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자 올개는 할 수 없고예"

<내 추억속의 그 이름 126>망년회

등록 2003.12.29 13:10수정 2003.12.29 16:26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a 씁쓸하지만 속이 꽉 찬 망년회

씁쓸하지만 속이 꽉 찬 망년회 ⓒ 이종찬

"아니, 요즘도 월급을 땡가물라(떼먹으려) 하는 넘들이 있나? 그기 전화를 자꾸 피한다꼬 해서 오데(어디) 될 일이가."


"글쎄 말입니다. 지가 먼저 전화를 걸어서 사정이 이러이러하니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고 해도 시원찮을 판인데."

"그건 그렇다치고 병일이 니는 우짤끼고? 장가도 가지 않은 넘이 기침을 맨날 달고 살모 우짜것다 이 말이고."

지난 27일 그동안 주말마다 약속이라도 한듯이 늘 만나왔던 우리 '미리내' 회원들도 남들 다 하는 망년회라는 걸 했다. 하지만 망년회라고 해서 예전과 별 다를 게 없었다. 늘 만나던 큰대포집에서 그렇게 만나 늘 먹던 막걸리와 기본으로 나오는 안주를 먹으며 서로 안부를 묻는 게 전부였다.

하긴 망년회라고 해서 평소와 별 다를 게 뭐가 있겠는가. 그저 서로 만나 올해 있었던 여러 가지 길흉사에 대해서 다시 한번 되새겨보고, 내년에는 조금 더 열심히 살아가자고 서로 다독이면서 막걸리 한잔 흥겹게 나눠 마시면 그만이 아니겠는가.

"니 내 시키는대로 해라. 무시(무) 있제? 그것도 요새 나오는 늦가을 무시가 최고로 좋다 아이가. 그 무시로 숟가락으로 얇게 긁어가지고 토종꿀에다 비비가(비벼가지고) 유리병에 넣어놓고 기침이 날 때마다 조금씩 무(먹어)봐라. 한 달 쯤 묵으모 언제 그랬냐는듯이 기침이 사라질끼다."


"인자 올개(올해)는 할 수 없고예. 내년부터는 어르신 말씀대로 한번 해볼께예. 그기 그리 크게 어려운 방법도 아인께네예(아니니까요)."

"참! 니가 저번에 오마이뉴스에 썼던 무명화가 정순옥이 그거는 요새 장사가 좀 되는강?"


그랬다. 그날은 그동안 서로 띄엄띄엄 만나 안부를 주고 받던 사람들 대부분이 참석했다. 하지만 그림 그리는 주모 정순옥과 학교 선생님인 김재순과 남외경, 언론인이자 작가활동을 하고 있는 김준형 선생은 사정으로 참석하지 못했다.

a 막걸리와 기본 안주로도 즐겁게 치른 망년회

막걸리와 기본 안주로도 즐겁게 치른 망년회 ⓒ 이종찬

정순옥은 지난 번 차린 목로주점 '토막'에서 장사를 한다고, 김재순과 남외경 선생은 다른 모임 때문에, 그리고 김준형 선생은 갑자기 어머니께서 편찮은 까닭에 부득히 참석을 할 수가 없단다. 그러나 그 빈 자리를 낙동강변에서 찻집 '알 수 없는 세상'을 운영하는 장윤정 선생과 장애인센터에서 일하는 한양숙 선생이 채워 주었다.

"어이~ 총무간사! 우리 회원 명부 좀 내봐라. 일 년에 꼭 한번 참석한 한양숙 선생이 우리 회원인가 아닌가 한번 보게."

"명부가 오데 있습니꺼? 제 머리 속에 다 저장되어 있지예. 그라고 우리 모임이 말 그대로 '알 수 없는 세상' 아입니꺼?"

"오늘이 그래도 명색이 '미리내' 망년횐데, 우리도 대충 먹고 2차로 한번 가 보자. 무명화가가 겨울나기로 잘 하고 있는지 우짜는지."

그렇게 우리 일행들은 목로주점 '토막'으로 향했다. 손님들이 생각날 때마다 휘갈긴 글씨가 엉거주춤한 춤을 추고 있는 조그만 주점 토막에는 몇 번 본 듯한 손님 몇몇이 마주 앉아 술잔을 주고 받고 있었다. 그러나 그림 그리는 주모 정순옥은 자리에 없었다. 대신 정순옥의 친언니가 벽에 걸린 그림처럼 주점을 지키고 있었다.

"어디 갔어요?"

"무슨 급한 모임이 있다고 나갔어예. 앉으이소, 고마. 금방 들어올 낍니더."

그나마 다행이었다. 토막은 정순옥의 친언니가 주방을 맡아야 할 정도로 제법 손님이 드나든다고 했다. 그래. 그렇다면 토막이 일단은 제자리를 서서히 잡아가고 있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림을 그리기 위한 물감값만 벌면 된다며 출발했던 정순옥이가 아니었던가.

a 새해에는 무명화가가 물감값이 없어 그림을 그리지 못하는 일이 사라지게 하소서

새해에는 무명화가가 물감값이 없어 그림을 그리지 못하는 일이 사라지게 하소서 ⓒ 이종찬

"아니, 우리 모임에는 장사하느라 바쁘다고 나오지 않고 딴 모임에는 나갔단 말이오. 오늘 낙동강변에서 찻집을 운영하는 장윤정 선생도 가게를 맡겨두고 우리 모임에 나왔는데? 정말 알 수 없는 주모로구먼."

그렇게 우리 일행들이 안도의 한숨 속에 약간의 투정을 부리며 바닥에 깔린 덕석 위에 마악 앉고 있을 때 "언제 왔어요?" 하면서 정순옥이가 붉으스레한 얼굴을 뾰쪽 내밀었다. 표정이 제법 밝은 걸 보니, 그 어느 해보다 추울 것만 같았던 정순옥의 겨울나기에는 더 이상 큰 문제가 없어 보였다.

"이라다가 물감값만 버는 기 아이라 아예 화랑을 내는 거 아이가?"

"그리 되었으모 울매나 좋것노."

"이제 다 모였으니, 아헌 선생님께서 새해 덕담을 한 말씀 하시지요?"

"에~ 새해에는 모두 건강하시고, 저마다 하시는 일들이 올해처럼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새해에는 우리 회원들의 걱정보다 우리 주변 사람들을 걱정할 수 있는 그런 넉넉한 마음이 넘쳐나는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헌 김상헌 선생님의 덕담이 끝나자 이내 꽹과리 장단과 함께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노래가 시작되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들어보고, 오랜만에 불러보는 노래였다. 그와 더불어 우리 일행들은 흘러가는 노랫가락 속에 한 해를 보내고, 주고 받는 막걸리 잔 속에서 새롭게 떠오르는 해를 보았다.

갑신년 새해에는 저마다 월급을 못 받는 일이 없게 하소서. 갑신년 새해에는 저마다 가지고 있는 병을 물리치게 하소서. 갑신년 새해에는 무명화가가 물감값이 없어 그림을 그리지 못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갑신년 새해에는 의식주 때문에 벌벌 떠는 일이 이 땅위에서 사라지게 하소서.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억대 연봉이지만 번아웃 "죽을 것 같았다"... 그가 선택한 길 억대 연봉이지만 번아웃 "죽을 것 같았다"... 그가 선택한 길
  2. 2 28년 만에 김장 독립 선언, 시어머니 반응은? 28년 만에 김장 독립 선언, 시어머니 반응은?
  3. 3 체코 언론이 김건희 여사 보도하면서 사라진 단어 '사기꾼' '거짓말'  체코 언론이 김건희 여사 보도하면서 사라진 단어 '사기꾼' '거짓말'
  4. 4 마을에서 먹을 걸 못 삽니다, '식품 사막' 아십니까 마을에서 먹을 걸 못 삽니다, '식품 사막' 아십니까
  5. 5 계엄은 정말 망상일까? 아무도 몰랐던 '청와대 보고서' 계엄은 정말 망상일까? 아무도 몰랐던 '청와대 보고서'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