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꽃처럼 일어나라'고 이사 때 사가던 성냥

'인천 성냥공장 아가씨'의 애환과 근대산업을 일으킨 성냥과 라이터

등록 2003.12.04 16:05수정 2003.12.06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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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성냥 본 지 오래되었지요?
이런 성냥 본 지 오래되었지요?김규환
이사 때 성냥을 사갔던 6, 70년대


이사 때마다 쌀 한 됫박에 불처럼 일어나라고 성냥을 선물하던 시절이 있었다. 이사 때 받은 성냥을 벽장 속에 가득 쌓아 놓으면 한동안 성냥 살 일은 없었다. 집주인은 닭 몇 마리를 잡아 푹 고아서는 쫙쫙 찢어 죽에 올려 보답을 했던 아름다운 시절. 그게 우리네 부모님들의 마음이었다. 세상에 이렇게 풍족한 마음이 어디 있을까?

요즘이야 집들이를 하면 화장지나 세제 또는 주방 용품을 사가는 경우가 많은데 성냥을 선물한다? 그랬다. 아궁이에 불을 지피려면 '비사표 화랑통성냥'이라던 사각 성냥을 솥 단지 한 편에 고이 모셔 놓아야 했다.

더러 김이 넘치면 축축해져 성냥 골이 흐물흐물 해지니 불을 지피는데 얼마나 애를 먹었던가. 그러니 '부엌데기' 주부는 불씨를 살리는 심정으로 보관에 정성을 기울인다. 솥뚜껑이 잘 못 열려 김이 성냥 쪽으로 나오면 성냥 집과 성냥 골을 못쓰게 만들었다.

우린 그 소중한 집안의 살림을 축내는 데 한 몫을 했다. 개구리, 메뚜기 잡아 구워 먹을 때 그리고 냇가에서 얼음을 지칠 때도 몰래 성냥 집을 뜯어서 성냥 열댓 개를 호주머니에 담아서 갔다. 뿐인가. 밀과 보리 꼬실라 먹을 때도 어김없이 들고 나갔으니 성냥통마다 온전할 리가 없었다.

불처럼 일어날 산업이 무엇인가?
불처럼 일어날 산업이 무엇인가?김규환
아버지 라이터돌을 갈던 아들


아버지는 담뱃불을 어느 때부터인지 '지포 라이터'를 써서 붙이기 시작했다. 한 때 소주병만큼 작고 노란 빗금이 그어진 통에 든 휘발유를 주입하는 일은 내가 했고 '눈이 침침하다'하시던 아버지 대신 파다닥 불꽃을 일으켜 점화를 돕던 라이터돌을 끼워 넣기도 했다.

라이터 뒤꽁무니를 열고 솜에 갖다대고 휘발유를 병아리 눈물만큼 조금씩 넣다가 흘리면 뭔지 모를 흥분에 휩싸이기도 했다. 세상에서 태어나 첫 대면하는 새로운 향기. 가슴을 후벼파는 싸한 냄새에 중독되어 살았던 그 시절의 내가 그립다.


손을 닦지도 않고 엄지손가락으로 문을 열어 젖히고 볼을 굴려 파란 불꽃이 나오는지를 확인하고 발간 불꽃이 나오면 심지를 조절하여 다시 켜보고 나서 아버지께 건넸던 라이터. 휘발유 라이터엔 아직도 잊지 못하는 아버지 냄새가 배어 있다.

그렇게 세월은 흘러갔고 지포 라이터마저 중국산 1회용 라이터에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허나 사각 또는 둥근 통에 가득 담긴 성냥 통은 다방과 당구장에 일부 남아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청계천 6가 평화시장 입구 계단 앞에선 아직 이런 물건을 팝니다.
청계천 6가 평화시장 입구 계단 앞에선 아직 이런 물건을 팝니다.김규환
당시 동네 꼬마 녀석들은 흥겨울 때 <인천의 성냥공장 아가씨>란 노래를 불렀다. 이 노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툭 튀어나와 초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즐겨 불렀다. 오십 줄을 넘긴 형님들이 군대가서 불렀다는 이 노래를 30대 후반인 내가 알고 있다며 핀잔을 들었던 적이 며칠 전의 일이다. 여성을 비하한 상스런 노랫말이 들어 있는 이 노래를 굳이 들춰낸 까닭이 있다.

인천은 성냥공장

한때 가발, 섬유산업과 함께 대한민국 근대 산업을 일으켰던 선구자 역할을 했던 성냥산업과 여기에 종사했던 여성 근로자의 애환이 서려 있기 때문이다.

1886년 인천에 첫 성냥공장이 생겨났고 1917년 10월에 자본금 50만원(圓)으로 국내 최대 규모의 조선인촌회사(朝鮮燐寸會社)가 문을 열었다. 동구 금창동 피카디리 극장 자리 2000여평터에 자리잡고 '우록표' '쌍원표' 제품을 생산한 이 회사는 한때 고용인원이 여자 300여명, 남자 100여명이 넘었다.

하루 평균 2만7천 타, 연간 생산 능력은 7만 상자로 국내 생산 능력이 당시 국내 성냥 소비량의 20%를 차지할 만큼 성업이었다. 요즘 포철이나 현대자동차를 산업 시찰하는 것처럼 서울이나 지방 학생들이 이 공장을 견학하는 것을 수학 여행의 코스로 삼았을 정도였다.

노래처럼 인천에는 성냥공장도 있었고 거기서 일하는 성냥공장 아가씨도 분명 있었다. 성냥 제조업은 인천의 산업을 일으킨 불씨였다. 개항 후 외국인들의 숫자가 점점 늘어나자 생활 필수품인 성냥 수요가 급증했다.

1920~1930년대 인천에 있는 성냥공장들의 생산력은 우리 나라 성냥의 70% 이상을 차지하기도 했고 일부는 중국에 수출하기도 했다. 이처럼 인천에서 성냥 산업이 발달한 것은 목재, 유황 같은 원자재 수입이 용이했을 뿐만 아니라 개항이 되면서 전국 각지 사람들이 모여들어 노동력이 풍부했기 때문이다. 또한 타 지역에 비해 전력 사정이 비교적 좋았다는 점도 작용했다.

그 당시 성냥제조업은 노동집약적인 산업이었다. 성냥개비에 인을 붙이거나 성냥을 곽에 넣는 작업은 일일이 사람 손에 의존했다. 성냥공장이 자리한 동네에는 재료를 받아 밀가루 풀칠을 해서 성냥갑을 만드는 가내수공업도 번창했다. 공터나 골목어귀에는 햇볕에 말리기 위해 널어놓은 성냥개비와 성냥갑이 지천이었다고 한다.

공장 주변의 500여 가구가 성냥갑을 만드는 일로 생계를 이어갈 정도로 한 때 금곡리는 '성냥촌'을 방불케 했다. 정미소에서 돌을 고르던 일밖에 없었던 때인지라 성냥 공장은 여성 고용 창출에 한몫 했으나 고용환경은 극도로 나빴다. <인천시사>에 따르면 여직공들은 1만 개의 성냥개비를 붙여야 60전을 손에 쥘 수 있었는데 하루 평균 노동시간은 13시간에 달할 정도였다.

화랑통성냥은 남성성냥공업주식회사에서 만듭니다.
화랑통성냥은 남성성냥공업주식회사에서 만듭니다.김규환
여직공들의 애환을 뒤로 하고 라이터 시대로

그 때가 벌써 최소 30년 이상이요 90여년 전의 일이다. 어찌 보면 50줄이 넘었거나 고인이 되었을 성냥공장 아가씨들은 인근 퀴퀴한 자취방으로 향하던 중 몸 속에 성냥을 몰래 숨겨와 고향에 가져가거나 싼값에 팔아서 생활을 근근히 유지했을지도 모른다.

해방 후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지포 라이터가 유행을 하면서 성냥 가치도 떨어져 조선인촌회사도 60년대에 문을 닫은 것으로 전해진다. 70년대 중반까지는 유엔표 팔각성냥, 기린표 통성냥, 비사표 갑성냥, 아리랑 성냥을 비롯해 300여 업체에서 생산하는 성냥의 불꽃이 사그라들 줄 몰랐지만 일회용 라이터가 생산되면서부터 성냥산업은 빠른 속도로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수십 년 동안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던 성냥은 결국 라이터에 그 자리를 물려줘야 했다. 중국산 가스 라이터 때문에 이젠 지포 라이터마저 구경하기 힘들게 되었고 성냥은 현재 단 한 곳에서만 생산하고 있다.

메이드 인 차이나 1회용 라이터
메이드 인 차이나 1회용 라이터김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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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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