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정모 연재소설 <수메리안> 34

등록 2004.01.16 10:10수정 2004.01.16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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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인은 영문을 알 수 없었으나 곧 꿇어앉았다. 아버지가 호령을 내릴 때는 머뭇거리거나 반론을 제기해서도 아니 되는 것이 그가 받아온 훈령이었다. 마침내 아버지가 엄한 목소리로 물었다.

"네 잘못을 알겠느냐?"
"모르옵니다, 아버님."
에인이 정직하게 대답했다.
"그렇다면 넌 무슨 신분으로 여기까지 왔느냐?"
그제서야 에인은 알아차렸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나직이 대답했다.


"소호 국 장군으로 왔사옵니다."
"그렇다면 군사를 내버려두고 혼자 강으로 뛰어들어도 되느냐?"
"하오나 길 안내를 잘 하시는 분이 계시옵기에…."
"하다면 넌 이 강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더냐?"
"……."
"초행에 잘 알지도 못하는 강을 네 멋대로 그렇게 뛰어들어도 되느냐?"
"깊지 않다고 했습니다. 짐승들은 물로도 건너다닌다기에…."
"누가 그런 말을 하더냐? 누가 그쪽도 수심이 얕다고 하더냐?"

에인은 그만 말문이 막혔다. 제후가 알려준 곳은 분명 그보다 훨씬 위였다. 또 그 쪽은 사구와 떨어져 있어서 물이 몰리는 곳일텐데 그 생각을 못한 것이었다. 아버지가 다시 물었다.

"그리고 물어보자. 너는 네 부하들에게도 네가 그쪽으로 간다고 알린 후에 강으로 뛰어들었더냐?"
"잘못 했사옵니다, 아버님."
"장군과 군사는 명령과 전달이 그 생명선이다. 한데 너는 군사들에게 아무 지침도 내리지 않고 그냥 강에 뛰어들었다."
"잘못했사옵니다."

"만약 군사들과 마차까지 너를 따랐다면, 말도 건너기 힘든 그곳으로 함께 뛰어들었다면 그들은 또 어떻게 되었겠느냐?"
"용서하옵소서.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명심하겠사옵니다."
"장군이 경거망동하면 그 피해가 군사들은 물론 나라에까지 미치게 된다. 내말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
"예, 장군의 목숨은 나라에서 받은 것임으로 그 목숨은 반드시 나라의 이를 위해 써야 한다는 뜻이옵니다."

에인에게 장군의 도리가 아직 익숙하지 않다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것도 아주 갑자기 장군이 되었음으로 그 행동이나 품위를 배울 틈도 없었다. 때문에 재상은 자기 역시 당장 아들을 얼싸안고 싶었음에도 이 기회가 아니면 그나마 가르쳐줄 수 없을 것 같아 그렇게 불호령을 내린 것이었다.


"이제 일어 나거라."
부친의 목소리는 어느새 아주 부드러워져 있었다. 에인이 고개를 들고 물었다.
"그럼 용서하시나이까?"

그렇게 묻는 아들의 얼굴에는 어서 빨리 아버지를 안고 싶다는 욕망이 빨간 꽃처럼 피어나고 있었다. 아들은 어릴 때부터 아버지에 대한 사랑법이 유별났다. 기저귀를 차고서도 그의 개인 집무실로 와서는 왜 자기와 놀지 않고 여기 있느냐고 투정을 부렸다.


말도 빨리 배운데다 행동 또한 어떻게나 빠른지 눈 깜박할 사이 저 어미나 하인들은 아들을 놓치곤 했다. 밤에는 또 그의 침실로 들어와 그의 귀를 만지면서 잠들기가 다반사였다.

그랬다. 에인은 유독 살 비비는 것을 좋아했다. 왕손은 사람 앞에서 그런 행동을 보여서는 아니 된다고 가르친 뒤부터는 아무도 없다 싶으면 얼른 다가들어 가슴으로 파고들거나 귀를 만져댔다.

그런데 지금'용서하느냐'고 묻는 그 덩치 큰 청년의 얼굴에 다섯 살 때의 어리광이 다시금 피어나고 있었다.
"오냐, 이제 와서 아버지를 안아라."
아들이 달려와 재상을 덥석 안았다. 그리고 깎지 못한 수염을 아버지의 얼굴에 비비면서 속삭였다.

"아버님, 그간 수염을 깎지 못했나이다."
"수염이 있으니까 더 의젓해 보이는구나."
"많이 거치나이까?"

열아홉 살짜리 청년의 수염이 거칠 리가 없었다. 솜털 수준은 아니라 해도 그에겐 오히려 간지러웠다. 하지만 에인은 지금 아비에게 자신의 남성을 자랑하고 싶은 것이다. 재상이 대답했다.
"좀 거칠구나."

거칠다고 했는데도 아들은 좀더 세게 그 턱을 아비 얼굴에 비벼댔다. 그러자 그의 가슴이 별안간 무너져 내렸다. 내일이면 이 아들과도 헤어져야 한다. 단 한번도 부모 슬하에서 떠나본 적이 없는 것이 아주 먼 길을 가야 한다. 언제 다시 돌아올지 기약할 수도 없는 머나 먼 길을 떠난다….

아들이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아버님, 제가 제주가 되어 소도 천신제를 주관하였나이다."
그때 일행들의 말과 마차가 그들 가까이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사구 쪽 강을 건너 온 것이었다. 재상은 얼른 아들의 포옹을 풀었다. 그는 아들의 그 장한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 싶었으나 그럴 수 있는 신분이 아니었다.

"먼길 오느라 수고들이 많았소!"
재상은 얼른 일행들을 맞았다. 은 장수와 군사들이 모두 말에서 내려 그에게 반절을 올렸다. 제후도 마찬가지였다. 은 장수가 절을 끝내고 허리를 펴며 재상에게 물었다.

"재상님, 저 위에 서 있는 사람들이 새 군사들입니까?"
그 말을 듣고 에인도 비로소 강 위쪽을 살펴보았다. 거기엔 군사들뿐만 아니라 수많은 천막까지 쳐져 있었다. 아버지에게 정신을 파느라 보지 못했는데 강가 여기저기에서는 벌써 불까지 피어올랐다. 저녁준비들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소이다. 그들이 지금 돼지를 굽고 있소이다."
그 말을 들은 군사들의 얼굴이 삽시에 밝아졌다. 그렇지 않아도 배가 고파 등가죽이 올라붙을 지경인데 곧 돼지고기를 먹을 수 있다니 얼마나 기쁜가 싶었던지 모두 입들이 헤벌쭉 벌어졌다.

"자, 그럼 먼저 여장부터 풀도록 하시오."
이번에는 아버지와 함께 온 강 장수가 말했다. 그리고 강 장수는 앞장서서 새로온 일행들을 자신들의 천막 쪽으로 안내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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