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소설] 호랑이 이야기 12

은행나무로 가는 길 1

등록 2004.04.12 01:11수정 2004.04.12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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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바리는 도봉산에 있었습니다. 겨우 점심 때쯤 되었는지 해가 아직도 중천에 떠있었습니다. 저 아래 쪽에 집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이제 어디로 가야하는데? 저 아래로 내려가면 사람들이 너를 전부 보게 될 텐데, 그러면 경찰 아저씨들이 올거구. 어떡하지?"
"내가 가방으로 변해 있을 테니까, 날 메고 다니면 돼."
"가방?"


바리는 다시 웃음이 피식 나왔습니다. 저런 덩치의 호랑이가 가방이 되면 얼마나 크고 무거울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백호는 말했습니다.

"바리야, 너 혹시 이 근처에서 장승을 본 적 있니?"
"장승? 그게… 뭐지?"
"나무를 사람 모양으로 깎아 만든 건데, 거기 한문으로 이런 글이 써있는 거 보지 못했니?"

백호는 손톱으로 흙에 천자대장군이라고 썼습니다. 잠시 곰곰히 생각하던 바리는 생각난 듯 말했습니다.

"나 알아. 거기 가서 찾아보면 돼."

그 말이 끝나자마자 호랑이는 정말 깜찍한 가방으로 변해 버렸습니다.


바리가 백호를 등에 메고 찾아간 곳은 인사동이었습니다. 가게를 여기저기 기웃거려서 백호가 말한 것과 비슷한 물건을 찾아내었습니다. 그런데 백호를 다시 어떻게 불러야할지 몰랐습니다.

바리가 고민하고 있던 차에 가방이 된 호랑이가 작은 소리로 말했습니다.


"바리야, 그 장승이 어디에 서 있는데?"
"저기 봐, 저기 굉장히 많잖아!"

바리가 가리키는 곳은 기념품 가게의 선반 위였습니다. 조그마한 장승 등이 자그마하게 만들어져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가방 안에서 "푸"하는 한숨이 새어나왔습니다.

"바리야, 우리가 찾는 건 저런 게 아니야. 저 주인 아저씨한테 가서 저 진짜 장승들을 어디로 가면 볼 수 있는지 한번 여쭤 봐."
"웅…… 저게 아니야?"

바리는 금세 귀찮아졌는지 입술을 삐쭉거렸습니다. 머리가 반 정도 벗겨진 주인 아저씨는 바리가 부르기도 전에 나와서 물었습니다.

"얘야, 혼자서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하니?"

바리가 퉁명스런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아저씨, 저 장승들 진짜 아니죠?"
"진짜가 아니라니 무슨 소리야?"
"호랑이가, 아니 제 친구가 그러는데, 저건 아니래요."

바리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이 말했습니다. 난데없이 나타나 울음을 터뜨리려는 아이를 보고 당황한 아저씨는 놀라 말했습니다.

"아이구, 얘야, 울지 말고 차근차근 말해 봐. 너 진짜 장승을 보고 싶다는 이야기냐?"

"맞아요, 어디에 가면 진짜가 있어요? 여기 인사동 다 거짓말 투성이야. 진짜도 아니면서 팔구."

아저씨는 기가 막혔지만, 마음을 가다듬고 말했습니다.

"꼬마야. 여기 서울에는 진짜 장승이 없어, 아마 여기서 버스 타고 두시간은 가야할거야. 저것들은 가짜가 아니고. 참 내, 외국인들이 기념품으로 사가라고 조그마하게 만들어 놓은 거야, 진짜 장승은 무거워서 비행기에 실을 수도 없을거야."

그 아저씨의 말을 듣고 물어 물어 찾아간 곳은, 버스를 타고 두시간이나 가야했습니다. 도시 몇 개를 지나고 산 몇 개를 지나자, 추수를 끝내고 앙상하게 얼어붙은 논바닥들이 펼쳐졌습니다. 그리고 자그마한 집들이 아담하게 모여 있는 시골 마을 입구에서 바리는 마침내 커다란 장승을 만났습니다.

하지만 대체 그 장승으로 뭘 할 수 있다는 말일까요? 크기만 커다란 나무 조각은, 걸어다니는 것도 아니고, 무슨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 백호는 다시 호랑이의 몸으로 돌아와 바리 곁에 서있었습니다.

호랑이가 장승 곁으로 다가가 그 위에 씌여있는 글자들을 앞발로 어루만졌습니다. 그러자 까르르 하고 웃는 소리가 났습니다.

"에구, 간지러워. 그만 그만…"

바리는 놀랐습니다. 장승이 허리를 젖히고 웃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에, 호랑이란 놈이 내 허리를 간지럽히는게 정말 몇 백년만인지 모르겠다. 아이구, 그만 해라. 이놈아."

그러자 옆에 있던 장승이 눈을 뜨고 고개를 옆으로 돌려말했습니다.

"어머나, 하얀 호랑이 아냐, 하얀 호랑이. 분명 백두산에 사는 놈일텐데 어떻게 여기를 왔을까?"

백호는 고개를 까닥 숙여 인사를 하고 말했습니다.

"산신의 명령을 받고 이 바리와 함께 여행을 하고 있습니다."

두 장승은 고개를 돌려 바리를 쳐다보았습니다. 나무로 만든 몸은 늘어나는지 바리의 코 앞에 바로 얼굴을 들이밀고 오목조목 살펴보는 것이었습니다. 아줌마 장승이 말했습니다.

"이야기를 듣기는 했다만, 이렇게 조그만 아이가 그 일을 할 수 있을까? 난 또 무슨 힘센 아이인줄 알고 있었구만."

바리는 말했습니다.

"할아버지가 믿으면 된다고 했어요. 전 믿어요. 할 수 있을 거라구."

아저씨 장승은 말했습니다.

"어째 목소리가 기어들어가는 게 하나도 안 믿고 있는 것 같네 그려."

그러면서 두 장승은 또 깔깔 대고 웃었습니다. 바리는 기분이 나빠졌습니다. 호랑이가 말했습니다.

"염려마, 장난을 좋아하셔서 그래, 네가 귀여우니까 그러시는 거야."

바리는 여전히 입을 삐죽거렸습니다. 호랑이는 장승에게 물었습니다.

"이 마을에 혹시 당수 나무가 있나요?"

아저씨 장승이 잠시 생각하다 말했습니다.

"이 마을엔 없네. 그게 저 언덕배기에 하나 있었는데, 거기에 건물을 지으면서 뿌리를 뽑아버렸지. 그런데 저 산 너머에 가면 은행나무가 하나 있는데, 내 기억에 거기에서 당제를 지내곤 했었어."
"그래요 ? 그럼, 그쪽으로 당장 가봐야겠군요."

그러자 아줌마 장승이 말했습니다.

"벌써 가려구? 맨날 잠만 자다가 겨우 일어났는데, 말이야. 이제 우리 깨우러 오는 사람도 없고 얼마나 지겨운지 아나? 이 영감 얼굴만 보고 사는 것도 지겨워 죽겠단 말이야. 까치들도 요즘엔 근처에 얼씬도 안하고. 이 영감이랑 뭔가 이야기 좀 해 달라고 치면 말 많은 할망구라고 욕만 해대지. 요즘엔 아무도 우리를 찾아와 주는 사람이 없어요."

아줌마 장승이 옆을 보고 눈을 흘겼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꼭 들려서 많이 이야기해 드릴게요."

호랑이는 고개를 숙여 인사한 후 다시 가방이 되어 바리의 등에 업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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