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정모 연재소설 <수메리안> 57

등록 2004.03.17 15:34수정 2004.03.17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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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다. 자신의 말은 그 토성을 뛰어넘을 수 있다 해도 다른 기병들의 말은 그렇지 못했다. 에인은 일단 흥분을 가라앉히고 대신 걸음을 빨리했다.

마침내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 도착했다. 지키는 사람도, 대문도 없었다. 그저 사람과 마차들이 드나들 수 있도록 널찍하게 뚫려 있었고, 양 옆에 나무 기둥을 세워둔 것으로 그곳이 정문임을 알릴뿐이었다. 그것은 제후가 다스릴 때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그 기둥 위에 전에 없던 토우가 걸려 있었으나 그들은 어두워서 잘 볼 수가 없었다.


"자, 이제 신호를 보내시오."

에인이 명령을 내렸다. 안내선인이 가슴 속에 넣어온 불씨를 꺼내 솜에 불을 붙였고 명궁선인이 준비한 화살 끝에 그 불길을 달아 하늘높이 쏘아 올렸다. 좌 우군에게 진격하라는 신호였다. 화살은 직선으로 높이 솟아올랐다. 주시만 한다면 50리 밖에서도 보일 것이었다.

기병들은 모두 숨을 죽이고 동서쪽 하늘을 주시했다. 한동안 응답이 없었다. 아직 도착하지 않았거나 중간에 장애물을 만났는지도 몰랐다. 기병들 사이에 더운 입김이 휘돌기 시작할 때 마침내 서쪽 하늘에서 불화살이 치솟아 올랐다.

"저기 동쪽도…."

거기서도 응답이 왔다. 모두 소리 나지 않게 안도의 숨을 쉬었다. 그리 긴 시간이 아니었음에도 어떻게나 긴장을 했던지 군사들의 겨드랑이는 땀으로 젖어들었다. 어쨌거나 이제 곧 출격 명령이 내려질 것이었다. 군사들은 말고삐를 틀어쥐고 명령을 기다렸다.


그러나 에인은 서두르지 않았다. 멀리 떨어져 있는 보병들이 마을 가까이로 접근하는 데는 다소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그는 그렇게 정황판단을 하고 느긋이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했음에도 왠지 자꾸만 조급증이 일어났다. 어서 움직이고 싶어진 것이었다. 그는 자신을 타이르기 시작했다.

'앞서가는 마음을 조종하지 못한다면 정확한 작전은 치를 수 없다.'


그는 깊이 한번 숨을 들이쉰 후 속으로 셈을 헤아리기 시작했다. 5백까지 헤아리면서 그렇게 기다릴 예정이었다. 하지만 조급증이 그에게 더 이상의 인내를 주지 않았다. 당장, 당장, 하는 생각이 자꾸만 심장박동을 재촉했다.

처음 임하는 전투요 정벌이었다. 비록 어릴 때부터 전투놀이에 흥미를 가져본 적은 없었다 해도 지금 자기에게 주어진 임무가 새로운 용광로가 되어 그의 온몸을 불태우기 시작한 것이었다.

"준비!"
에인이 명령을 내렸다. 겨우 2백을 헤아렸을 때였다. 군사들 역시 초조하게 기다렸던지 모두 재빨리 말 등에 올랐다.

"여기서 수장의 집까지는 거리가 꽤 길다. 출발은 도보로 시작한다!"

기병들은 다소 맥이 빠졌다. 당장 달려가라는 명령이 떨어질 줄 알았는데 말을 타고도 걸으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편은 대견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린 장군은 매우 흥분한 것 같고 그 목소리도 격앙되어 있음에도 그 작전에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다 싶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만약 지금부터 말을 달리게 한다면 적들은 그들의 기습을 알아채고 대응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그 기회라는 것이 결국은 오십보, 백보 차이라 해도 기습은 아무 번거로움 없이 단숨에 이루어지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에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병들도 조용히 그 뒤를 따랐다. 마을 초입으로 들어섰다. 저만치 길 왼편으로 수장의 집 불빛이 보였다. 그때 남녀 두 사람이 길을 따라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지껄이면서 올라오다가 별안간 우뚝 멈추어 섰다. 낌새를 알아챈 것 같았다.

그들이 황급히 등을 돌려 내달릴 때 누가 쏘았는지 화살이 날아갔고 두 사람은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그때 에인이 말에 박차를 가하면서 급하게 소리쳤다.
"출격!"

말들이 달리기 시작했다. 별안간 말발굽소리가 온 천지를 흔들었다. 뿐만 아니었다. 선인들과 기병들은 달리면서도 불화살을 날렸다. 수장의 집뿐만 아니라 사방의 주거지역을 향해 쉼 없이 쏘아댔다. 어차피 주민들은 말발굽소리에 놀라 달려 나올 것이었다. 무기를 잡거나 수장의 집으로 달려가기 전에 자기 집 불에 먼저 붙잡아 둘 필요가 있었다.

곧 기병들은 수장 집을 포위했다. 그들은 빙 둘러서서 화살을 겨누고 문 쪽을 주시했다. 지붕에서 불길이 치솟았고 그 불길이 옆으로 번지고 있음에도 아직 아무도 뛰쳐나오는 사람이 없었다. 그때 안내선인이 알려왔다.

"저길 보십시오!"

돌아보니 곡식창고가 있다는 그쪽에서 수많은 남자들이 무기를 들고 고함을 지르면서 몰려오고 있었다. 에인이 속으로 탄식을 했다.
'5백을 세고 출발했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것을….'

그러나 탄식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는 태어나서 가장 큰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적들은 칼만 들었다. 화살로 공격하라!"
화살이 날아가도 다가드는 적들이 많았다. 에인이 다시 소리쳤다.
"접근전이다! 창, 창을 사용하라!"

역시 정예 군사들이었다. 선두 기병들은 창을 들고 적들에게 그대로 뛰어들었고 적들은 칼 한번 사용해보지 못한 채 말발굽에 나동그라지고 있었다. 뒤에서 밀고오던 적들도 주춤주춤 물러나기 시작했다. 이제부터는 기병들이 알아서 처리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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