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자무협소설> 전사의 후예 262

진보, 개혁, 보수, 수구 (10)

등록 2003.12.15 12:27수정 2003.12.15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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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자신이 선무곡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저주하고 있었다.

만일 무림천자성에서 태어났다면 선무곡 사람들과 같이 비열하고, 비겁한 데다가 외세 의존도도 높고, 주체성이라는 눈을 씻고 찾아보려 해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저능한 놈들을 상대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기라 말했던 것이다.


그래서 자신을 낳아준 부모가 원망스럽다고 한탄하였다.

만일 죽은 조상들을 묻은 무덤을 파헤쳐 부관참시(剖棺斬屍: 무덤을 파고 관을 꺼내어 시체를 베거나 목을 잘라 거리에 내거는 형벌. 죽은 뒤 죄가 드러나 극형을 추시(追施)하던 일로 연산군 때 김종직(金宗直), 송흠(宋欽), 한명회(韓明澮), 정여창(鄭汝昌), 남효온(南孝溫), 성현(成俔) 등이 당했다.) 하는 것이 무림천자성 사람이 되기 위한 전제 조건이라면 기꺼이 그렇게 하겠다고 하였다.

이 소리를 들었을 때 이회옥은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죽여버리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어찌 인두겁을 쓰고 그런 소리를 하는가 싶었던 것이다. 하여 그런 감정을 억누르기 위하여 얼마나 애썼는지 모른다.

그러는 사이에도 조잡재는 더러운 아가리를 놀리고 있었다. 물론 선무곡 사람들을 폄하(貶下: 깎아 내림)하는 험담이었다.


결론은 자신만 똑똑하고 남들은 죄다 멍청하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왜 무림천자성이 선무곡을 직접 다스리지 않는지 불만스럽다는 이야기였다. 한 마디로 선무곡을 무림천자성의 아가리에 처넣지 못해 안달이 난 놈 같았다.

제세활빈단주인 이회옥의 입장에서 들어보면 밥맛 없는 소리의 연속이었다. 그러니 어찌 입맛이 떨어지지 않았겠는가?


그때 철마당 수뇌들이 곁에 없었다면 조잡재는 이승을 떠났을 것이고, 그의 시신은 영영 찾지 못하게 되었을 것이다.

천참만륙(千斬萬戮)되어 설사 낳아준 부모가 온다 한들 형체를 알아볼 수도 없게 되었을 것이기도 하지만, 너무도 깊고 깊어 요해변산(尿海便山)이라 불리는 해우소(解憂所) 깊숙한 곳에 빠져 썩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날 밤, 이회옥은 한 가지 결심한 바가 있었다.

호생지덕(好生之德)을 베풀어야 할 때도 있겠지만 간혹 참초제근(斬草除根)이 더 낫다고 판단되면 주저 없이 그렇게 하겠다는 것이었다. 살려둬 봤자 백해무익(百害無益)하다면 없애는 편이 세상을 더 이롭게 하는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참초제근은 <춘추좌씨전> 은공(隱公)편에 나오는 말이다. 춘추전국시대 때, 위(衛) 나라는 진(陳) 나라와 연합하여 정(鄭) 나라를 공격하려 하였다.

이에 정 나라 장공(莊公)은 진 나라의 환공(桓公)에게 강화(講和)를 청하였으나, 환공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이때 아우 진오부(陳五父)가 강화를 권하며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고, 이웃 나라와 우호적으로 지내는 것은 고귀한 일이며 잃어버려서는 안 될 일입니다. 그러니 정 나라와 강화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 말을 들은 진 환공은 크게 화를 냈다.

"송(宋) 나라와 위 나라는 강대국이므로 그들이 우리를 어렵게 할까봐 두렵지만, 정 나라는 우리보다 작은 나라이므로 그를 공격한다 해도 그들이 우리를 당해낼 수 있을 것 같은가?"

환공의 이러한 태도에 대하여 어떤 이가 이렇게 비평하였다.

"악한 일은 커지게 해서는 안 된다라고 한 말은 환공을 두고 한 말이 아니겠는가? 악이 커짐에도 바르게 고치지 않으면, 화가 자신에게 미치게 된다(長惡不悛 從自及也). 그런 후에 내 몸을 구해 내려고 한들 구할 수가 있겠는가?"

진 환공은 곧 정 나라를 공격하였으나 쉽게 정벌할 수 없었다.

이 년 후, 국력이 강해진 정 나라가 거꾸로 진 나라를 공격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때 이웃 나라들은 진 나라가 형편 없이 당하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이를 두고 진 나라가 자초한 일이라고 했다. 그때 주(周) 나라의 주임(周任)이라는 대부(大夫)는 이렇게 말했다.

"무릇 나라의 군주된 자는 나쁜 일에 대해서는 농부들이 잡초를 뽑아버리듯 그것이 다시 자라지 못하게 뿌리째 뽑아버려야 한다(農夫之務去草焉). 잡초를 모조리 뽑고 그 뿌리를 없애면(絶其根本) 심어서 좋은 것은 잘 자라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회옥은 스스로 군주라는 상념을 품은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갖 패악(悖惡)을 떨고 있는 수구 세력들의 행각을 듣고 있자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참초제근하리라는 결심을 한 것이다. 굳이 제세활빈단의 단주가 아니었어도 스스로 떨쳐 일어나 세상을 어지럽게 하는 꼴통들을 섬멸하는 데 앞장서야 마땅하다 생각한 것이다.

금대준은 대화를 할 때마다 자신의 말 한 마디면 선무곡 보수 세력들을 얼마든지 움직일 수 있다면서 자랑하곤 하였다.

그러면서 덧붙이길 그만한 능력을 지닌 사람은 방조선 등 삼의를 비롯하여 조잡재와 자신 뿐이라 하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이회옥은 수구세력의 교언영색(巧言令色) 때문에 순박하다면 순박한 선무곡의 건전한 보수세력들이 부화뇌동(附和雷同)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다시 말해 현재 선무곡에서는 대다수 건전 보수가 극소수 수구들의 속임수에 놀아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는 이유는 그들이 차지하고 있는 기득권을 놓치지 않기 위함일 것이다.

"악인록을 본 지 오래 돼서 그러는데 혹시 그 안엔 무당 백잔성(挀殘猩)과 퇴역 제자 서성감(鼠腥疳), 그리고 소리꾼 신혜서(顖鼷鼠)의 성명도 있소?"

"글쎄요..? 소녀도 본 지가 오래… 헌데 그 사람들은 왜…?”

"없으면 넣으시오. 그리고 반드시 그들의 목을 베시오. 그들 역시 개과천선하기 애당초 틀려먹은 인물들이니 기회를 주고 어쩌고 할 필요조차 없소. 그러니 가급적 빠른 시간 내에 베어 버리도록 하시오. 아시겠소?"

"예? 아, 예. 그런데 그들을 왜 특별히…?"

"백잔성은 무당(巫堂)인척하면서 혹세무민(惑世誣民)하고 있고, 신혜서는 소리꾼인 척하면서 사람들을 선동하고 있소. 또한 서성감이라는 놈 역시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있소."

"저어, 그건 죽을죄는 아닌 듯 싶은데, 왜죠?"

홍여진의 물음에 이회옥은 안색을 굳히며 입을 열었다.

"무림천자성에서 심어놓은 간세들이기 때문이오."

"예에…?"

홍여진은 최근 들어 부쩍 목소리를 돋구던 백잔성과 신혜서, 그리고 서성감이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곡도의 한 사람으로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것이야 어쩔 수 없다 생각하였기에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있었다. 그렇지만 무림천자성의 간세라면 사정이 달라도 한참 달라진다.

배루난과 마구위에 의하여 어린 소녀 둘이 마차에 치어 죽은 이후 선무곡의 열혈청년들은 이구동성으로 분타지위 협정서를 수정해 줄 것을 요구했었다.

물론 그 청년들 속에는 제세활빈단원 전원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일흔서생이 신임곡주가 된 이후 당연히 협정서 수정이 이루어질 것으로 믿고 기다렸다.

하지만 현재까지 고쳐진 것은 전혀 없는 실정이다.

북선무곡, 즉 주석교와 대치하고 있는 상황과 힘의 논리 때문에 신임곡주가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것은 아닐 것이라 생각한 제세활빈단원들은 은밀한 내사를 시작한 바 있었다.

그 결과 일흔 서생이 제 뜻을 펼치지 못하도록 강력한 압박을 가하는 무리들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들의 공통점은 무림천자성과 직, 간접으로 관련이 있다는 것이었다.

사실을 확인한 대원들은 언제고 검을 뽑아들 그 날이 오면 절대 용서치 않을 집단으로 무림천자성이 심어 놓은 간세들을 꼽고 있었다. 곡을 배반하고 사리사욕을 추구한 그들은 시신조차 온전히 남기지 못하도록 천참만륙 하기로 결의한 바도 있었다.

"이곳에 있으면 많은 것을 알게 된다오."

"으으음! 알았어요. 악인록에 반드시 그들의 성명을 올리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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