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자무협소설> 전사의 후예 252

말똥 치우는 늙은 개 (7)

등록 2003.11.17 15:34수정 2003.11.17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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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 가에서 약간은 놀란 듯한 장일정의 음성이 들린 직후, 의사청으로 오르는 계단 아래로 내려와 있던 이회옥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하하! 정아야, 우리 오랜만이지?”
“…?”


장일정은 자신의 밀고로 이회옥이 생포되어간 이후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는 호옥접의 말에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모처럼 무림천자성을 위해 공을 세웠다는 생각에 흐뭇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날 밤 장일정은 깊이 후회했다.

무릇 의원이라 함은 상대가 누구이든 목숨을 구해주는 것이 본분이건만 한 사람의 의원으로서 생목숨 하나를 끊어 버리는 일을 했다는 생각이 든 때문이다.

어쨌거나 이미 잡혀간 사람은 잡혀간 사람이라 생각하고 애써 그 일을 잊으려 하였지만 간혹 찝찝한 기분이 들게 하였다. 하여 어떤 날에는 잘 마시지 않던 술을 마시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이회옥이 당주가 되었다는 소리를 듣고는 호옥접과 마찬가지로 한시름 덜었다는 듯 안도의 한 숨을 내쉰 바 있다.


듣자하니 마선봉신 이회옥은 철기린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아 당주급으로는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는 내원까지 무시로 드나든다고 들었다. 게다가 철기린의 누이동생인 빙화가 그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소문도 들었다.

그래서 어떤 때에는 자신 덕분에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되었으니 거꾸로 자신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실소를 머금기도 하였다. 또한 새옹지마(塞翁之馬)란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하였다.


어쨌거나 무림천자성이라는 같은 울타리 안에 근무하고 있으니 언젠가는 한번쯤은 조우하게 될 것이고, 그때 미안했었다는 말을 하리라 마음은 먹고 있었다.

하지만 그럴 기회는 좀처럼 생기지 않았다. 비상이라도 걸렸는지 팔대 당에 속한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오늘, 이곳 의성장에서 이회옥을 만나리라고는 전혀 상상도 못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가 와 있다는 말에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던 것이다.

그런데 정작 놀란 것은 이회옥이 자신에게 반말을 하고 있다는 것과 환한 미소를 짓고 있다는 것이었다. 하여 잠시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한 채 그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때 이회옥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는 동작을 하면서 한 손으로는 말의 엉덩이라도 두들기는 듯한 몸짓을 하고 있었다.

이것을 본 장일정의 뇌는 하얗게 비어 버렸다. 이회옥이 어릴 적 헤어졌던 사촌 형이었던 것이다!

불과 열흘 차이이지만 엄밀히 따지면 형은 형인 법이다.

그와 헤어진 이후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늘상 비룡이 천하에서 가장 뛰어난 말이 될 것이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던 그를 어찌 잊겠는가!

“혀, 혀어엉…? 저, 정, 정말 혀, 혀, 형이야…?”
“하하하! 녀석, 울보인 건 여전하구나. 그래, 나야! 나, 이회옥! 네 사촌 형!”

필설로 형용조차 하기 어려울 정도로 격동하는지 말조차 제대로 잇지 못하고 있는 장일정의 두 눈은 삽시간에 습기로 축축해졌다. 그리고 이내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 그것은 닦아내고 어쩌고 할 사이도 없이 볼을 타고 주르르 흘러내렸다.

태극목장이 그렇게 된 후, 드넓은 천지에 피붙이 하나 없는 외톨이가 되었다는 고독감에 내쉬었던 한숨이 몇 번이던가!

그런 와중에도 이회옥만은 죽지 않고 어딘가에 살아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그 역시 늑대에게 당했다면 시신을 모아둘 수도 없으며 비석을 세울 수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를 찾을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그러기엔 천하가 너무 넓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를 잊고 있던 것은 아니다.

사실 무천의방에 몸담은 후 속명신수와 그 일당에 의한 혹독한 핍박 속에서도 꿋꿋하게 버틴 것은 독공을 익히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성명 석 자를 만 천하에 알리기 위함이었다.

세상 천지에 장일정이라는 이름이 알려지면 이회옥이 찾아오기 쉬울 것이라 생각하였던 것이다.

전에 의성장에서 이회옥을 만났으면서도 그를 알아보지 못한 것은 그가 앞머리를 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삼천이십칠이라 새겨진 흉터를 가리기 위함이었다.

어린 시절, 이회옥은 이마가 반듯하면서도 넓은 편이었다. 그리고 말을 타고 달리면 이마에 솟은 땀 때문에 시원해지므로 늘상 머리를 하나로 묶어 뒤로 넘기길 좋아했다.

그렇기에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이후 마선봉신의 성명이 이회옥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설마 하는 마음이었다. 천하에 이씨 성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많으며, 회옥이라는 성명을 지닌 사람이 얼마나 많겠는가!

하여 동명이인일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혀어엉…! 흐흐흑! 형…! 흐흐흐흑!”
“하하! 녀석, 하하하! 하하하하!”

장일정이 와락 달려들자 이회옥은 기다렸다는 팔을 벌려 그의 동체를 받아 안았다. 그리고는 쉴새 없이 눈물 흘리는 그의 등을 두드렸다. 그것은 참으로 감격적인 해후(邂逅)였다.

친형제처럼 지내던 어린 시절, 평생 태극목장에서 함께 생활할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러다 불의의 사고로 모든 것이 사라졌고, 둘은 각기 다른 운명의 길을 걸었다.

고난도 겪었고, 희열의 순간도 있었다. 그러다가 이렇게 만난 것이다. 그러니 어찌 감격스럽지 않겠는가!

곁에서 이런 모습을 지켜보던 호옥접의 봉목(鳳目)에도 이슬이 맺혀 있었다. 그것은 이심전심(以心傳心)의 결과였다. 둘의 심정이 어떨지 충분히 짐작이 가기에 절로 격동된 것이다.

장일정에게 사촌 형이 있으며 언젠가 꼭 찾아야 한다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이 세상에 있는 유일한 피붙이기 때문이 아니라 친형제 이상이기 때문이라 하였다.

그때 성명 석 자를 들은 적은 있었지만 워낙 오래 전에 들은 이야기인지라 이회옥과 함께 있었으면서도 전혀 떠올리지 못했던 것이다.

탁!

“뭐라고? 그걸 누굴 줬다고…?”
“왜, 왜 그래? 뭐가 잘못 됐어?”
“이, 이런 바보 같은…! 어떻게 그런 일을…!”

격한 해후의 시간이 지난 뒤 의사청에 자리한 이회옥과 장일정은 지나온 나날들을 풀어놓았다.

무림지옥갱 이야기를 할 때에는 장일정이 격분했고, 속명신수와 그 일당에 의하여 핍박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에는 이회옥이 격분하였다.

길고 긴 이야기가 끝날 즈음 호옥접은 이런 날 술이 없어서 되겠느냐면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잠시 후 기름진 안주와 주향 그윽한 모태주를 가지고 돌아왔다.

그러는 동안에도 이회옥과 장일정의 대화는 끊이질 않고 있었다. 태극목장 이후의 이야기가 끝나자 현재 맡고 있는 일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

그러면서 술잔을 주고받던 중 이회옥이 탁자를 내리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지금까지의 화기애애했던 분위기가 한순간에 깨졌다.

“이런 바보! 태극목장이 어떻게 해서 사라졌는지 알아?”
“그야, 늑대들이 공격해서…”
“이런 바보! 말은 괜히 있냐? 늑대가 공격하면 타고 도망가면 되지. 그냥 가만히 있다가 다 죽어? 그리고 대완구는 늑대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걸 잊었어?”
“그, 그럼…? 늑대의 공격이 아니었단 말이야? 사부님은 늑대가 공격해서 그랬을 것이라고 그러셨는데…”

“잘 들어둬! 태극목장이 그 지경이 된 건 무림천자성의 차기 성주가 될 철기린 구신혁이 지시해서 그렇게 된 거야! 알았어? 그런 쳐죽일 놈에게 북명신단을 바쳤다고? 바보…! 어휴…!”

장일정의 얼굴은 더 이상 찌그러질 수 없을 정도로 찌그러졌다. 이회옥의 말이 사실이라면 철천지원수에게 보물을 갖다 바친 셈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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