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명 시인들의 영혼과 만나다

[신간] 박상건의 <빈손으로 돌아와 웃다>

등록 2004.01.06 18:05수정 2004.01.07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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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그래

일찍이 공자는 "시를 모르는 자와는 이야기도 하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변한 세월 탓일까? 요사이는 술자리에서조차 시와 시인의 이야기를 입에 올리지 않는 게 세태다. 그렇다고 피 흘린 영혼의 흔적인 '시'와 자처해 고난의 길을 걷는 '시인'들의 아름다움까지 모조리 사라지지는 않을 터.

시인들은 대체 어떤 이유로 시를 쓰게됐으며 자신이 선택한 시인으로서의 삶에 만족하고 있는지? 시집의 활자로만 시인들을 만나는 독자들에게 늘상 궁금한 질문이다.


바로 이 질문에 답해주기 위해서였을까? 그 자신이 시인인 박상건이 동료와 선후배 시인 17명을 인터뷰한 <빈손으로 돌아와 웃다>(당그래)를 출간했다.

<뿌리깊은나무> 편집부장과 국정홍보처 분석국 사무관 등으로 일한 바 있으며 여행광이기도 한 박상건은 이번 책을 통해 원로 고은과 신경림에서부터 이제 막 신인을 벗어나 중견으로 가는 이정록 시인까지 왕성한 창작활동을 지속하고 있는 17명 시인의 삶과 문학을 꼼꼼하게 살피고 있다.

시인들의 서재에는 어떤 향기가 스며있고, 그들은 무슨 술을 좋아하며, 삶의 어떤 대목에서 울고 웃는지를 고루 살핀 <빈손으로 돌아와 웃다>. 그 자신이 시인이기에 각각의 인터뷰마다 애정이 듬뿍 묻어나지만, 그중 특히 주목을 끄는 것은 최근 아내의 백혈병으로 고초를 겪고있는 송수권 시인과 허약한 육체 속에 위대한 시혼(詩魂)을 감추고 있는 박철과의 만남이다.

경제적 문제에 무관심한 시를 쓰는 남편을 위해 직접 똥장군을 져 나르며 수박을 키우고 보험영업으로 가계를 이어가던 아내의 갑작스런 병마에 "당신이 죽으면 다시는 시 따위를 쓰지 않겠다"고 목메인 울음을 토해냈던 송수권 시인의 시 '아내의 맨발-연엽에게'는 아내에게 무심했던 이땅 모든 남편들을 울린다. 연엽은 송 시인 아내의 이름이다.

그녀는 잠들었다
혈소판이 깨지고 면역체계가 무너져 몇 개월 째
마스크를 쓴 채 남의 피로 연명하며 살아간다


잠든 네 발바닥을 핥으며 이 밤은
캄캄한 뻘밭을 내가 헤매며 운다
그 연(蓮) 잎새 속에서 숨은 민달팽이처럼
너의 피를 먹고 자란 시인
더는 늙어서
피 한 방울 줄 수 없는 빈껍데기 언어로
부질없는 시를 쓰는구나

오, 하느님
이 덧없는 말의 교예
짐승의 피
거두어 가소서.



"평안도에 소월의 있다면 호남에는 송수권이 있다"는 말을 들으며 서정시가 가 닿을 수 있는 최고정점에 이른 노(老)시인의 뒤늦은 회한. 하지만 이토록 맑디맑은 영혼이 엿보이는 시를 쓸 수 있는 사내의 아내는 가난했지만 그 가난 속에서도 행복하지 않았을까.

경기도 김포에서 태어나 김포에서만 40년 이상을 살아온 박철 시인의 유난스런 '동네사랑'을 넉넉하게 풀어놓은 글은 송수권 시인의 인터뷰와는 또 다른 맛으로 독자들을 매혹한다.

"휘황한 네온사인의 광화문이나 음란한 취기로 휘청이는 강남을 단 한 번도 부러워한 적이 없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박철 시인은 고향을 이렇게 노래한다. '김포 1'이란 시에서다.

한낮에도 애를 업고
담장 밖 기웃대며 서성이는 사내들과
한밤에도 돌아올 줄 모르는 여인들이
한데 엉크러져 살아갑니다
오늘도 고향 그리워
밤으로 돌아눕는 뜨내기들과
빈 거죽만 쥐고 있는 본토박이들과
구멍가게 모여 술주정하다
한가지로 쓰러지며 살아갑니다...


변두리에 산다는 것이 결코 열등하지 않다는 것을 일상에 뿌리내린 담백한 시어로 조용히 웅변하는 박철. 문학의 불모지라 할 김포를 서울의 중심 종로통으로 바짝 당겨놓은 그를 볼라치면 빈곤 속에서도 어울려 사는 미덕을 잃지 않은 김포가 대한민국의 수도인 것만 같다.

<빈손으로 돌아와 웃다>에서는 이성부와 정일근, 도종환과 안도현, 문정희와 나희덕, 오세영과 황동규 시인의 문학과 생도 엿볼 수 있다.

빈손으로 돌아와 웃다

박상건 지음,
당그래,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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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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