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왜 손가락이 없어요?"

<내 추억속의 그 이름 116>공장일기(12)

등록 2003.11.20 12:26수정 2003.11.21 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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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창원공단관리청 옆에 조성된 공원에 앉아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나

창원공단관리청 옆에 조성된 공원에 앉아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나 ⓒ 이종찬


하품하며 꼭두새벽이 온다
여섯 시 벨소리와 함께
밤새 숨막히도록 쏟아지던
정밀도 천분의 일 공단공화국 제품이
박스마다 수북수북 쌓인다
저마다 뻐껌한 얼굴로
숨막히도록 많은 작업량을
떨리는 손으로 기록한다
그러나 아직 눈물빛으로 살아 움직이는
뒷뜰에 묻은 영수의 손가락… 피…
시퍼렇게 밝아오는 창 밖
영수의 전표에도 작업량을 기록하다가
하룻밤새 신내린 사람처럼
하나 둘 화장실로 들어가
피로와 억울함으로 오줌을 싼다
철야 속에 히히덕이는 엿놈들의
응큼한 얼굴 위에
버섯 대가리 위에
노동으로 터지는
선진조국 오줌을 철철철 갈긴다


(이소리 '공단의 새벽' 모두)


그랬다. 그 당시 내가 그렇게 애매한 필화사건을 겪으며 큰 곤욕을 치르고 있을 때, 공장 안 각 부서에서는 눈코 뜰 새 없을 정도(당시 노동자들은 '*볼 틈도 없다'는 은어를 썼다)로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나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내가 소속된 밀링과 탁상선반 부서에서도 어김없이 잔업과 철야근무가 이어지기 시작했다. 국경일과 휴일에는 당연하다는 듯이 특근을 했고, 특근을 한 그날 저녁에도 잔업과 철야근무를 돌아가면서 해야만 했다.

"계속 이래 살다가는 쪼매 일찍 죽을끼라."
"와?"
"우리는 하루에 이틀을 사는 사람들 아이가. 말하자모 우리 인생을 미리 가불해서 살고 있다 이 말이다. 그라이 우리가 우째 오래 살끼고."
"하긴 내도 지난 달에 월급을 가불해서 쓰고 나니까, 월급봉투로 받아도 쓸 끼 하나도 없긴 하더라마는."

아니, 어쩌면 그렇게 공장 일이 바빴기 때문에 나는 비상계엄사와 안기부의 무시무시한 화살을 피해갈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 오죽 바빴으면 인근 마을에 살고 있는 아낙네들에게 일당을 주어가면서까지 일을 시켰겠는가. 물론 그 일은 아주 단순한 일이긴 했지만.


"어휴! 이 넘의 세월은 우찌나 빠른지…."
"아재! 아들만 둘씩이나 둔 아재가 머슨 걱정이 있다꼬 아침부터 땅이 거져라 한숨만 내쉬고 있능교?"
"니도 내 나이로 묵어봐라. 그래야 내 심정이 우떤지로 알끼거마는. 어휴! 나이는 자꾸 묵어가고, 매달 버는 것은 쓰기에도 바쁘고…."

그래. 나는 지금도 프레스실에서 근무하던 김씨 아저씨의 한숨소리를 잊을 수가 없다. 당시 나이 사십이었던 김씨 아저씨는 프레스공이었다. 프레스실에 오래 근무한 노동자들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5여 년을 넘게 프레스실에서 일을 해 온 김씨 아저씨도 몇 해 전 프레스기에 엄지손가락을 내주고 말았다.


사실, 땅이 꺼져라 내쉬는 김씨 아저씨의 한숨도 그때부터 부쩍 늘어나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김씨 아저씨는 내가 처음 공장에 입사하여 프레스실로 발령 받았을 때 내게 마치 큰 형님처럼 잘 대해 주시던 분이었다. 또한 그 당시만 하더라도 손가락 열 개가 멀쩡한 상태였었다.

아래의 글은 그 당시 내가 김씨 아저씨와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시면서 김씨 아저씨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일기장에 써놓았던 글이다. 물론 글의 일부는 이 글을 쓰면서 손질을 했다.

a 오늘의 노동운동의 뿌리는 김씨 같은 노동자들로부터 비롯되었다

오늘의 노동운동의 뿌리는 김씨 같은 노동자들로부터 비롯되었다 ⓒ 이종찬


새벽 4시 반.
이번 주는 1부제 근무인 김씨는 부스스 눈을 뜬다. 아직 어둠이 걷히지 않은 방문을 열자 이내 쌀쌀한 바람이 방안으로 훅 불어온다. 춥다. 후유! 또 이 해도 그냥 넘기는가 보다.

이제 곧 41세에 접어드는 김씨 아저씨는 아이들의 자는 모습을 바라보면 자꾸만 초조하고 안쓰럽다. 더욱이 아이를 부둥켜안고 깊은 잠에 골아 떨어진 아내의 꺼칠한 얼굴을 바라보면 자신이 무능력자란 생각이 자꾸만 든다.

아내는 어제도 잔업을 마치고 밤 열 시가 휠씬 지난 뒤에서야 집에 들어온 모양이었다. 그리고 잔업을 마친 뒤 화풀이용 소주 한 잔을 걸치고 돌아올 남편을 위해 밥상을 차려 놓은 채 그대로 잠이 든 모양이었다. 오늘따라 아내의 얼굴이 더욱 늙어 보인다.

김씨는 자꾸만 한숨이 나왔다. 요즈음은 아니 정확히 말해서 올해 나이 사십이 되는 해부터 생겨난 한숨은 날이 갈수록 인생의 절망감을 느끼게 하는 그런 한숨이었다. 어서 아내의 직장도 그만두게 하고, 내 집이라도 한 칸 마련해야 한다는 가장으로서의 속내 깊은 한숨이다.

엊저녁 아내가 마련해 둔 아침밥을 어설프게 먹고 난 김씨는 저만치 아직도 공장 불빛이 새어나오는 어두운 거리를 열심히 걸었다. 헐렁한 작업복 사이로 찬바람이 들어와 이내 온몸이 으시시 떨리기 시작한다.

큰 아이 영철이는 내년이면 중학생이 되고, 작은 아이 수철이는 5학년이 된다. 그래. 그래도 아들 복은 있는 모양이다. 하긴 아들만 둘 낳았으니 무슨 걱정이 있으랴. 욕심 같아서는 귀여운 딸을 하나 더 두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어디 그게 뜻대로 되는 일이겠는가.

또한 나라에서 권장하는 인구정책에 호응하여 그만두기로 했다. 아니, 어쩌면 김씨는 그렇지 않아도 힘겨운 가족들의 밥 숟가락을 하나라도 더 줄여보려고 나라의 인구정책을 자꾸만 들먹거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몸부림.

그래서 그런지 김씨는 두 아들의 커 가는 모습을 볼 때마다 아이들에게 큰 죄를 짓고 사는 것만 같다. 그동안 엄마, 아빠의 사랑을 한번도 받지 못한 아이들을 위해서는 당장이라도 아내의 직장을 그만두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형편이 그렇지 못하다. 그 때문에 어떤 때는 길 가는 사람을 붙잡고 하소연이라도 하고 싶기도 하다.

김씨는 창원을 우울하고 삭막한 도시임에 틀림없다고 단정한다. 하지만 그래도 자신의 직장이 창원에 있고, 자신의 가족이 살아가고 있는 곳도 창원이다. 그래서 김씨는 창원을 제2의 고향으로 삼고 오늘도 새벽길을 재촉하고 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가슴 아픈 일이 하나 둘 아니었다. 특히 나이 서른 여덟 해 겨울에 일어난 사건은 평생을 두고 결코 잊을 수가 없는 일이다. 그해 12월 마지막 날 오전, 김씨는 그만 프레스기에 엄지손가락 한 마디를 내주고 말았다.

하지만 당시의 김씨는 그것이 창원공단의 단단한 근로자가 되는 관문이라고 여기며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회사에서 나오는 얼마간의 위로금마저도 반납했다. 제발 쫓아내지만 말아달라며.

그 당시, 자신의 그런 손을 바라보던 아내의 그 황망한 눈빛. 김씨는 아직도 그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 그런데 그때 문득 지난 밤에 본 아들의 일기가 떠올랐다. 그동안 아이들에게는 숨겨 온 그 사실을, 잠든 아이의 곁에 놓인 일기장 속에서 무심코 보고 말았던 것이다.

"아빠는 요사이 엄지 손가락이 하나 없어졌다. '아빠! 왜 손가락이 없어요' 하고 물어 보려다 아빠가 꾸중하실까 무서워 그만두었다. 엄마는 아빠가 손가락 없다는 것을 아는 지 모르는 지 아무 말도 없으시다. 나는 내 친구들에게도 아빠가 손가락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숨긴다. 내가 이야기하면 아이들이 날 놀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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