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정모 연재소설 <수메리안> 60

등록 2004.03.22 16:30수정 2004.03.22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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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선인은 깜박깜박 졸면서도 말발굽소리를 들었다. 그는 가죽 상대를 둘둘 감고 마차 바퀴에 기대어 밤을 지새웠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잠잘 곳도 없을뿐더러 언제 움직이게 될지 알 수 없어 마차 밑으로 들어가 있을 수도 없었다.


처음 출격개시를 알리는 신호불이 하늘로 치솟는 것을 보았을 땐 자신들도 곧 마을도 들어가게 될 줄 알았다. 하지만 그 누구도 달려와서 전승을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다. 점점 추위가 엄습했고 나중에는 뼛골까지 아팠다. 바람은 없었지만 추위는 대단했다.

말발굽소리가 점점 가까워져왔다. 그는 걸쳤던 옷들을 털어내고 벌떡 일어났다. 저만치서 에인이 말을 타고 안내선인과 함께 달려오고 있었다.

"장군님이 아니십니까?"

옆 마차에 기대 있던 군사가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 만약 승전을 알리러 오는 것이라면 장군이 직접 올 필요가 없었던 때문이었다. 그 역시 예사롭게 여겨지지 않아 달려오는 말을 유심히 살폈다. 한데 천둥이의 앞발에는 생기가 출렁거렸다. 그 말이 보여주는 것은 승리의 징표였다. 승전이 틀림없었다.

"승전이오! 장군께서 그 기쁨을 직접 알리고 싶어 몸소 오시는 것이오!"


에인의 말이 다가오자 일행들은 일제히 환성을 지르며 그를 맞았다. 에인이 말에서 내리며 물었다.

"벌써 누가 승전을 알려주었소?"
책임선인이 천둥이의 고삐를 받아 쥐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우리에게 소식을 가져오신 분은 장군님이 처음이십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승전한 걸 아셨소?"
"천둥이가 달려오는 품을 보고 알았지요."
"그래요? 천둥이가 그새 못 참고 미리 고자질 했구려. 그렇소, 수장이 달아난 바람에 잠깐 어려웠지만 기병들이 그들을 깡그리 되잡아 들였소. 그래서 평정이 좀 늦어진 것이오."

에인이 그렇게 설명을 한 후 책임선인에게 쌀 한 자루와 소금에 절인 고기와 말먹이용 건초 한 포대를 준비하라고 일렀다. 책임선인은 금방 알아차렸다. 안내선인을 대동한 것으로 보아 지금 그를 어디론가 보낼 모양이었다.

'그런 일이라면 나에게도 의논하는 게 좋을 텐데….'
책임선인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말없이 식량마차로 가서 쌀과 건초포대를 가져다주었다.

"우선 이걸 말 등에 실으시오."
에인은 그것을 안내선인에게 넘기며 말했다. 안내선인은 다소 의아한 얼굴로 그 짐들을 받아 실었다. 그는 아직 자기가 왜 여기까지 따라왔는지 알지 못했다. 식량과 건초가 필요해서 여기까지 왔다면 마차 전부를 마을로 이끌어 가면 될 일이었다. 한데 많은 양도 아닌 한말의 쌀과 건초는 어디에 필요한 것일까…. 그때 에인이 책임선인에게 말했다.

"이제 모두 마을로들 가시오."

그래놓고 에인은 다시 자기 말에 올랐다. 책임선인이 에인에게로 다가가 잠깐 그의 다리를 잡았다. 그에게 알려줄 필요가 있었다. '장군님에게는 어떤 경우에든 필요가 될 사람들이 주위에 있습니다.'책임선인은 나직이 입을 열었다.

"장군님, 저에게는 태왕께서 맡기신 재물이 좀 있습니다. 장군님이 필요할 때 드리라고 하셨는데…."
"무슨 말이오?"
"지금 돈은 필요하지 않으십니까?"
"아니오, 필요 없소. 선인께서는 내 함만 잘 챙기시면 됩니다. 그럼 다녀오겠소이다."

에인은 말을 툭 차면서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돈은 자신의 주머니에도 있다. 별읍장 집에서 아버지가 챙겨주신 국제화폐였다. 그것은 전령을 띄울 때만 쓸 수 있고 그나마 많이 주어서도 아니 되었다. 괜히 도적들의 표적이 될 수 있고 한번 표적이 되면 후발자에게도 장애가 따르기 때문이었다.

한마장쯤 달려온 뒤에야 에인이 문득 걸음을 늦추었다. 해가 떠올랐다. 붉은 해가 바로 눈앞에서 벙긋벙긋 웃고 있었다. 승전을 축복하는 모양이었다. 그는 온 가슴으로 그 해를 안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태왕마마 소인 임무 완수하였나이다. 딜문을 정벌했나이다. 이제 그 소식을 알릴 전령을 보내오니 기뻐하소서….'

그는 뒤이어 천신들에게도 기도를 올렸다. 돌아가면 다시 소도에 올라 전례가 없을 만큼 큰 제례를 올리겠다는 약속도 했다.

"이제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여쭤도 되는지요?"
그때 옆에서 묵묵히 따라오던 안내선인이 입을 열었다.

"그렇군요, 선배…."

에인이 대답했다. 안내선인을 선배라고 호칭한 것은 교화방 선인으로서 까마득한 선배이기도 했던 때문이었다. 에인이 뒤를 이었다.

"이제부터 선배는 대월씨국으로 가야합니다."
"전령입니까?"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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