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정모 연재소설 <수메리안> 39

등록 2004.01.29 10:07수정 2004.01.29 12:01
0
원고료로 응원
11

한밤중이었다. 말 두필이 강둑으로 오르더니 그 즉시 내달리기 시작했다. 재상과 에인이었다. 칠흑 같은 어둠에도 불구하고 재상의 말은 들판을 잘 헤쳐 나갔고 에인의 말도 그 뒤를 바짝 따라붙었다.

"이렷!"
말이 잘 달리는데도 재상은 계속해서 속력을 다잡았다. 자신이 가야 할 곳까지는 30여 리 길이었다. 그 끈질긴 제후에게 잡히지만 않았어도 지금쯤 볼일을 다 끝냈을 것이었다. 하지만 제후는 요구에 확약을 더하느라 좀처럼 그를 놓아주지 않았고 간신히 타협을 끝냈을 땐 이미 자정이 넘어 있었다.


"이렷!"
아버지가 말을 재촉할 때마다 에인도 거듭해서 말 옆구리를 찼다. 그는 지금 아버지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아버지가 제후와 함께 자리를 비운 사이 그는 잠이 들었고 아버지가 돌아와 그를 깨웠을 때는 그저'말을 대기시켰으니 빨리 나오라'는 말씀뿐이었다.

아버지의 말이 속력을 늦추기 시작했다. 인가였다. 말은 천천히 걸어서 인가를 가로질러 갔다. 한밤이라 그런지 아주 조용했고 불빛도 없었다.
"거의 다 왔나이까?"
에인이 옆으로 붙어서며 물었다.
"아니다. 한참은 더 가야 한다."
"그럼 왜 속력을 늦추나이까?"
"우리가 달리면 말발굽소리가 사람들의 잠을 깨우지 않겠느냐."
에인도 목소리를 죽여 나직이 대답했다.
"그 생각을 못했습니다."

인가를 지나 한참 더 가자 시장 거리가 나왔다. 거의 문이 잠겨있어 어떤 물품이 그 속에 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곳이 곧 호시, 국제시장이었다.

사방 10리에 걸쳐 뻗어 있는 그 도심지는 사실 축소판 국제도시였다. 장터 중심지에는 근동, 중원, 북동 시베리아 등 동서남북 각지의 가게들이 저마다 자기 특색을 갖춰 열렸고, 전에 재상이 에인에게 언급한 여숙사들은 장터 뒷거리에 또 줄지어 있었다.

이 여숙사의 주인들 역시 각자 국적이 달라 단발에 짐승 모피를 입은 사람들이 자주 드나들면 그 주인은 틀림없는 야쿠트(시베리아에 분포했던 종족)족이었다. 그러니까 어디서 온 손님이건 자기 나라의 여숙사를 찾았던 것이었다.


아버지가 발길을 늦추며 말했다.
"여기서부터 소호 거리다. 사람들도 그렇게 부른다."
그곳 역시 가게였다. 그러나 다른 가게와 모양이 달랐다. 우선 똑같은 건물이 길게 이어졌고 가게를 닫았다는 표시가 천막이나 문으로 가린 것이 아니라 촘촘한 목책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럼 이 가게들 전부가 우리나라 것이옵니까?"
"그러하다. 물건도 가장 많고 사람들도 많이 드나든다."
보통 다른 가게에는 그 나라의 특산품 몇 가지만 주로 취급했지만 이 소호의 가게에는 토기에서 도자기, 모피, 고리가 달린 청동 솥, 각종농기구, 씨앗까지 칸마다 별도로 진열되어 있어 만물상 거리로도 불렸다.(주=소호라는 이름의 장터거리는 이 최초의 국제도시에서 시작되었고 5천년이 지난 지금도 런던과 뉴욕에는 만물상의 의미를 가진 소호거리가 있다.)


"그럼 이 여러 개의 가게를 누가 다 관리합니까?"
"별읍장님이시다. 넌 본 적이 없지만 그분은 네 국조모님의 남동생이시다."
그러니까 태왕의 외삼촌이기도 한 셈이었다.
"어찌하여 저는 뵌 적이 없사옵니까?"
"그분은 네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곳에 계셨다."

그때 아버지의 말이 오른쪽으로 꺾어 돌았다. 소호거리 끝 지점에서였다. 그 거리는 마차가 드나들 만큼 넓었고 그 길을 따라 조금 올라가자 바로 오른 쪽으로 큰 대문이 붙어 있었다. 말이 그 앞에서 멈추어 섰다.
"내려라."

말에서 내리고 보니 대문 양편에 커다란 팽이 토기가 물 받침대처럼 세워져 있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그 바깥 표면에 해와 용서가 그려져 있어서 소호국 사람의 영역임을 표시한 것이었다.
아버지가 대문을 두드리자 곧 하인이 횃불을 들고 나왔다.
"늦으셨습니다."
하인이 말들의 고삐를 받아 쥐며 말했다.
"별읍장 어른께서는 주무시는가?"
"깨어 계실 것입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넓은 마당 건너편으로 긴 건물이 몇 채나 줄지어 앉았고 건물 앞에는 횃불들이 걸려 있었다. 나무지붕으로 길게 이어진 것으로 보아 아까 지나오면서 본 그 가게와 비슷했고 또 바로 뒤편에 딸려 있는 것이 그곳은 물품보관실인 듯했다.

"늦으셨네."
마당 왼편에서 별읍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택은 그 안으로 들어앉아 있었고 별읍장은 막 문을 열고 나오는 중이었다.
"주무시는데 깨워드렸습니다."
아버지가 그쪽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별읍장이 대답했다.
"아니오, 자지 않았소이다."

가까이 가서보니 노인은 하얀 머리를 검은 띠로 단정하게 묶어 올렸고 수염은 깨끗이 깎아 흡사 신선 같아 보였다. 밤인데다 등불에 비쳐 보여서 더 그런 느낌이었는지도 몰랐다. 그 신선 같은 노인이 조용한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나는 오늘도 도착하지 않았나 걱정했소이다."
"이들은 저녁 무렵에야 도착했습니다. 에인아, 인사드려라. 아버지의 외삼촌이시다."
에인이 머리를 숙여 인사를 드리자 노인이 에인의 손을 덥석 잡고 말했다.
"먼길 오시느라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말씀 낮추십시오."
"지금은 공무로 오셨으니 그럴 순 없지요."

그때 아버지가 나섰다.
"내일 아침 일찍들 출발하는지라 시간이 없습니다."
"참 그러시겠구려. 자, 그럼 어서 가서 만나보시지요."
노인은 그렇게 말한 후 길게 이어진 건물 쪽으로 그들을 안내해 갔다. 또 누군가 만날 사람이 있는 모양이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일타 강사처럼 학교 수업 했더니... 뜻밖의 결과 일타 강사처럼 학교 수업 했더니... 뜻밖의 결과
  2. 2 유럽인들의 인증샷 "한국의 '금지된 라면' 우리가 먹어봤다" 유럽인들의 인증샷 "한국의 '금지된 라면' 우리가 먹어봤다"
  3. 3 꼭 이렇게 주차해야겠어요? 꼭 이렇게 주차해야겠어요?
  4. 4 얼굴 창백한 계산원을 보고 손님이 한 행동 얼굴 창백한 계산원을 보고 손님이 한 행동
  5. 5 쿠데타 막다 옥살이, 63년 만에 무죄 받아든 아들의 한탄 쿠데타 막다 옥살이, 63년 만에 무죄 받아든 아들의 한탄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