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정모 연재소설 <수메리안> 48

등록 2004.02.25 09:43수정 2004.02.25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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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습니까. 이곳은 동방의 산수와 영 다르지요?"
제후가 자기도 에인을 따라 산 꼭지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런 것 같습니다."
"이 지역의 군주들은 저 바위를 보면서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성을 세우고 싶어 한답니다. 그런데 장군님은 무슨 생각부터 드셨는지요?"

"성이라구요? 저 위에다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저 위에다 성을 올리기에는 산이 너무 높고 또 바위를 파서 방을 들이기에는 그 공사가 더 큰일이겠습니다."
"이 근방에는 그렇게 사는 호족들이 더러 있습니다. 물론 이 산보다 낮고 규모도 적은 텔이지만요."


"여긴 구릉도 아닌 산이고, 또 멀리서도 볼 수 있을 만큼 높고 판판한 정면을 가지고 있는데…."
"큰 국가라면 멋진 궁성도 세울 수 있겠지요."
"글쎄요, 저라면 저 얼굴에다 우리의 역서를 새겼으면 좋겠다 싶습니다.(주=그로부터 2500년 후 다리우스 대왕을 선두로 이 마애 산에 자신의 치적과 전승에 대한 이야기를 몇 개의 언어로 새겼다.)

"그것도 좋으신 생각입니다."
"아니면 팔괘를 그려 동서남북을 표시하든가…."
그러자 제후가 불쑥 에인의 의사를 물어왔다.
"어떻습니까? 우리 한번 올라가보지 않으시렵니까?
"이 산을 말입니까?"
"예…."
"가파를 것 같은데요?"
"나도 올라가보진 않았지만 저 계곡 틈서리로 오르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제후는 먼저 낙타에서 내렸다. 에인이도 못 올라갈 것도 없다 싶어 말에서 내렸다. 그들은 말과 낙타만 남겨둔 채 오른쪽 뾰족 바위 쪽으로 갔다. 그 뾰족 바위와 본채의 바위는 겹쳐져 있었고 물은 그 속에서 흘러내리고 있었다.

제후가 먼저 그 암벽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그가 사람 한 키쯤 올랐을 때 에인도 그 뒤를 따랐다. 약 백미터 정도는 표면이 거칠고 잡을 것도 있어 그런대로 올라갈 수 있었으나 그 위부터는 물줄기가 가까워지면서 손바닥이 미끈거렸다.

"이제 그만 올라가지요."
제후가 말한 후 옆쪽으로 더듬어가더니 자리를 잡고 앉았다. 마침 거기에는 돌출 바위가 길게 놓여 있었다.
"그 끝자락에 걸터앉으십시오."


에인이 자리 잡고 앉는 사이 제후는 벌써 전망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서도 경치가 좋군요."
제후가 말했다. 그러나 거기엔 그 어떤 경치도 없었다. 보이는 것이라곤 오직 사방이 텅 비어 있는 듯한 사막일 뿐이었다. 한데도 제후의 얼굴에는 마치 근사한 장면이라도 보고 있는 듯이 미소까지 피어올랐다. 자기 고장이 가까워지고 있어서 그런지도 몰랐다.

에인은 이제 그에게 '딛을 문'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가능하면 상세히 알아두어야만 참작하기도 좋을 것이었다. 한데 에인이 막'그곳 인구는 얼마나 되느냐'고 물어보려는 순간 제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장군님, 선비국의 선비산(鮮卑山)을 아시는지요?"
목소리까지도 영 달랐다. 제후의 풍모에는 상상도 안되는 감회어린 음성이었다. 에인이도 그 목소리의 따라 나직이 대답했다.
"이름만 들었습니다."
선비국은 중원 남쪽에 있는 환족의 나라였다.

"선비산은 각종의 유실수가 많아 과일이 풍다 하고, 남쪽에는 갈석과 안문의 넉넉함이 있고, 북쪽에는 대추와 밤이 많아 백성이 비록 농사를 짓지 하지 아니하여도 그 열매만으로 식량이 풍족하다고 했지요."
"그것까지는 듣지 못했습니다."
"나도 사실은 선비 산을 잘 모릅니다. 그저 제 아버지께 들은 풍월이지요."

"아버님은 선비 국에서 사셨습니까?"
"아닙니다. 제 아버님은 딜문의 구승전사(口承傳師)였습니다."
"딜문이라면 거긴 또 어디에 있는 나라입니까?"
"참 잊고 미리 말씀드리지 않았군요. '딛을 문'을 여기서는 딜문이라고 부른답니다.
"그럼 '딛을 문'이 줄여져서 딜문이 된 것입니까?"

"예, 그런 셈이지요. 처음 유목민과 대상들이 이곳에 왔을 때는 환족이라면 누구든지 딛고 들어오라는 뜻에서 '딛을 문'이라고 이름을 붙였답니다. 한데 세월이 흐르면서'딜문'으로 변했고 또 주변 종족들도 그렇게 부르고 있답니다."
"그랬군요. 그래서요?"

"나라가 큰 모국에서야 사록담당자가 따로 있지만 우리 같은 제후국에서는 구승전사가 그런 일을 대신하지요."
"그럴 테지요. 환족이 글을 만들어내기 전에는 구승전사가 사록 전부를 담당했고, 지금도 작은 성읍 국에는 그런 분이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한데 여기에서는 구전뿐만이 아니라 교화스승의 역할까지 해서 아주 존경을 받습니다."

"당연히 그럴 테지요."
"게다가 딜문의 제후는 주민에 의한 선출이나 모국의 지명으로 가끔 바뀌기도 하지만 구승전사만은 죽을 때까지 그 자리를 지킬 수 있어서 더욱 그러하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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