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 이야기 좀 하까예?"

<내 추억속의 그 이름 127>공장일기(18)

등록 2004.01.02 16:47수정 2004.01.02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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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의 새해는 그렇게 밝았다. 그리고 새해부터 나는 공장생활 3년여만에 정말 괜찮은 부서에서 나름대로의 여유를 가지며 일을 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잔업과 철야근무를 계속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내게 주어진 작업 환경이 달라지다 보니, 자연스레 마음에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던 것이다.


"아따! 오늘따라 머슨 불량품이 이리도 많이 나오노. 금형에 머슨 문제가 있나? 아이모 내가 셋팅을 잘못했나?"
"그런 걱정을 말라꼬(왜) 합니꺼. 분쇄기에 넣어가 뿌싸가꼬(부셔서) 다시 맨들모(만들면) 되는데."
"아, 누가 오데 그거로 몰라가꼬 그라나? 문제는 일일생산량 아이가. 일일생산량!"

그때부터 나는 불량품 때문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었다. 왜냐하면 사출실에서는 불량품이 나오더라도 다시 분쇄를 해서 새로운 제품을 만들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까닭에 사출실에서는 불량품이란 게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저마다에게 주어진 일일생산량을 어떻게 맞추어 내느냐가 문제일 것처럼 보였다.

"일일생산량을 채우는 그런 걱정은 아예 붙잡아 매도 됩니더. 우리 계장님께서 그걸 미리 알아가꼬 일일생산량을 아예 적게 잡아놨다 아입니꺼."
"그라이 자네도 앞으로 새로운 제품에 대한 일일생산량을 정할 때에는 그런 것까지 미리 생각하고 정해야 한다네. 괜히 생산부장에게 조금 잘 보이려고 하다가 애매한 우리 사출실 식구들 똥 빠지게 고생시키지 말고."

하지만 사출기는 금형을 미리 셋팅을 해 놓아도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바로 작업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사출기는 비료처럼 생긴 딱딱한 플라스틱 재료를 실린더에서 일정한 온도로 녹인 다음, 제품형상이 새겨진 금형에 액체가 된 플라스틱을 쏘아 7~8초간 고체로 굳혀서 제품을 만드는 그런 기계였다.

그런 까닭에 사출실에서 같이 일했던 여성 노동자들은 누구나 출근하자마자 사출기를 작동시켜 실린더와 금형에 일정한 온도를 미리 올려놓아야만 했다. 그리고 그렇게 일정한 온도가 오르고 나면 액체가 된 플라스틱이 원활하게 흐르게 하기 위해서 2~30분간 여러 가지 작동을 시켜야만 했다.


그 때문에 사출실에서의 실제 작업시간은 오전 10시쯤부터 시작되었다. 또한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도 미리 시제품을 뽑아 여러 가지 검사를 거친 뒤 별다른 이상이 없다고 판단되어야만이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갈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한번 기계가 가동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아주 수월했다.

사출실에 소속된 여성 노동자들은 가끔 제품의 상태를 검사하고, 플라스틱 재료가 떨어지면 재료를 보충해 주기만 하면 되었다. 그리고 불량품이 나오면 별도로 구분해 두었다가 하루에 한 번 정도 분쇄기에 넣어 부순 뒤, 원재료 일부와 섞어 건조기 속에 넣어두면 그만이었다.


"여기예!"
"어디? 아니, 아무런 이상이 없잖아?"
"그기 아이고, 이거."

그랬다. 그때 그녀는 제품에 아무런 이상이 없는데도 툭 하면 제품에 문제가 있는 것처럼 나를 부르곤 했다. 그리고 내가 다가가면 눈웃음을 툭 툭 내던지며 은근슬쩍 조그마하게 접은 예쁜 색종이를 건네주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마치 무슨 죄를 짓기라도 한 것처럼 주변 여성 노동자들의 눈치를 살피기에 바빴다.

하지만 그녀는 쪽지를 받고 그렇게 쩔쩔 매는 내 모습이 아주 재미있다는 듯이 나지막하게 쿡쿡 웃곤 했다. 그러다가 어느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시치미를 뚝 떼곤 금형에서 하얗게 떨어지는 제품을 꼼꼼하게 검사하기 시작했다. 이제 자신이 할 일은 모두 다했다는 듯이 그렇게.

어떤 때는 어린 나이에 비해 그렇게 능청맞게 행동하는 그녀가 얄미워 보일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녀 나름대로의 꼼꼼한 정성이 담겨 있는 그 쪽지를 모른 척하고 은근슬쩍 버릴 수도 없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 쪽지의 내용이 대체 무언지 궁금하기도 했다.

처음 그녀에게 그 쪽지를 불쑥 받았을 때 나는 조마조마한 가슴을 쓸어내리며 부서원들 몰래 서둘러 작업복 속에 집어 넣었다. 그리고 마치 다른 부서에 급한 볼 일이라도 있는 것처럼 사출실을 바삐 빠져나와 화장실에 들어가 예쁘게 접힌 그 쪽지를 펼쳐보았다.

그 쪽지에는 깨알만한 글씨 몇 자가 또박또박하게 적혀 있었다. 오늘 저녁 몇 시까지 어디로 나오라는, 아니 나오지 않으면 당장 무슨 일이라도 벌이고 말겠다는 다분히 명령조가 담겨 있는 글씨 몇 자. 근데 희한하게도 그 글씨를 보는 순간 나는 이상하게 주눅이 들기 시작했다.

대체 어쩌자는 것인가. 그리고 나더러 어찌하란 말인가. 또한 그렇게 만난다고 하더라도 대체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나누겠다는 것인가. 행여 그렇게 만나다가 같은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 눈에 띄기라도 한다면, 그 소문은 또 어찌 입막음 할 것인가. 그렇다고 이대로 외면만 하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저어기~ 저랑 잠깐 이야기 좀 하까예(할까요)?"
"와 예?"
"어제 울고 불고 난리가 났었어예. 그라이 자주는 만나지 못한다 카더라도 가끔씩은 만나가(만나가지고) 큰오빠처럼 마음을 좀 다독거려 주이소."

그래. 그때부터 나는 병역특례가 끝날 때까지, 아니 그녀가 산업체 특별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녀 주변을 지켜주어야만 했다. 그리고 그때 나는 사랑과 우정의 경계가 어디쯤에서 나눠지는지에 대해서 어렴풋하게 알 수가 있었다.

덧붙이는 글 | <계속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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