든 걱정 근심이 다 물러갑니다. 아내가 오늘은 기분이 좋은 모양입니다.

“여보, 오늘 상수리 누가 많이 줍나 내기 할래요?”
“무슨 여자가 내기를 그렇게 좋아하나? 무슨 내기?”
“진 사람이 이따 저녁에 대룡리 가서 국밥 사는 걸로 합시다. 어때요?”
“좋아! 당신 돈은 있어?”
“그럼요.”


이제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눈에 불을 키고 아내와 나는 상수리 줍는 일에 몰두했습니다. 예년보다 많지 않으니 더 열심히 작대기로 뒤적거려야 합니다. 작대기로 낙엽을 뒤적뒤적하다가 상수리가 톡하고 튀어나오면 그걸 줍는 재미가 여간 쏠쏠한 게 아닙니다. 햇살에 상수리 알이 반사되어 반짝거리면 얼마나 예쁘고 기특한지 모릅니다.


상수리를 재미로 줍는 것이지만, 한 알 한 알 주울 때마다 허리를 구부리고 주어야 합니다. 보통 힘든 게 아닙니다. 상수리 주머니에 상수리가 두어 되 정도 들어가는데 상수리가 가득 차면 등에 지고 있는 배낭에 붓고 다시 빈주머니로 상수리를 줍습니다. 주머니에 가득 주은 상수리를 배낭에 쏟을 때, 그리고 배낭이 배부르게 상수리로 가득차는 걸 보면 기분이 삼삼합니다.

느릿느릿 박철
몇 시간 상수리를 주우면 수천 번도 넘게 허리를 구부려야 합니다. 장난이 아닙니다. 상수리 줍기가 끝나갈 쯤에는 배낭 무게도 묵직합니다. 그 무거운 걸 지고 상수리 한 알을 줍기 위해 허리를 굽히고 땅에 인사를 해야 합니다. 가을이면 농촌 아낙들은 상수리 줍는 일로 몸살을 앓습니다. 나도 처음에는 상수리를 적당하게 줍고 말 것이지, 무에 그리 극성스럽게 줍는가 하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그게 아닙니다. 상수리를 주어서 상수리 가루를 만들어 여기 저기 팔아 용돈으로 쓰기도 하고, 아이들 교육비에 보태기도 합니다. 교동에서는 여자들이 손에 쥘 수 있는 유일한 부수입 거리입니다. 이 돈은 남편들도 절대 건드리지 못합니다. 그러니 상수리 줍는 일이 고되지만 참고 그 일을 합니다.

상수리를 주어다가 햇볕에 말려서 넙적한 돌로 문질러 껍질을 까고 방앗간에 가서 빻아 와서 물을 부어가며 고운 천으로 녹말을 내리고 햇볕에 잘 말려서 다시 곱게 부수어 상수리 가루를 만들기까지 그 힘든 과정을 해보고 나면 농촌아낙들의 마음을 조금 알 듯 합니다.

느릿느릿 박철
별안간 아내가 '으악'하고 비명을 지릅니다. 깜짝 놀라서 달려갔더니 지게 작대기만한 독사 한 마리가 대가리를 치켜들고 있습니다. 등골이 오싹해집니다. 아내와 나는 뒷걸음으로 줄행랑을 쳤습니다. 숲 속 군데군데 산소가 있는데 산소 근처 상수리나무에 상수리가 많이 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산소주변에는 가끔 뱀이 출현합니다.

“많이 주었어?”
“뱀이 무서워서 못 줍겠어요. 뱀이 또 나타날까봐 겁나서 못 줍겠어요.”
“나도 마찬가지야.”


숲 속에 들어 온 지 서너 시간이 지났습니다. 거의 저녁때가 되었습니다. 아내와 나는 상수리 줍는 일을 끝내고 양지바른 풀 섶에 앉아 뜨거운 커피를 마십니다. 아내 얼굴이 해바라기처럼 환해집니다.

“아 좋다.”
“자 그럼, 누가 많이 주었는가 어디 대 봅시다.”


대 보나 마나입니다. 아내가 주운 건 두어 되 실히 넘겠고, 내가 주운 건 고작 한 되 밖에 안 될 것 같습니다. 아내가 이겼습니다.

느릿느릿 박철
저녁햇살이 온 숲을 황금색으로 만들어 줍니다. 바람에 갈대가 살랑살랑 춤을 추고 있습니다. 온 숲과 들녘에 넉넉한 평화가 물결치고 있습니다. 내 마음까지도 덩달아 깊은 감동이 찾아오고 있습니다.

당신을 사랑할 때의 나의 마음은
가을 햇살을 사랑할 때와 같습니다.
당신을 사랑하였기 때문에
나의 마음은 바람 부는 저녁 숲이었으나
이제 나는 은은한 억새 하나로 있을 수 있습니다
당신을 사랑할 때의 내 마음은
눈부시지 않은 갈꽃 한 송이를
편안히 바라볼 때와 같습니다.
당신을 사랑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제는 조용히 다시 만나게 될
아침을 생각하며 저물 수 있습니다.
지금 당신을 사랑하는 내 마음은
가을 햇살을 사랑하는 잔잔한 넉넉함입니다
(도종환의 詩. 가을 사랑)


느릿느릿 박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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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 기자는 부산 샘터교회 원로목사. 부산 예수살기 대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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