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바퀴 뱅글뱅글 돌던 마의 '묘치재'

4박 4일간 고행이었지만 아직도 난 고향의 눈이 그립다

등록 2003.12.30 13:32수정 2003.12.30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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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규환


고교 때만큼 방학(放學)이 기다려진 때는 없었다. 초등학교 때야 멋모르고 세상을 살았고 중학교 다닐 적엔 여학생들 보는 재미로 보냈다. 그러니 방학을 하면 더 재미없는 시절이 되어버리니 어서 방학이 끝나기만을 기다린 적도 있다.

그토록 손꼽아 기다린 고등학교 2학년 방학, 1985년 12월 23일이었다. 감옥과 같은 학교 기숙사를 벗어나 자유를 맘껏 누릴 수 있는 겨울 방학식을 마치고 고향집을 향해 떠났다. 조금 차를 기다렸다가 가면 늦어도 2시간이면 충분히 갈 길을 나는 학교가 있는 담양군 창평면에서 다시 광주공용터미널로 갔다.

광주에 가면 인문계로, 상고로 공고로 뿔뿔이 흩어진 친구들 몇 명은 만나 제과점에 들러 잡담을 나누다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간혹 보고 싶은 여학생을 먼발치에서나마 지켜보는 재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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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둡고 침침했던 대인동이 이렇습니다. ⓒ 김규환


어김 없이 난 광주로 향했다. 광주까지 1시간이 걸리니 어느덧 해는 뉘엿뉘엿 넘어가고 화려한 네온사인이 반짝반짝 불을 밝힌다. 표를 끊어 놓고 기다리니 초등학교에서 6년 동안 한 반으로 지냈던 친구 몇몇을 쉽게 만났다.

친구 중 한 명이 좋은 제과점이 있다며 같이 가자 한다. 흔쾌히 응했다. 이윽고 색시집의 대명사 대인동 어귀를 어슬렁거리며 지나는데, "아저씨!"하며 립스틱 짙게 바른 아가씨들이 손을 잡아끈다.

"우린 학생인디…."
"아따 학생은 뭣도 없어?"
"……"

난 더더욱 촌놈 같아서 그들 앞을 쉬 빠져나가지 못하고 몇 걸음 질질 끌려가다시피 했다. 그 때 친구가 한마디했다.

"아따매 워째 근다요? 우린 집에 갈 차비 빼고 돈도 없당께."

그제서야 돈이 없다는 걸 알고서 강제로 끌던 손을 힘없이 놓아줬다. 간신히 기나긴 그 소굴을 빠져 나와 금남로를 지나치고 충장로1가 쯤 있던 '궁전제과'에 들러 처음으로 '밀크쉐이크' 하나씩에 갓 구운 여러 가지 빵을 먹었다. 어찌나 달고 사르르 녹아 내리던지 그 보다 맛난 빵을 아직껏 먹어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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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쌓인 언덕배기 ⓒ 김규환


오래 머물 수 없어 몇 곳의 대형서점 위치만을 전해 듣고 부랴부랴 공용터미널로 돌아왔다. 마침 주말이라 화순 전역을 통과하다시피 먼 거리를 향해 떠나갈 버스 대기 홈으로 100명에 가까운 긴 줄이 늘어서 있다.

오랫만에 챙긴 온갖 빨래에 기본 공부는 해야겠기에 챙긴 책들로 짐 무게는 감당하기 힘들다. 버스에 올라타고 가까스로 자리를 잡아 짐을 올리고는 광주터미널을 떠난 막차 시각은 오후 7시 15분쯤이었다.

버스는 터미널을 느리게 빠져나가더니 전남대병원 앞을 지나 남광주의 관문인 학동에서 그만큼의 사람을 더 실었다. 그랬더니 발 디딜 틈도 없다. 속력을 내 달려 지원동을 빠져나가는 사이 눈발이 차창을 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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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집 가기는 참 힘겹습니다. ⓒ 김규환


고난의 고개 너릿재 터널만 넘어가면 바로 화순읍이다. 그런데 거의 멈추다시피 한 차량은 움직일 줄 모른다. '어어, 이러다가 큰일 나는데….' 속으로 마음의 동요가 일기 시작했다.

그래도 송광교통 완행버스는 학생이 타고 있으면 웬만한 일 가지고는 다시 광주로 돌아가는 법이 없는지라 '잘 되겠지'하며 운전수 아저씨에게 모든 걸 맡기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엉금엉금 기어 너릿재를 통과하는 데 2시간을 허비했다. 이윽고 화순읍내를 지나 잘 달리는가 싶더니 화순광업소(무연탄이 적지 않게 났던 전남 화순군 동면에 위치함)를 지나칠 때는 아직 아스콘 포장이라 360도까지 굴곡이 심한 가파른 길을 기어이 올라 채는 데 성공했다.

'푸우~' 긴 한숨을 내쉬는 사람 일색이다. 사평으로 가는 길은 포장길이었으나 구암리에서 좌회전을 하는 순간 비포장 도로가 나타난다. 그런데 차도 가끔 지나가니 눈이 하얗게 쌓여 있다. 여기까지 오른 데 3시간이나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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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허허벌판을 걷던 날 ⓒ 김규환


비포장 길이라지만 왕복 2차선은 너끈해 보이는 길을 20여 분 달렸다. 이제 오늘의 최대 고비가 기다리고 있다. '묘치재'다.

해발 200m도 안 되는 높이지만 하도 급경사여서 장대비가 쏟아지거나 눈이 조금만 와도 미끄러져 올라 설 수 없는 곳이었다. 늘 이 곳을 통과하지 못해 우리 마을에 버스가 들어오지 못하는 불상사를 일으켰던 마의 구간이다.

한약재로 유명한 옛 동복현청으로 향하는 길과 김삿갓 김병연이 전국을 유랑하다 말년을 지내고 조용히 죽음을 맞았던 절경이 이어지는 화순적벽(당시는 이서적벽. 이 일대를 다산 정양용도 아버지가 화순에 임지를 두었을 때 유랑하였다)과 물염적벽으로 가는 고개 위 삼거리다.

"부웅… 부웅…."
"부웅…."

앞으로 가지 못하고 그 많은 사람을 태운 버스는 힘없이 낭떠러지 쪽으로 미끄러지기를 반복한다. 대자연의 힘과 실랑이를 벌이던 버스는 끝내 그 자리를 오르지 못했다. 체인을 끼울 수도 없는 11시로 치닫고 있는 야심한 시각 운전수 아저씨는,

"승객 여러분, 안되겠습니다. 모두 내려서 차 좀 밀어 주싯쇼."

많지 않은 눈이었으나 오자마자 눌러 붙어 꽁꽁 얼어붙으니 하릴 없는 노릇이었다. 다들 내려서 맨손으로 차를 위쪽으로 올렸다. 시도를 거듭하다 30여 분 다시 차를 위로 올려 방향을 바꾸느라 20여 분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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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화순에서 내려다본 곡성군 일대. 저 길을 걸었습니다. ⓒ 김규환


'아! 정말 어쩌란 말인가? 날 좋은 날도 절반밖에 오지 않아 버스로도 아직 1시간 반을 더 가야 하는 이 먼길에서 어쩌란 말인가? 짐이라도 없으면 어찌 해보겠는데….'

차를 돌리자 몇 사람은 그 자리에서 바로 출발하였다. 나와 규섭이 등 절반의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다시 그 차를 타고 광주로 가기로 했다. 광주 학동까지 돌아와 시내버스로 갈아타서 친구네 자취방 앞에 도착하니 새벽 1시 반이 넘었다.

"야, 배 안 고프냐? 라면이라도 끓여 먹어야지."
"아까 버스 탈 때 남은 돈 다 긁었잖아."

추위라도 녹일 겸 얼른 자취방으로 짐을 들고 들어갔다.

"규섭아, 글면 쌀이랑 김치는 있냐? 김치죽이라도 끓여 먹고 자자. 도저히 배고파서 못 자겠다야."
"……"

묵묵부답이었다. 쌀가마는 텅 비어 있었고 김치 통도 집에서 가져올 요량으로 쓰레기통에 말끔히 비웠으니 있을 턱이 없었다. 주린 배를 움켜쥐고 물 한잔 먹고 그냥 자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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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화순에 이르고 보니. 이리 쭉 올라갑니다. 다시 십리를... ⓒ 김규환


밤새 소복히 눈이 쌓였다. 날씨는 어제보다 더 추웠다. 아침 일찍 일어나 집으로 가기 위해 주인집에서 쌀을 반 되 빌려 석유 곤로에 밥을 지었다. 반찬은 양조 간장 딱 하나. 고추가루, 참깨, 참기름은 시골집에 있다고 했다.

시골에 도착하여 4km는 걷기로 하고 반대편 호남고속도로를 지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왕복 2차선 고속도로에 접어들어 30여 분 느리게 달렸을까? 담양군 창평을 무사히 지나더니 대덕면 고개를 엉금엉금 기어오른다. 고개를 올라 채는 건 양지쪽이라 별 무리가 없었다.

그런데 이게 또 웬 일인가? 내리막길에 접어들자 빙그르르 차가 돌기 시작한다. 반대편은 그래도 오르는데…. 난감했다. '다시 돌아갈 수도 없잖은가. 이러다 집 없는 나는 며칠이고 집에 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동행한 친구들에게 그냥 걷자는 제안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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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 죽 즐겨 드셨던 아버지는 고향에 이제 안 계십니다. ⓒ 김규환


거기서부터 오후 1시 무렵부터 걷기 시작하여 집에 도착하니 어느덧 해가 무등산 쪽으로 넘어갈 채비를 한다. 걷는 시간은 꼬박 오후를 다 잡아먹었다. 5시 반이었다. 집에 다다르자마자 옷만 벗고 누워서 잠을 자기 시작했다. 홀로 계신 아버지는 "밥이라도 먹고 자라"고 하셨지만 이틀 동안 눈과 처절한 싸움을 벌인 나는 먹는 것도 달갑지 않았다.

자고 자도 또 잠 나라뿐이었다. 자다 깨어나서는 헛소리를 질러대고 다시 잤다. 비몽사몽의 연속에 식은땀을 줄줄 흘리는 막내 아들을 혼자서 보살피셨던 아버지. 초등학교 때 사경을 헤맸던 기억 다음으로 죽음과 맞닥뜨리는 순간이었다.

아버지는 쉬지 않고 군불을 때시고 여덟 식구가 덮고 살았던 집안에 있던 모든 솜이불을 겹겹이 덮고서도 춥다는 아들 때문에 애간장을 녹였다. 이틀, 그러니까 48시간을 꼬박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잠에 빠져 신음했다.

어질어질 제 몸 혼자 가눌 수 없는 신세가 된 나는 거동을 결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때 마침 아버지가 즐기시던 콩죽(콩과 쌀을 불려 확독(돌로 된 조그만 절구)에 갈아 맑게 쑨 죽)이 손수 당신 손으로 쒀서 올려져 있었다. 얼음 성성한 맑은 싱건지와 함께.

3박 4일 아니 4박 4일은 그렇게 길 수가 없었다. 얼마 전 두 고개를 한걸음에 달려보고는 쓴웃음이 나왔다. 평생 잊을 수 없는 방학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다음날 본 백아산에 쌓인 눈은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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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 때느라 애쓰셨습니다. 고드름만 주렁주렁 열렸겠네요. 이런 때 눈이라도 한번 내리면 좋겠습니다. ⓒ 김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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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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