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상 시인에 대한 추억

등록 2004.05.22 12:11수정 2004.05.22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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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일 한국 문단의 큰 나무이신 시인 구상 님께서 별세하셨다. 그분의 별세 소식과 함께 그분에 관한 이런저런 사항들이 여기저기에 많이 소개되었으므로 여기에서는 다시 소개하지 않기로 한다.


나는 그날 강화도에 있었다. <한국소설가협회>의 행사에 참여한 까닭이었다. 행사가 끝난 후에도 그 날 밤을 선배 작가 두 분과 함께 강화도에서 지내고 다음날 집에 내려왔는데, 옷차림도 그렇고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빈소 문상을 포기해야 했다.

태안에서 다시 서울로 올라가기도 어려운 일이고 해서 끝내 문상을 포기하면서 문상 대신 구상 선생님의 영혼을 위해 '위령미사'를 봉헌하기로 마음먹었다. 위령미사 한 번이 문상 백 번보다 낫다는 생각도 했다.

구상 선생님은 독실했던 천주교 신자로서 하느님 안에서 살다가 가신 분이니 위령미사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가톨릭 사상이 그의 문학정신, 예술세계의 기조를 이룰 정도로 신앙심이 깊으셨던 분이고 또 유명인이었던 만큼 그를 위한 위령미사는 여기저기에서 많이 이어질 터였다. 그래도 나는 내 이름과 정성으로 구상 님을 위한 위령미사를 하느님께 봉헌하고 싶었다.

그래서 구상 님의 별세 일주일 후인 지난 18일(화) 저녁에 우리 태안 성당에서 위령미사를 봉헌했다. 일주일 후에야 위령미사를 봉헌한 것은 지난주간에는 우리 성당에 '사제 피정' 관계로 신부님이 계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화요일은 평일미사를 신자들이 좀더 많이 참례하는 저녁에 지내기 까닭이었다.

미사를 지내며 잠시 구상 선생님과의 추억들을 떠올렸다. 1984년 여름 몽산포 해변에서의 하룻밤도 떠올렸고, 다음날 아침 태안읍내 뒷골목에서 선생님께 해장국을 대접해 드렸던 일도 떠올렸다.


선생님이 우리 태안 성당의 미사에 참례하시던 모습도 떠올렸고, 몇 번 선생님 댁을 찾아갈 적마다 큰절을 올리곤 했던 일이며, 1990년대 어느 해 <가톨릭문우회>의 송년 모임 자리에서 선생님의 시를 내가 암송해 드렸던 일도 떠올렸다.

미사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는 1996년에 출간된 <충남문학> 27집을 찾아서 펼쳐보았다. 그 책에는 「시와 해프닝」이라는 내 단편소설이 수록되어 있었다. 독자들에게 웃음을 많이 안겨 준 비교적 재미있는 소설인데, 다분히 사소설적인 내용이라서 나는 상업문예지 발표 쪽으로는 의지를 발휘하지 않고, 98년 <태안문학> 2집에 재발표를 했다.


그 소설에는 구상 선생님에 관한 부분이 있는데 오랜만에 그 부분을 다시 한번 읽어보니 20년 전의 추억이 몽산포의 파도처럼 아련히 밀려오는 듯했다. 여기에 몽산포의 파도소리가 들리는 듯한 그 부분을 소개해 본다.

1984년 여름을 나는 즐겁게 추억한다. 벌써 10년하고도 수년 전의 일이니 세월은 정말 유수와 같고 바람과도 같다.

그 해 여름 태안의 몽산포에서는 시 전문지 <심상>사에서 주관하는 '여름해변 시인학교' 라는 것이 열렸다. 교장은 황금찬 시인이었고, 구상 시인을 비롯한 많은 시인들이 몽산포를 밟았다.

나는 그때 나의 고향 땅에서 김남조 성찬경 성춘복 정진규 이근배 홍완기 시인이며 박동규 교수 등의 모습을 처음 볼 수 있었다.

당시에 고향 땅에서 <흙빛문학회>를 만들어 초창기의 기틀을 다지느라 애를 쓰고 있던 나는 우리 고향의 한 바닷가에서 해변시인학교가 열리게 된 것을 무척 고맙게 생각했다 모른 척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숙식 장소인 남면초등학교 정문 앞에다 환영 현수막도 하나 만들어 설치하고는 그들을 마중하고 함께 어울리고 배웅도 했다.

시인 구상 선생님과 함께 했던 하룻밤은 정말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나는 흙빛문학회를 함께 하는 가명현 신순희 김택수 채수호 등과 어울려 구상 시인을 밤 해변으로 모셨다. 바닷바람과 파도소리가 시원하기 그지없는 해변 모래톱 위의 한 술집에서 구상 시인께 회와 소주를 대접했다. 그리고 그분으로부터 많은 말을 들었다.

술기운으로 한결 동안(童顔)이 된 그분은 자신의 애송시라는 김소월의「산유화」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낭송을 한 다음 그 시 안에 담겨 있는 실로 무수한 말을 열렬하고도 일목요연하게 들려주었다. 나는 그의 노인 같지 않은 정력에 감탄했고, 시 해설의 치밀함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리고 나는 그분께 보답을 드리고 싶었다. 옛날 월남의 전쟁터에서 외운 시임을 전제하고, 그가 청년 시절에 지은 시인「길」을 낭송해 드리겠다고 했다. 그는 놀라며 무척 반가워하는 기색이었다.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분명한 발음과 걸음걸이로 「길」을 착실히 밟아나갔다.

이름 모를 귀향 길 위에
운명의 청춘이 눈물겨웁다
보행도 산술도…
통곡에도 피곤하고
역우(役牛)의 줄기찬 고행만이
슬프게 좋다
찬연한 계절이 유혹한다손
이제사 역행의 역마를
삯 낼 용기는 없다
지혜의 열매로
간선 받은 입설에
식기만을 권함은 예양이 아니고
노정이 변방이 이르면
안개를 생식하는 짐승이 된다
뭇 사람이 돈을 따르듯
불운과 고뇌에 홀리어
표석도 없는 운명의 청춘을
가쁘게 가다.


내가 낭송을 마치니 노 시인은 만면에 웃음을 짓고 박수를 쳤다. 자신이 해방 공간의 암울했던 시절 제2의 고향인 원산을 버리고 남하하기 직전에 지었던 그 청년 시절의 시를 남의 입을 통해 암송으로 들어보기는 처음이라고 했다. 그는 정말 어린애같이 즐거워하는 모습이었다.

나는 오랜 세월 한국 문단을 풍미하고 있는 정갈한 노 시인을 기쁘게 해 드린 것이 여간 즐겁고 보람스럽지 않았다. 내가 그의 시를 한 편 외우고 있는 것이 정말 다행스럽기 그지없었다.

열두 시를 넘긴 긴 시간 동안 노 시인은 조금도 피로한 기색을 보이지 않고 갯내음이며 흙냄새를 풍기는 젊은이들과 즐겁게 어울려 주었다.

적게나마 구성 선생님과의 추억들을 간직하고 있음을 기쁘게 생각한다. 또 한 토막이나마 구상 선생님과의 일을 기록한 글을 가지고 있음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한국 문단의 큰 인물이면서 감투 쓰는 일을 욕심내지 않았고, 가난하고 불우한 사람들의 처지를 따뜻이 살피는 시선을 늘 잃지 않으셨고,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인생의 참 가치와 궁극적인 목적을 향한 고뇌의 발걸음을 멈추지 않으셨던 분, 이제는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실 구상 선생님의 영전에 삼가 이 글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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