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설 속에 피어난 하얀 연꽃인가?

걸망에 담아온 산사이야기(35)-덕유산 백련사

등록 2004.01.20 09:13수정 2004.01.20 14:39
0
원고료로 응원
a 백련사가는 길이 백설로 덮여있다.

백련사가는 길이 백설로 덮여있다. ⓒ 임윤수

'답다'라는 접미사가 모든 곳에 붙는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제 역할과 직분을 다 할 때 체언 뒤에 붙는 '답다'란 접미사는 체언의 성질이나 특성을 표현한다. 아빠가 아빠로서, 남편이 남편으로 그리고 검사가 검사로 정치인이 정치인으로 제 역할을 다 하면 호칭이나 직분 등에 '답다'란 수식어를 붙여준다.

대수롭지 않고 별 것 아닌 듯싶다. 그러나 어찌 보면 가장 힘들지만 실천 가능하고 아름다운 목표가 아닌가 모르겠다. 산은 산다워야 하고 강은 강다워야 한다. 계절 또한 그러하니 겨울은 아무래도 조금은 쌀쌀하고 적당히 눈이 내려주어야 겨울답다. 사실 그 동안 이상난동(異常暖冬)이 염려될 정도로 날씨가 푸근하였다.


색 바랜 동심으로 학수고대하던 눈도 좀처럼 보기 힘들었다. 엄동설한(嚴冬雪寒)이란 말이 무색할 정도로 포근한 그런 겨울은 역시 겨울답지 않았다. 설을 앞두고 이제서야 겨울다운 날씨가 시작된 듯하니 갑신년 새해에는, 대통령부터 저 아래 꼬맹이까지 모두 '답다'란 수식어에 당당한 그런 1년이 되었으면 좋겠다.

a 산길을 따르다 보면 일주문을 만나게 된다.

산길을 따르다 보면 일주문을 만나게 된다. ⓒ 임윤수

예나 지금이나 '겨울'하면 역시 눈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천하를 온통 하얗게 덮어버린 눈은 동심조차 들뜨게 한다. 지금도 그렇지만 예전의 시골 겨울은 무료하리만큼 단조롭고 지루했다. 더더구나 먹거리도 놀거리도 제대로 없던 때였으니 그 무료함은 더 했을 거다.

눈이 펑펑 나리면 눈사람을 만들기 시작한다. 크고 작은 덩어리를 하나씩 만들어 커다란 덩어리 위에 작은 덩어리를 올려놓으면 몸이 되고 머리가 되니 어렵지 않게 눈사람이 만들어진다. 몸이 다 만들어지면 집 근처 어디에서고 쉽게 구할 수 있는 솔가지와 숯검정으로 눈썹을 붙이고 수염도 만들어 준다.

그러다 더 많은 눈이 오면 눈을 쓸어 마당 한 구석에 미끄럼틀을 만든다. 쌓인 눈을 경사지게 다지고 가끔 물을 끼얹으며 만들어진 눈 미끄럼틀은 눈오는 날 마당에 만들어지는 멋진 놀이기구가 된다. 몸이 유연한 아이들이야 넘어져도 상관없지만 가끔 어른들이 대책 없이 넘어져 낙상(落傷)을 당하는 불의의 사고가 있기는 하지만 꽤나 인기가 있는 겨울 놀이인 것은 틀림없었다.

a 일주문 안쪽 눈밭엔 부도가 나란하다.

일주문 안쪽 눈밭엔 부도가 나란하다. ⓒ 임윤수

동네 앞 완만한 경사를 가진 언덕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온 동네사람들이 즐기는 미끄럼틀이 된다. 비닐로 된 비료포대에 지푸라기를 넣어 두툼하게 하여 엉덩이에 깔고 앉으면 정말 스릴 있는 미끄럼 타기가 된다. 울퉁불퉁 할 수밖에 없는 언덕의 질감이 그대로 엉덩이에 전이된다.


겨울을 이야기하면 사람들이 빼놓지 않고 이야기하는 것이 있다. 바로 눈꽃(雪花)이 그 대상이다. 가끔은 나뭇가지들을 부러뜨리기도 하지만 휘휘 늘어진 가지에 몽실몽실 얹혀있는 눈덩이들은 순백의 꽃송이가 틀림없다. 사람들은 그런 눈꽃을 보고 눈물이 핑 돌 정도로 감탄하기도 한다.

그런 눈꽃보다 더 아름답고 사람을 감동시키는 겨울의 꽃이 있으니 바로 상고대가 아닌가 모르겠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눈꽃은 눈이 와야만 피어나기에 눈이 와야만 볼 수 있는 꽃이다. 그러나 상고대는 그렇지 않다. 눈이 오지 않아도, 햇볕이 쨍한 날씨에도 정말 아름다운 눈꽃으로 환생하는 것이 상고대다.


a 대웅전 앞마당에서 내려다 본 우화루와 그 전망이 아름답다.

대웅전 앞마당에서 내려다 본 우화루와 그 전망이 아름답다. ⓒ 임윤수

뭐라고 할까? 눈이 오지 않아도 볼 수 있는, 추운 겨울날 유리창이나 벽에 피어난 성에와 같다고 할까? 그 생김새가 차갑도록 예리하고 깨끗하지만 그 순결함은 어느 것에도 뒤지지 않는다. 그런 성에가 나무에 피어나 자란 게 상고대다.

그러니 눈이 오지 않아도 상고대는 피어난다. 적당한 습도와 온도가 조화를 이루고 바람까지 곁들여 준다면 피어나듯 자라나듯 그렇게 성장하여 가슴조차 저리게 하는 아름다운 눈꽃(상고대)이 된다.

밤새 씨를 맺고 바람 따라 자라난 상고대가 아침햇살을 머금게 되면 거기서 쏟아지는 반짝임은 정말 환상적이다. 바람이라도 불어 나뭇가지를 흔들어 상고대와 햇살이 리듬을 타기 시작하면 정말 환상적인 광경을 연출해 낸다. 80년대 초 한라산 성판악에서 보았던, 아침 햇살을 받으며 바람에 살랑이던 그 상고대를 생각하면 지금도 필자는 가슴이 울렁거린다.

상고대는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다. 그러나 백학의 군무(群舞)같은 그런 상고대는 아무 곳에서나 쉽게 볼 수 없다. 그런 상고대, 백학의 군무같이 슬프도록 순결하고 깔끔한 그런 상고대를 가끔 아주 운 좋게 볼 수 있는 곳이 있으니 바로 덕유산이다.

a 파란하늘을 배경으로 우뚝 선 대웅전 그 뒤로 덕유산 향적봉이 있다.

파란하늘을 배경으로 우뚝 선 대웅전 그 뒤로 덕유산 향적봉이 있다. ⓒ 임윤수

덕유산(德裕山)은 그 이름에서 예감 할 수 있듯 넉넉함과 느긋함이 있는 산이다. 모나지 않은 산세지만 결코 경망해 보이지 않는다. 침묵하고 있는 권력자의 위엄 같은 게 느껴지는 그런 산이다.

그런 덕유산에 엄마의 젖줄처럼 흐르는 물줄기가 바로 무주 구천동이다. 일찍이 삼국시대부터 신라와 백제의 관문이었다는 나제통문(羅濟通門)을 지나면서 구천동(九千洞) 물줄기를 만나게 된다.

우리나라엔 기암과 어우러져 맑은 물이 흐르고있는 계곡이 꽤나 많다. 흐르는 물이 절벽을 만나면 폭포가 되고 움푹한 웅덩이나 바윗돌을 만나게 되면 담(潭)을 만든다. 봄이 오면 모든 것에 앞서 얼음 속으로 경쾌하게 흐르는 물줄기를 보여 주고 흐르는 물소리를 들려줌으로 오고있는 봄을 알려주는 계절의 전령이 된다.

여름엔 시원한 땀 식혀주는 바람의 근원지가 되고 가을엔 예쁜 단풍 가득 담는 그릇이 된다. 그러다 겨울엔 주렁주렁 고드름을 달거나 얼음판을 만들어 또 다른 모습으로 우리를 즐겁게 해 준다.

a 불공을 드리는 신자들이 기거할 공간이지만 평소엔 등산객들이 도시락을 펼치기도 하는 모양이다.

불공을 드리는 신자들이 기거할 공간이지만 평소엔 등산객들이 도시락을 펼치기도 하는 모양이다. ⓒ 임윤수

구천동은 첩첩 산골 덕유산 골짜기에 9천명의 성불공자(成佛功者)가 살고 있어, 구천인의 둔지(屯地 = 진치고 있는 땅)라는 뜻에서 '구천둔'이라 불렸다. 그러다 시간이 흐르면서 구천동이란 지명으로 불리게 되었다 한다.

그 길이가 90리나 된다는 구천동엔 백련사를 포함하여 33의 절경이 있다고 하니 돌고 도는 구비구비가 징검다리 절경이다.

구천동이라 불리는 유래에서 알 수 있듯 덕유산도 불교가 성행하였던 곳이니 꽤나 오래된 절이 있으니 곧 백련사다. 백련사는 덕유산 자락인 전라북도 무주군 설천면 삼공리 946-1번지로 무주구천동 계곡의 거의 시작 부분에 위치해 있어 고지(高地)에 있는 산사 중의 하나다.

백련사를 찾는 길은 삼공리 매표소를 지나 십오 리 길의 완만한 진입로를 걷게 된다. 차 한 대쯤 다닐 수 있는 넓이로 되어있지만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걸어야 하는 길이다. 그러나 요즘 같은 겨울엔 특별한 경우라 해도 걸을 수밖에 없다.

a 등산객들이 대웅전 옆 석간수로 갈증을 달래고 있다.

등산객들이 대웅전 옆 석간수로 갈증을 달래고 있다. ⓒ 임윤수

구천동 계곡 안쪽으론 겨울이 시작되어 눈이 한 번 나리면 봄까지 그대로 있다고 한다. 겨울 내내 그늘에 빙판을 만들고 있으니 걸을 수밖에 없는 그런 길이다. 걷는 이가 크게 느끼지 못할 정도로 완만한 오르막길을 1시간 반쯤 따라가다 보면 백련사 일주문으로 들어서게 된다.

일주문을 들어서니 우측으로 눈밭 속에 부도군이 있다. 부도군을 지나 조금만 더 들어가니 백련사 전각들이 보인다. 계단을 올라 사천왕문과 우화루를 통과해 경내로 들어 갈 수도 있고 사천왕문을 지나지 않고 우화루 앞으로 연결되는 경사 길을 따라 경내로 들어갈 수도 있다.

백련사는 신라 신문왕 때 백련선사가 살았던 곳에 백련(白蓮)이 솟아 나와 그 자리에 절을 짓고 백련암이라 하였다고 하는 설과, 830년 무염국사가 창건하였다고는 설도 있지만 역사적 기록을 찾기 어려우니 어느 것을 정설이라 단정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a 경내에서 바라본 향적봉 쪽 하늘이 파랗기만 하다. 운이 좋으면 나뭇가지에 피어난 상고대를 볼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경내에서 바라본 향적봉 쪽 하늘이 파랗기만 하다. 운이 좋으면 나뭇가지에 피어난 상고대를 볼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 임윤수

천왕문을 지나며 통과해야 하는 우화루 우측엔 범종각이 있다. 여기서 다시 한번 계단을 모르면 정면으로 대웅전이 있고 오른쪽으로 명부전(지장전)이 있다. 심산유곡 구천동 골짜기에 자리잡고 있는 백련사는 워낙 외떨어져 한적할 듯하나 끊이지 않는 등산객들로 항시 움직임이 있는 산사다.

아무리 좋은 산길도 1시간 30분쯤을 걷다보면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마련인데 바로 그 자리에 백련사가 있으니 백련사는 덕유산을 오르는 이들이 몸도 마음도 쉬어 가는 쉼터가 된다. 잠시 가방을 내려놓고 끈 조인 등산화를 벗어 법당에 들려 참배한 후 대웅전 좌측에 솟고있는 석간수 한 바가지 마시니 그 맛이 꿀맛이다.

대웅전 오른쪽, 작은 계곡 건너 쪽엔 꽤나 큼직한 기와지붕 한옥이 있다. 불공을 드리러 오는 신도들이 기거하는 공간이겠지만 평소엔 등산객들이 도시락을 꺼내 놓고 먹을 수 있는 대청마루 같은 행운의 공간이 되기도 하는 듯하다.

a 일주문 오른쪽엔 특이한 형태의 벌집이 달려 있었다.

일주문 오른쪽엔 특이한 형태의 벌집이 달려 있었다. ⓒ 임윤수

백련사를 지나며 덕유산을 오르는 길은 조금 급해지는 경사길이 된다. 서두르지 않고 여유있게 두 시간쯤 산길을 따르다 보면 덕유산 최고봉인 향적봉에 도착하게 된다.

소백산맥에서 남쪽으로 뻗은 국립공원 덕유산은 그 높이가 1614m로 전라북도와 경상남도 2개도 4개 군에 걸쳐 있으며, 1975년에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해발 1330m 이상의 봉우리가 5개나 되며 8개의 큰 계곡을 거느리고 있지만 결코 거만하지 않고 유순한 그런 형태의 산이다.

땀 뻘뻘 흘리지 않고 쉽게 향적봉에 오르는 방법도 있다. 무주리조트에서 곤돌라를 이용하면 15분쯤을 걸어 힘들지 않게 향적봉엘 오를 수 있다. 어찌 되었건, 향적봉의 상고대, 눈이 오지 않아도 피어나는 설화중의 설화는 항시 기대해도 좋을 그런 환상이다.

한 겨울 금강의 원류천인 구천동 계곡엔 백설속에 피어나는 한 송이 백련이 있으니 바로 백련사가 그 백련(白蓮)이다.

a 오색딱따구리가 먹이를 찾기 위해 나뭇가지를 열심히 두드리는 소리가 마치 염불하는 목탁소리로 들린다.

오색딱따구리가 먹이를 찾기 위해 나뭇가지를 열심히 두드리는 소리가 마치 염불하는 목탁소리로 들린다. ⓒ 임윤수

백련사를 들려 내려오는 길에 때아닌 빠른 템포의 목탁소리가 들린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소리를 찾아 한참을 헤맨 끝에야 나무를 열심히 쪼고 있는 오색딱따구리를 발견하였다.

딱따구리야 먹이를 찾느라 나무를 쪼고 있었겠지만 그 다다닥거리는 부리소리가 염불하는 목탁소리로 들린 것은 어인 까닭인지 궁금하기만 하다.

덧붙이는 글 | 백련사 찾아가는 길
경부(중부)고속도로 - 대전↔진주고속도로 - 무주IC - 이정표

며칠 간 일본엘 다녀오느라 연재가 지연되었음을 변명하며 연재의 기본에 충실하지 못함을 사과드립니다.

덧붙이는 글 백련사 찾아가는 길
경부(중부)고속도로 - 대전↔진주고속도로 - 무주IC - 이정표

며칠 간 일본엘 다녀오느라 연재가 지연되었음을 변명하며 연재의 기본에 충실하지 못함을 사과드립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남자들이 좋아하는 거 다 좋아하는 두 딸 아빠. 살아 가는 날 만큼 살아 갈 날이 줄어든다는 것 정도는 자각하고 있는 사람. '生也一片浮雲起 死也一片浮雲滅 浮雲自體本無實 生死去來亦如是'란 말을 자주 중얼 거림.


AD

AD

AD

인기기사

  1. 1 새벽 3시 편의점, 두 남자가 멱살을 잡고 들이닥쳤다 새벽 3시 편의점, 두 남자가 멱살을 잡고 들이닥쳤다
  2. 2 "독도 조형물 철거한 윤석열 정부, 이유는 '이것' 때문" "독도 조형물 철거한 윤석열 정부, 이유는 '이것' 때문"
  3. 3 방치된 폐가였는데 이젠 50만명이 넘게 찾는다 방치된 폐가였는데 이젠 50만명이 넘게 찾는다
  4. 4 일본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어떤 관계일까 일본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어떤 관계일까
  5. 5 일타 강사처럼 학교 수업 했더니... 뜻밖의 결과 일타 강사처럼 학교 수업 했더니... 뜻밖의 결과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