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정모 연재소설 <수메리안> 15

등록 2003.12.11 10:41수정 2003.12.11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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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봉은 곧장 날아가지 않았다. 그 넓은 날개를 쫙 펴고 하늘 위를 빙빙 도는 것이었다. 몇 바퀴 그렇게 돌고 있을 때 어디서 날아왔는지 수많은 새들이 모여들어 그 뒤를 따랐다. 점점 더 많은 새들이 모여들었고 그 새들이 넓고 둥근 띠로 하늘을 가득 채울 때 봉은 마침내 멀리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그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그에게 화서를 펼쳐 보였다. 그 비단 천에는 봉이 그려져 있었다. 학과도 비슷한 그 새 날개엔 다섯 가지의 색깔까지 입혀져 있었으나 실제로 본 것에 비하면 그저 투박한 그림일 뿐이었다.


'오랫동안 그 신조가 나타나지 않아 나라에선 많은 걱정을 했단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그 봉황을 본 것이지.'
아버지가 그림을 바라보며 말했다. 여태도 그 목소리는 감격으로 떨리고 있었다.

'그럼 이 그림은 그때 보고 그린 것입니까?'
'그건 잘 모르겠다만 하여간에 우리의 국조인 소호께서 왕위에 올랐을 때, 그때 봉황이 와서 춤을 추었다는구나. 그 새는 상스러울 때 응감하는 신조로서 키가 6척이라더니 정말….'
'그때 신조는 어디에서 살았습니까?'
'단혈산에 있다고 했단다. 그런데 정말로 우리가 거기서 보았구나. 까마득히 잊고 있었는데 아직도 그 산에….'
'그 새는 무얼 먹고 삽니까?'
'그 봉은 물과 정기를 받아 생겨난단다. 오동나무가 아니면 머물러 살지 아니하고 대열매가 아니면 먹지 아니하고 솟아오르는 물이 아니면 마시지 아니하고 몸에는 오색 무늬가 있고….'
'…….'
'너도 보았지? 그 아롱진 깃털무늬….'
'울 땐 여러 가지 소리가 나더군요.'
'그래, 울면 다섯 가지 소리가 난단다.'

'예, 저도 그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래, 세상에 도가 있으면 나타난다고 했다. 또 날면 뭍 새가 뒤따르고….'
소년은 그때 많은 새들이 넓고 둥근 띠로 하늘을 가득 채우던 모습을 떠올렸다. 아버지가 뒤를 이었다.
'얘야, 이 세상엔 360종류의 새가 있단다. 그중에서도 봉황은 가장 큰 어른이며 또한 으뜸이란다.'

그때 손님이 큼큼 기침을 했다. 신조 이야기를 시작한 뒤부터 태왕도 청년도 잠을 자는 듯이 조용해졌고 그 시간이 너무 길다 싶어서 이렇듯 기침소리를 낸 것이었다.

"정말로 청년께서 그 신조를 보았단 말이오?"
사나이는 그 말을 의심해서라기보다 어서 그들을 일깨우고 싶어 그렇게 물어보았다. 대답을 한 사람은 태왕이었다.
"그 뒤엔 그 누구도 신조를 보았다는 보고가 없다오."


태왕은 다시 그때의 기억으로 되돌아갔다. 처음 그 소식을 접했을 때 태왕은 몹시도 놀라고 또 당황을 했다. 그 신조를 본 것이 자기 아들이 아닌 아우의 장자라는 것 때문이었다.
자신의 태자 역시 뛰어난 인물이라는 것을 만인이 다 인정하는 바였다. 환웅천왕의 법치인 천부경, 신고, 전계에 대한 학식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특히 소호 국조왕의 병법에도 조예가 깊었다.

소호 국조왕은 본래 소머리 강 유역에 터를 잡았던 한 동이족 국가의 장수로 그의 이름은 소호 김천씨였다. 그가 황하 유역(대문구 문명지. 여기서 BC 3000년대의 동이족 유품이 출토되었고 거기에는 소호국명까지 명시되어 있었다)을 평정해 따로 나라를 세우면서 소호국의 시조가 된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때부터 태왕까지 10대가 흘러오도록 늘 직계 장자가 그 뒤를 이어왔는데 이번엔 아우의 장자가 먼저 신조를 본 것이었다. 국조 소호가 등극했을 때 신조가 와서 춤을 추었다는 그 봉, 그래서 이 나라의 도등조차 봉황이 된 그 신조를 에인이 본 것이었다. 그것은 예사 일이 아니었고 부인할 수도 없었다.

태왕은 고민에 빠져 있다가 문득 역법사(동이에는 대대로 역을 전람하는 세족이 있었다)를 떠올렸다.
'그래, 우선은 에인의 괘부터 알아보자. 아무리 신기를 가져도 운에 없으면 천자는 될 수 없는 법….'
태왕은 역법사에게 태자와 에인의 괘를 뽑아오게 했다. 둘 중에 누가 더 천자의 운이 강한지 비교해본 뒤 결정을 내릴 생각이었다.

무릇 예부터 선조들은 말해왔다. 천자는 하늘로부터 점지된다, 그 복락의 길고 짧음은 자기 마음에 달려 있다, 운명을 잘 운영하는 자는 길이 칭송되지만 사리사욕을 자기 운명이라 만용을 부리는 자는 그 패해가 자기뿐만 아니라 백성에게까지 대대로 이어진다.

'그래, 자기 운명을 알고 받아들이는 것 또한 현자가 할 일이다. 애초부터 소호의 기풍은 평화와 안정이 아니더냐. 전 백성이 심신을 수양하고 도를 닦는, 도의 백성화가 아니더냐….'

태왕이 그렇게 자기 자신을 평정했을 때 역법사가 두 아이의 괘를 뽑아왔다.
'자고로 팔괘는 신영의 덕과 만물의 점에 통달하는 것이며 천지와 그 운행의 법칙을 밝히게 하옵니다. 왕족은 신과 만물, 해와 달과 땅의 기운과도 연결되어 있음으로 이번 원리도 그 수리로 풀어왔습니다.'

그리고 역법사는 괘도를 펼쳐보였다. 태자에게도 천자의 운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에인의 것이 월등 강했다. 거기에는 전혀 끊어지지 않은 건괘(세개의 긴)가 들어 있었고 그것은 곧 하늘이라는 뜻이기도 하며 천자로 점지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더 미루어 생각할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신의 뜻이자 조상의 뜻이었다. 이제 자신에게는 그 뜻을 아름답게 받아들이는 일만이 남아 있었다. 태왕은 흔쾌히 결정을 내렸다.
'차기 왕권은 에인에게 간다!'
따지고 보면 에인도 왕손이 아니던가. 그 애한테 신조가 보인 것은 왕권을 그리로 돌리라는 징표인 것이다. 그것이 그 아이의 운명이며, 또한 더 번창해야할 이 나라의 국운이기도 하다.

그때부터 태왕은 에인의 교육에 최선을 다했다. 고명한 스승을 멀리서 모셔온 것도 그 때문이었다. 교화자는 에인을 잘 가르쳐서 내년 국중 대회 때 조의선인으로 선발할 것이다. 그러면 에인은 교화지도자가 되어 세상을 돌아볼 것이고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면 태왕은 곧 세자책봉을 선포할 참이었다.

"소인 이만 물러가도 되는지요."
태왕이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청년이 여쭤왔다. 태왕은 정신을 차리고 사나이를 바라보았다.
"자, 제후, 이제 흡족하시오?"
그때 다시 청년이 되물어왔다.
"마마, 어떤 일로 저를 택하려 하시는지 제가 좀 알면 아니 되옵니까?"

"그래, 너도 마땅히 알아야겠지. 이 사람은 '딛을 문'제후란다. 그곳은 백년도 훨씬 전에 우리 선조가 내려가서 일구어온 땅덩이였다. 거기는 물산도 풍부하고 살기도 아주 좋았단다. 그런데 그만 이웃 종족들에게 그 땅을 빼앗기고 말았다는구나. 그래서 이제는 네가 이 사람과 함께 가서 그 땅을 되찾아 백성들에게 돌려주어야 한단다."

"마마, 저는 그런 일은 잘 알지도 못합니다."
"왜, 가기 싫으냐?"
"마마. 저는 아직 조의선인도 통과하지 못한 처지이옵니다."
"네 학식은 이미 거기에 도달해 있지 않더냐?"
"하오나 마마…."

청년의 얼굴에 거절의사가 역력하자 이번엔 제후가 당황했다. 태왕의 명령을 거절할 정도의 담력이라면 보통 인물이 아니라는 생각이 새삼스레 깨달아지기도 했다. 더욱이 이 소호국 천자는 환족 10개의 형제 국에서 모두가 인정해주는 어질고 현명한 왕이었다. 그런데 그가 추천하는 인물을 의심하고 타박했으니 그만 일이 버성길 모양이다. 제후는 얼른 사과를 했다.

"청년선인, 인물을 몰라본 나를 용서하시오. 사실 우린 상당히 다급한 상황에 처해 있소이다. 2백 년 가까이 갈고 닦은 땅덩이를 전부 빼앗겼고, 동포들은 지금 사막에서 짐승들처럼 움막 생활을 하고 있소이다. 그나마 비적들까지 깔보고 밤마다 치고 와서 이제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는 지경이오. 만약 어서 빨리 땅을 찾지 못한다면 남은 백성이 다 죽고 말 것이오."

"......"
"그래서 내 급하게 무술 운운했던 것이오만... 듣고 본즉 에인 청년이 적임자 같소이다. 도와주시오. 부디…."
"마마, 생각할 시간을 주십시오."
청년이 태왕을 바라보며 말했다. 태왕은 잠깐 침묵을 지키다가 되물었다.

"언제까지 말이냐?"
"국중 대회는 지내야 할 듯하옵니다."
"국중 대회라면 아직도 멀었지 않느냐? 에인아, 시간이 없단다. 그 사이 우리 동이족이 낯선 땅에서 다 죽을지도 모르고…."
"마마, 그렇다면 다른 인물들을 뽑아주십시오. 우리 소호국엔 저보다도 더 출중한 선인들이 많고도 많사옵니다."
"그건 나도 알고 있다만…. 에인아, 이번만은 이 큰아버지 말을 그냥 따라주지 않겠느냐?"

태왕이 나직이 타일렀다. 그 말을 듣고 사나이는 더욱 놀랐다. 이 청년의 아버지가 그럼 왕의 동생이었단 말인가? 직책이 잠사라기에 그냥 보통 중신인줄 알았는데…. 하긴 환웅 6세 왕도 열두 아들 중 그 계자(季子)에게 우사(雨師)직을 세습케 했다지 않던가. 그 계자 태호 복희는 또한 신용을 보고 괘를 얻었고…. 오, 그래서 이 청년도 신용을 찾고 있었던가?

사나이는 슬며시 일어나 청년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애원했다.
"내 이렇게 절을 올리오. 부디 도와주시오."
청년은 얼른 맞절을 받긴 했으나 대답은 하지 않았다. 그때 태왕이 다시 말했다.
"네 생각이 정 그렇다면 다른 방도를 생각해볼밖에 없구나. 알았다. 이만 물러가거라."
청년은 절을 올리고 그 자리에서 물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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