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정모 연재소설 <수메리안> 47

등록 2004.02.24 10:54수정 2004.02.24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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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아(테헤란 쪽)의 높은 산악지대를 지나 엑바타나(하마단)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닷새 후였다. 그러니까 대월씨국에서 출발한 지는 보름째가 되는 셈이다.

지형은 메디아에 들어서면서부터 달리지기 시작했다. 평지가 사라지고 험준한 산악지대가 이어지는가 하면 산머리마다 만년설이 덮여 있기도 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추위는 카스피 해 아래쪽 그 내륙보다는 덜했고, 행군에도 별 어려움이 없었다. 또한 계곡마다 물도 많아 야영에도 편리했다.

하지만 어제부터 또다시 지형이 바뀌기 시작했다. 만년설 산악지대를 벗어나자 갑자기 평탄한 사막이 펼쳐졌고, 그런가 했더니 별안간 크고 작은 붉은 텔(구릉)이 여기저기에서 블쑥불쑥 솟아 있는 것이었다. 그 모양도 완만한 구릉형식이 아니었다. 마치 큰 주발에 붉은 흙을 이겨 담아 그걸 다시 엎어놓은 듯이 바닥과 꼭지 점의 너비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게다가 그 토질 또한 흙이 아닌 돌이었다.


해가 서쪽으로 두세 발쯤 기울어갈 때였다. 그즈음 군사들은 평지를 통과하고 있었다. 어쩐 일인지 이곳은 텔 하나 없었고 사방으로 그저 메마른 모래흙만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말도, 사람들의 걸음걸이도 몹시 지루하고 따분해보였다. 차라리 텔이라도 있으면 힐끔거리기라도 할 텐데 이건 사방이 같은 색인데다 또 텅 비어 있었다.

그렇게 한참 걸어왔을 때였다. 천 미터쯤 전방에 아주 큰 텔 하나가 불쑥 솟아 있었다. 다른 텔보다 다섯 배쯤은 더 높아보였고 생김새도 달랐다.

"저 돌산이 바로 비시툰(베히스툰) 산입니다."
제후가 옆으로 다가들며 산 이름을 알려주었다. 에인이 되물어보았다.
"단 한 봉우리로 우뚝 서 있는데 저것은 텔이 아닌 산입니까?"
"예, 산입니다. 이 근방에서는 유명한 산이지요."
"유명하다면 그 특징은 무엇입니까?"
"저 산을 일명 안내 봉이라고도 하는데 사방 5십리 밖에서도 저 봉우리를 따라오면 길을 잃는 일이 없습니다."

"가는 사람, 오는 사람 모두 다 저 봉우리를 표적으로 삼습니까?"
"그렇습니다. 특히 대상들에겐 아주 중요한 곳이지요. 그들이 어느 방향에서 오건 모든 대상들이 저 앞을 거쳐 갑니다. 동서남북, 어느 쪽에서 오든 말입니다. 또 대상들은 서로 물물교환도 그 앞에서 하거나 다음 만날 약속장소로도 그곳을 이용하지요."

에인은 다시 그 산을 살펴보았다. 산 모양은 조개를 세워놓은 듯했고 봉우리는 뾰족뾰족한 톱날이었다. 게다가 산 전체가 커다란 바위일 뿐 나무 한그루 보이지 않았다.


"내가 알기로, 산이라면 나무도 물도 있어야 하는데 여기서는 저렇게 돌덩이를 가지고도 산이라고 하는군요."
"여기서도 산이라고 하면 물이 있다는 뜻입니다." "하다면 저 산에도 물이 있습니까?"
"예, 안쪽으로 물이 흐르는 작은 계곡도 있습니다."

물이 있다면 야영하기에 맞춤한 곳이다. 또 그 앞이 평지라 천막을 친다면 산이 밤바람을 막아줄 것이다. 에인은 해를 보았다. 앞으로 30리는 더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에인은 그 앞에 머무르고 싶었고 그래서 제후의 생각은 어떤지 먼저 물어보았다.


"우리가 저 산앞을 지나간다면, 30리쯤 앞에도 야영할 만한 마땅한 장소가 있습니까?"
"아니오, 물이 있는 곳은 없습니다. 오늘은 그만 저기서 야영을 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제후가 먼저 그렇게 말했다. 늘 재촉만 하던 사람이라 뜻밖이었지만 에인은 그의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여 강 장수에게 지시했다.
"오늘은 저 산 앞에서 쉽시다!"
에인이 그렇게 지시를 내린 후 천리마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천둥아, 우리가 먼저 저 산으로 달려가 보자."

그 말이 떨어지기가 바쁘게 천둥이가 달려 나갔다. 한없이 걸어만 오느라 주니가 들었던 천둥이도 이제야 기회를 만났다는 듯 신바람을 내며 비호같이 달렸다. 그 천리마도 참 희한한 녀석이었다. 겨우 보름째 함께 지내는 것이건만 녀석은 벌써 그의 말을 전부 알아듣고 즉시 움직여주는 것이었다.

숨을 열 번도 쉬지 않은 것 같았는데 어느새 천둥이는 산 앞에서 멈추어 섰다. 그 산이 바로 베히스툰의 바위 암벽이었다. 그 암벽은 하마단에서 케르만샤 쪽으로 가다보면 사막 한가운데 우뚝 솟아 있는데 그 높이만도 500미터나 되는 거대한 바위산이었다.

에인은 천천히 그 둘레를 돌아보았다. 정면이 둥근 얼굴처럼 넓고 판판한 바위였고 그 양옆으로는 두 손으로 그 얼굴을 감싸듯 뾰족 산으로 치솟아 있었다. 물줄기는 바위들이 서로 포개진 틈서리에서 흘러내렸다. 나무 한 그루 없는데도 어디서 그런 물이 내려오는지 참 신기한 일이었다.

에인이 바위산을 올려다보고 있을 때 제후의 낙타도 어느새 그의 옆으로 다가와 섰다. 아마 낙타를 때려가면서 그렇게 따라왔을 것이었다. 요즘 들어 제후는 부쩍 에인이 곁으로만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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