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안의 노(老) 사제와 50년 만에 통화를 하다 ①

등록 2004.02.20 11:02수정 2004.02.20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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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8일 오후 3시경, 정확히 40년 만에 어느 분의 목소리를 다시 듣는 기회가 있었다. 그 분은 '50년만의 통화'라는 말씀을 하셨지만, 50년 전에 통화를 한 사실은 없고(나로서는 전화가 뭔지도 몰랐던 시절이고), 다시금 '전화 통화'를 한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이 아닐 터였다. 내 세월이 어느덧 50대 중후반임을 아시면서 대략 반세기 정도의 긴 세월이 흘렀음을 직감하신 나머지 그런 표현을 하셨을 것이다.


(어쩌면 내가 성인이 된 후로는 처음으로 접해보시는 음성이고 대화여서, 그 분이 '처음'이라는 뜻을 강조하시기 위해 그런 표현을 하셨는지도 모르겠고….)

통화를 끝내고 세월을 헤아려보니 정확히 40년만이었다. 그래서 이 글의 제목을 처음에는 '∼40년만의 통화'로 정했다가, 아무래도 그 분의 표현대로 '∼50년만의 통화'로 하는 것이 세월 질감을 더 짙게 안겨 줄 것 같아서(내 스스로 세월을 재촉하는 소행은 아닐 듯싶어서) 40이라는 숫자를 50이라는 숫자로 바꾸었다.

하여간 50년만의 통화로 바람같이 흘러간 그 긴 세월을 건너뛰어 다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분은 현재 논산시 상월면에 있는 '성모의 마을'에서 생활하고 계시는 오일복(요한) 신부님이시다.

천주교 사제들은 (각 교구마다, 그리고 상황에 따라 조금씩 다르겠지만) 대전교구의 경우 대개 65세가 지나면 사목 일선에서 은퇴한다. (주교들이 만 75세가 지나면 교구장 직에서 물러나는 것은 모든 교구가 똑같다) 본당 주임이나 교구청, 교회 기관의 책임자 직무에서 물러난 은퇴 사제들은 수도원이나 요양원, 교회에서 운영하는 사회복지 시설 등에서 여생을 보낸다.

이미 오래 전에 사목 일선에서 은퇴하신 오일복 신부님이 현재 머물고 있는 논산시 상월면의 '성모의 마을'은 중증장애인들을 수용하고 있는 곳으로 대전교구에서 운영하고 있는 32개 사회복지시설(이중에서 장애인 시설은 4개) 중의 하나다. 그러니까 오일복 신부님은 은퇴 후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어려움이 많은 중증장애인 시설에서 중증장애인들을 뒷바라지하며 여생을 보내시는 것이다.


내가 오일복 신부님께 전화를 드린 것은 특별한 까닭이 있어서였다. 신부님은 내가 적을 두고 있는 태안천주교회와 특별한 인연을 가지고 계신 분이다. 천주교가 1956년 태안에 처음 전파된 이래 1957년 최초 건물인 강당을 짓고 공소 예절을 시작한 후 1964년 사제가 상주하는 본당으로 승격될 때까지 7년 동안 모(母)교회인 서산 동문 성당의 주임 신부로 계셨던 분이다.

태안교회의 최초 건물인 강당(친교실)과 두 번째 건물인 사제관은 모두 오일복 신부님의 '작품'이다. (천주교 사제들은 외국인이든 한국인이든 거의가 건축에 대한 나름의 식견들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신부님은 비가 오거나 눈이 오는 날을 제외하고는 주일마다 태안 공소엘 오셨다. 오전에 서산 본당에서 미사를 지내시고 나면 곧바로 태안으로 오셨는데, 교통수단은 오토바이였다. 신부님의 오토바이는 태안 사람들이 태안 땅에서 최초로 볼 수 있었던, 자동차보다도 더 멋지고 신기한 물건이었다. 또 신부님은 태안 사람들이 태안 땅에서 최초로 본 서양인이기도 했고….

주일에 공소에 모인 신자들은(정갈하게 흰 한복을 입은 이들이 많았다) 신부님이 오실 때쯤이 되면 모두 강당 옆 마당에 서서 남동쪽의 먼 신작로를 바라보았다. 지금은 건물들이 많아져서 보이지 않지만, '잎담배수매소' 목조건물(지금은 없음) 옆으로 휘우듬히 뻗은 낮은 고갯길이 높은 지대에 위치한 공소 마당에서는 훤히 보였다.

이윽고 먼지 꼬리를 달고 그 신작로에 신부님의 오토바이가 나타나면 신자들은 지레 반색을 하면서도 긴장하는 표정이 되었다. 신부님을 영접할 어른들 몇 분만 강당 앞에 남고 모두는 서둘러 안으로 들어가서 미사 준비를 하거나 성사 볼 준비를 했다.

비포장도로 50리 길을 오토바이를 타고 달려오신 신부님은 신자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서둘러 '고해방'으로 들어가서 고해성사를 주시고 미사를 지내셨다. 미사 후 특별한 일이 없을 때는 곧바로 본당으로 돌아가셨는데, 공소 신자들에게 점심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뜻이었다.

유난히 푸른 눈과 날씬한 코, 노란 머리칼과 큰 키를 지니신 미남형의 신부님은 한국말이 참으로 유창했다. 한국 사람이나 다름없었다. 한문 지식도 많으신 듯 강론을 하실 때는 사자성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했고 한국의 속담들도 많이 사용했다.

신부님은 외국어를 쉽게 익힐 수 있는 소질을 타고나신 듯하다. 그 당시는 신부님이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로 한국에 오신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로 생각된다. 그런데도 그토록 단기간에 한국 사람과 똑같이 한국말을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었으니….

(60년대 초 한동안은 '마 신부님'이라고 불린 서산 성당의 보좌 신부님이 태안 공소에 가끔 오셨는데, 역시 프랑스인으로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님이셨던 그 분은 끝내 한국말이 잘 되지 않아서 일찍 한국 생활을 포기하고 본국으로 돌아가셨다고 한다.)

나는 중학생 시절에 견진(성령으로 영혼을 성숙시키는 성사)을 서산 본당에 가서 대전교구 초대 교구장이신 원 아드리아노(프랑스인) 주교님으로부터 받았는데, 그 전에 오 신부님에게서 받은 견진 찰고(교리 시험)가 참으로 엄격했다. 밤낮 없이 '요리문답(要理問答)'을 외워야 했는데(365개 문답의 상당 부분을 외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신부님 앞에 홀로 무릎 끓고 앉아서 찰고 받던 때의 한없이 떨리고 긴장했던 기억이 지금도 아련하다.

그런 추억들과 50년 가까운 세월을 안고 신부님께 전화를 드린 것인데 또 한가지 까닭은 우리 태안교회가 올해 본당 설립 '40주년'을 맞았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4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인 '40년사' 편찬 작업을 하게 된 까닭이었다.

우리 태안 본당을 거쳐가신 역대 주임·보좌신부님들을 생각하면서 나는 우리 본당의 공소 시절 모교회인 서산 성당 주임이셨던 오일복 신부님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오 신부님께도 원고 청탁을 드렸다.

그런데 원고 청탁서만 한 장 덜렁 보내놓고 가만히 있어서는 도리가 아닐 터였다. 그래서 등기 우편으로 보낸 원고 청탁서를 신부님께서 받아보셨을 즈음에 전화를 드린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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