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정모 연재소설 <수메리안> 24

등록 2003.12.30 09:12수정 2004.01.02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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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놈의 낙타 때문에 하루에 4백여 리도 못 가고 있었다. 그렇게 가다가는 보름이 지나도 사주(沙州)에 도착할 수 없을 것이었다. 삼위 산이 있는 사주까지는 5천리 길이었다. 군사들은 슬금슬금 짜증이 났고 그래서 제후에게 눈총을 주기도 했으나 제후는 모른 척 딴전을 피웠다.


"이려! 이려!"
한 짓궂은 젊은 군사가 낙타 뒤에 바짝 붙어 서서 그렇게 소몰이 장단을 넣었다. 그놈은 하도 느려 소와 같다는 뜻이었다. 그래도 낙타는 꿈쩍 않고 뚜벅뚜벅 걷기만 했고 그 위에 올라 탄 제후 역시 이제는 아예 눈까지 감고 있었다.

에인은 전에 제후가 하던 말, 사막에서는 말보다 낙타가 월등 낫다던 것을 떠올리고 군사에게 한마디 했다.
"언젠가는 그놈이 그대 말보다는 나을 때가 올 것이네."
제후는 그 말에 기분이 풀린 듯 가만히 눈을 떴고 젊은 군사는 단념하고 에인 뒷자리로 와서 섰다. 말도 보조를 맞추어 터벅터벅 걸었다.

끝없는 들길이었다. 바람마저 없어 사방에 들리는 것은 마차바퀴 소리뿐이었다. 에인은 먼 평원을 바라보면서도 한손으로는 지휘봉을 꼭 쥐었다. 황소 뿔의 느낌이 또 그에게 무언가를 전달했다. 그것은 비장감이었다.

그 지휘봉을 받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때 그의 마음 바다가 급하게 해일을 일으키면서 무언가를 깨부수었다. 깨어져나간 것은 그의 평온이었다. 자신이 태왕에게 자랑했던 그것, 너무 잔잔해서 바람도 돌도 침투되지 않을 것이라던 그 평온이 그렇게 깨어져나간 것이었다.

그리고 찾아온 것이 비장감이었다. 그 비장감조차도 별안간 불쑥불쑥 솟아오르는 암벽과도 같았다. 그 모든 마음의 변화는 지휘봉을 받는 그 짧은 순간에 다 일어난 것이었고 그가 그 이유를 깨달은 것은 말에 오를 때쯤이었다. 그러니까 그 변화들은 지휘봉이 그에게 내리는 특별한 교시였던 것이었다.


문득 스승의 말이 떠올랐다.
'소머리 강은 원래 속말리라고 불리었다. 속말리는 성수(聖水)라는 뜻이다. 그리고 우리의 수호 짐승은 황소였다. 그러니까 소머리는 황소의 머리라는 뜻도 있다. 황소의 머리는 성스러움을 지킨다는 뜻이 있고, 때론 그 둘이 하나의 의미를 가지기도 한다.'

그러니까 자신이 받은 지휘봉은 성스러움만이 아닌 그 성스러움을 잘 지켜야 한다는 의미였다. 에인은 다시 스승과의 마지막 문답을 떠올렸다.
'너는 곧 먼 길을 떠난다. 그런 사람이 반드시 되새겨야할 항목이 있는데 그것부터 묻겠다. 먼저 환족의 시원부터 간략하게 이야기하라.'


'환인천왕께서 천산에서 하강하셔서 그 산 아래에 신시(神市)를 이루고 환족의 홍익인간 세상을 펼치셨습니다.'
'그래, 천산에서 흰머리 산(히말라야), 파령(파미르고원)까지 그 영역이었다. 그럼 환인천왕과 환웅은 몇 대까지 치세를 펼치셨느냐?'
'환인천왕은 7대, 환웅천왕은 18대였으며 그 신시 역연만 3808년간이었습니다.'

'그래, 환족이 동으로 뻗어온 것은 환웅천왕 시대부터였다. 태호 복희 선조의 위대한 업적이 역법 외에 또 뭐가 있느냐?'
'그 소머리 강쪽에서 나라를 세우셨습니다.'
'그때가 언제냐?'
'천년 전이옵니다.'
'그분의 능이 지금 어디에 있느냐?'
'부산( 鳧山= 산동성 어대현 남쪽)에 있습니다.

'왜 우리가 역법을 쓰고 또 그분을 받들어 모시고 있느냐?'
'우리가 그분의 직계 후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 그 선조 때부터 삼수와 삼위에 걸쳐 환족이 가지를 뻗어갔다. 그 지역은
천해 서북에 자리잡은 비난(裨難), 양운, 구막간 등이 있고, 파내류 국은 천해, 천산과 흑수(흑해) 사이에 있다. 그 다음 동으로는 독로국, 일군국, 필나국, 객현한국, 구모액국, 직다구국, 사납아국, 통고사국 등, 중원, 황하, 소머리 강까지 골고루 뻗어 있다. 나라간의 거리는- 웅심국이 북개마령 북쪽에 있고 독로국에서 2백리 떨어져 있다. 독로국은 북개마령의 서쪽에 있다. 월청국은 그 북쪽 500리에 있다. 직다구국은 오란하(五難河)에 있다. 직구다구국엔 무엇이 많이 난다고 했느냐?'

'쑥과 마늘이옵니다.'
'그래, 이 같은 아인 국이 뻗어있는 지역이 동서 몇 리라고 했느냐?'
'2만여 리입니다.'
'그럼, 이렇게 많은 형제국들이 서로 철저히 지키는 것은 무엇이냐?'
'형제국끼리는 절대로 침략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형제국에 변란이 있으면 어떻게 하느냐?'
'아인 세력은 언제라도 서로 국가적 단결을 해야 합니다.'

'잘 대답했다. 너도 언젠가는 이 모든 형제국을 돌아볼 수 있을 것이다.'
'가는 도중에도 몇몇 형제국에 들려 거기서 숙식을 해결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나도 그렇게 들었다.'
'한데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형제국에도 같은 말을 쓰는지요?'
'백 년 전까지는 그러했다고 들었다. 하지만 이제는 저마다 다른 글, 다른 말을 사용해 멀리 떨어진 형제 국일수록 벌써 말이 통하지 않는다. 하지만 역법과 천부경은 거의 모든 형제 국에서 사용하고 있어 그것으로 풀면 대개는 말이 통하게 되어 있다.'
'잘 기억해두겠습니다.'

'어느 지역에서든 곤란한 일이 생기면 먼저 교화선생을 찾아라. 그들은 대개 여러 형제국의 말을 다 알고 있을 것이다.'
'예, 그러하겠습니다.'
'자, 그럼 마지막으로 묻겠다. 밤에 길을 잃으면 무엇부터 생각해야 하느냐?'
'천부경입니다.'
'천부경은 무엇이냐?'
'천체의 변화와 인간의 구조와 그 원리를 수리적으로 풀이한 천문철학의 기본 경전입니다.'
'그렇다. 밤에 길을 잃으면 먼저 별을 보아라. 그러면 네가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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