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산대놀이 31

애향이

등록 2004.04.14 17:50수정 2004.04.14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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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또리 져 귀또리 어여쁘다 저 귀또리 / 어인 귀또리 지는 달 새는 밤의 긴소리 절절이 슬픈 소리 저 혼자 울어예어 사창에 여윈 잠을 살뜨리도 깨우는구나. / 두어라 제 비록 미물(微物)이나 무인동방(無人洞房)에 내 뜻 알 리는 저 뿐인가 하노라.

기녀(妓女)애향이는 마루에 앉아 무표정한 얼굴로 시조를 읊었다. 아무래도 창기(娼妓)가 아니었기에 노랫가락이 구성지진 못 했지만 그런 데로 애절하고도 간드러진 소리가 들을 만 하였다.


"에이, 이년아! 이제서야 초여름이 오는데 무슨 놈의 귀뚜라미냐 귀뚜라미는! 담뱃불이나 붙여다오!"

행수기생(行首妓生 : 기생 중 우두머리)인 윤옥이 담뱃대를 흔들며 타박을 하자 애향이는 입을 삐죽거리며 품속에서 부싯돌을 꺼내어 들었다.

"으이그! 이건 뭘 시켜 놓으면 싫다는 기색이 얼굴에서부터 드러나니! 저러니 반반한 낯짝에도 겨우 꼬여드는 남정내들이 하나같이 여자라면 무조건 사족을 못쓰는 놈들 밖에 없지. 글쎄 첩으로 들여앉히겠다고 양반내들이 사정을 하는데도 거부하는 년은 처음 본다니까."

애향이는 윤옥의 거친 입담이 듣기 싫어 자리에서 일어나 뒷간이라고 가려는 시늉을 보였다. 그때 헛기침 소리와 함께 다홍색 도포를 입은 종사관 박교선이 천천히 들어섰다.

"아이고~ 누구요! 박종사관 아니시옵니까? 참으로 오래간만이옵니다."


윤옥은 뻑뻑 피던 담뱃대를 잽싸게 내려놓고는 만면에 웃음을 띄운 채 박교선을 맞이했지만 애향이의 표정은 더욱 찡그려졌다.

"허허허...... 애향이는 잘 있었는가?"


"에구 에구 오자마자 애향이부터 찾네. 애향아! 가서 술상 좀 차려오너라! 그런데 그간 여기 드나들지 못해 좀이 쑤셔 어떻했수?"

박교선은 천천히 방안으로 들어서며 수염을 쓰다듬으며 냉수한잔을 쭉 들이켰다.

"아 말도 말게 조정에서 무슨 심통으로 양반내들의 기방출입을 막았는지 원...... 얼마 지나지 않아 유야무야 될 일인데 말일세."

이리저리 윤옥과 겉도는 얘기를 주고받던 박교선은 애향이가 술상을 차려 들어오자 낯 색부터 환하게 변했다. 눈치 빠른 윤옥은 적당한 핑계를 대며 서둘러 방문을 나서 버렸다. 애향이는 얼굴을 찡그리며 윤옥의 뒤를 흘겨보았다.

"거 찡그린 표정은 여전하구나. 매번 말하지만 그 모습이 서시(중국 춘추시대 월 나라의 미녀 찡그린 표정까지 뭇 여성들이 따라할 정도로 아름다웠다고 전함)같구나."

"매번 하는 얘기지만 서시를 직접 보기나 하고 하는 소립니까. 술잔이나 받으소서."

'허 고것 참.'

박교선은 속으로 쓴 입맛을 다시며 술잔을 받아들였다. 술에 취한 척 손을 덥석 잡아도 매정하게 뿌리치는 애향이었고 혹시나 어찌될까 싶어 잔뜩 술을 먹여보아도 결국에는 되려 자신이 술에 골아 떨어지는 등 빈틈을 보이지 않는 애향이었다. 그럴수록 우포도청에서도 난봉꾼으로 소문난 박교선의 마음속에서는 '어디 니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보자.'란 결심이 굳어질 따름이었다.

"아니 벌써 가시옵니까?"

박교선이 술 한 상만을 비운 채 방에서 나오자 윤옥은 인사치레가 아닌 진심으로 궁금해 물어보았다.

"허허...... 공사 다망하니 내 여기 오래 있을 수가 없네. 담에 또 뵙세."

박교선이 들어올 때처럼 헛기침을 크게 하며 나가자 윤옥은 재빨리 방으로 들어가 애향이를 나무랬다.

"이것아, 너 어떻게 대했기에 오랜만에 온 종사관께서 저토록 서둘러 나가시니?"

애향이는 얼굴을 찡그린 채 술상을 정리하며 박교선의 흉내를 내며 대꾸했다.

"허허허...... 공사 다망해서 그렇다지 않소?"

"에끼! 하여간 너 하루라도 빨리 기방에서 서방하나 잡지 않고 버텼다간 오월이 짝 날테니 명심해!"

"오월이 언니가 뭐 어떻다고 그러시오? 지금처럼 기방에서 일 잘하면 그만이지."

지지 않고 대꾸하는 애향이에게 윤옥은 질렸다는 듯 고개를 훽훽 내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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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소설 '고주몽', '홍경래의 난' '처용'을 내 놓은 작가로서 현재도 꾸준한 집필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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