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가 이렇게 작았었나?

영화 속의 노년(65) : 〈사토라레〉

등록 2003.11.24 01:12수정 2003.11.24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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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란 것이 대체 내게 무엇일까 생각해 볼 때가 있다. 라디오 방송 아나운서로 7년 동안 일하면서 말 그대로 말로 밥을 벌었고, 그 이후에 노인복지관에서 어르신들과 지내면서도 내게는 늘 말로 무엇인가를 풀어나가고 진행하는 일들이 주어졌다. 요즘은 노인대학과 여성 사회교육 프로그램에서 강의를 하는 것이 주된 일이니, 이 역시 말로 하는 일이다.

그래서 한 때는 말을 하지 않고도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헤매기도 했다. 글자를 시각장애인이 읽을 수 있는 점자로 번역하는 것을 배우기도 했고, 가만 앉아서 듣기만 해도 되는 이런 저런 강좌를 기웃거리기도 했다. 영화 보기와 책 읽기를 좋아한 것도 어쩌면 말이 필요 없어서였는지도 모른다.


영화〈사토라레〉의 주인공 사토미 켄이치는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모든 것이 다른 사람에게 고스란히 다 들리는 '사토라레'다. 점심을 먹으면서 '맛이 없네'하면 주방장은 물론 식당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들리고, 짝사랑하고 있는 여자를 보면서 '어, 오늘은 미니 스커트를 입었네'하면 미니 스커트를 입은 당사자는 물론 온 동네방네에 그 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자신의 생각이 다른 사람들 모두에게 실시간으로 중계 방송된다는 사실을 본인만 모른다는 것이다. '사토라레'란 일본 민화에 나오는 사람의 마음을 읽는 도깨비 '사토리'에서 유래한 것으로, '마음을 들키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만든 말이라고 한다.

'사토라레'는 의지전파과잉증후군이라고 하는데, 생각하는 모든 것이 어떤 파장으로 바뀌어 반경 10m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모두 전달되는 현상이다. 사토라레가 지금까지 모두 일곱 명 출현했는데, 예외 없이 모두 IQ 180 이상의 천재로 국가 차원의 보호 관리 대상이다. 켄이치는 일곱 번째 사토라레로 외과 의사다. 상상력도 이 정도면 정말 혀를 내두를 지경이다.

정부는 사토라레를 보호하기 위해 인구 3만 명 이하의 도시 중에서 희망하는 도시에 사토라레를 배정하고, 배정받은 도시의 모든 구성원들은 사토라레의 생각을 들어도 못 들은 척 하며 사는 대신 세금 감면 의 혜택을 받는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켄이치의 생각이 이웃들의 잠을 방해하기 일쑤지만, 주민들은 살기 좋아진 자신들의 처지를 생각하며 들려오는 그 모든 소리를 감수한다.

켄이치를 신약 개발 연구소로 보내려는 정부의 프로젝트에 감찰관으로 참여하게 된 요코. 켄이치가 사토라레라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게 하느라 주변 사람들이 벌이는 소동 속으로 들어간 요코는, 켄이치의 속생각을 귀로 들으면서 처음에는 몹시 당황하지만 점차 켄이치의 순수함과 착한 마음을 알게 된다.


영화는 자신의 본 모습을 알게 된 첫째 사토라레가 겪는 고통과 고독을 한켠에 집어넣은 채, 켄이치 할머니의 발병과 수술을 엮어가면서 웃음 짓게 만든다. 거기에 더해 켄이치의 할머니 사랑에 눈물짓게 만든다.

세 살 때 비행기 사고로 부모를 잃고 그 비행기 안에서 혼자 살아 남은 켄이치 옆을 지금까지 지켜준 할머니. 아무 때나 사람들 귀에 들리는 켄이치의 생각 때문에 주민들이 불편하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아는 할머니는 주민들을 위한 자원봉사, 무용강습으로 그 미안함을 조금이라도 갚으려 애쓴다.


그러면서도 할머니는 한 집에 같이 살면서 누구보다 더 힘드실 거라는 요코의 위로 섞인 말에는 단호하게 아니라고 답하신다. '우리 켄이치는 단지 솔직하고 목소리가 큰 것일 뿐'이라고 덧붙이신다.

밤늦게 공부하는 켄이치에게 우동을 끓여다 주시는 할머니. 실수로 우동을 쏟자 당황하며 바닥을 닦으시는 쪼그려 앉은 할머니를 보며 켄이치는 무심코 생각한다. '할머니가 이렇게 작았었나?' 그 생각은 곧바로 소리가 돼서 할머니 귀에 그리고 가슴에 파고 든다.

어릴 적 아픈 켄이치를 업고 내달리던 할머니께 미처 감사하다는 말을 못해, 다른 사람을 돕는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다는 켄이치. 그러나 그는 타고난 사토라레의 운명으로 인해 의사 가운을 벗고 연구소로 가야만 한다.

우여곡절 끝에 요코의 도움으로 할머니의 수술을 맡게 된 켄이치. 할머니 수술을 직접 해나가는 켄이치의 간절한 마음과 생각은 크게 울려 퍼지며 모든 사람의 귀에 파고든다. 자신을 업고 안고 길러준 할머니를 향한 켄이치의 애틋함은, 힘든 운명을 타고난 손자를 지켜줘야 했던 할머니의 아픔으로까지 연결되며 귀기울이고 있는 모든 사람을 울린다.

이제는 켄이치가 할머니를 등에 업었다. 할머니가 켄이치를 업고 달리던 바로 그 길에서, 활짝 핀 벚꽃이 눈처럼 날리는 것을 보시며 할머니는 등에 업힌 채 눈을 살포시 내려 감는다. 편안한 얼굴은 그것이 잠이 아니라 죽음이라한들 하나도 두려울 것 같지 않았다.

홀로 남은 어린 켄이치에게 할머니는 참으로 큰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청년이 되어 문득 돌아본 할머니는 정말 한줌밖에 안 되는 작은 몸으로 병을 앓고 계셨다. '왜 늦기 전에 몰랐을까' 켄이치의 회한과 눈물은 그대로 내 것이 되어 가슴을 촉촉하게 만들어 놓는다.

정말 말로 일을 다하고 말을 앞세우며 사는 세상이어서 이런 영화가 나왔나보다. 우리가 그냥 생각하는 대로만 말하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살 수만 있다면 우리 사는 세상이 얼마나 달라질까.

켄이치의 솔직하고 깨끗한, 있는 그대로의 생각을 늘 들으며 사는 그 도시 사람들은 말에 대해서 좀 깨달았으려나. 상대방의 속내를 알 수 없어 늘 머리를 굴리고, 또 내 속생각을 들키지 않으려고 갖은 포장을 다하며 사는 우리들. 말이 나를 가두는 감옥이 되는 것을 알면서도 말의 엉킨 타래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은 끝간데를 모르는 욕심과 어리석음 탓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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