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정모 연재소설 <수메리안> 77

검은머리 사람들(하)

등록 2004.06.08 09:32수정 2004.06.08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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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간쯤 달렸다. 천둥이 목에 걸어둔 바랑에서 뭔가가 비죽이 나와 펄럭거렸다. 그런가 했더니 휙 빠져나와 바람에 날아갔다. 그게 무엇이었는지 미처 알아보지도 못했는데 벌써 저만치 훨훨 날아가는 것이었다.


"천둥아, 돌아가자!"
돌아가서 주어보니 분홍색 천이었다. 닌이 부탁하던 그 웨브였다. '남자는 여자와의 약속을 반드시 지켜야 하지요.' 두두의 말이 떠올랐다.
"그래, 천둥아, 이것만 전해주고 가자."

천둥이가 얼른 뒤돌아서더니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올 때보다 더 빨리 달렸다. 녀석도 두두의 말과 인사라도 챙기고 싶은 모양이다. 하긴 열흘이 넘도록 함께 지내온 사이였다.

천둥이가 멈춰 섰다. 닌의 집 앞이었다. 자기 천리마와 장난을 치고 있던 두두가 에인을 보고 재꺽 달려오며 말했다.
"장군님, 닌은 눈비르두에 갔데요."
"눈비르두? 거긴 어딘데?"
"우리가 세수했던 그 시내 있죠? 그 위쪽을 이곳 사람들은 빨래터, 혹은 눈비르두라고 부르지요. "

그리고 두두는 또 헤헤 웃었다. 자기 아버지와의 일을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게다가 그 눈빛이 너무도 맑고 순후했고 그 눈 속에는 깊은 신뢰와 사랑까지 넘쳐나고 있었다. 에인은 그만 마음이 누그러졌다.
"그래? 그럼 웨브는 그의 어머니에게 전해주면 되겠구나."

그는 곧 말에서 내려 집안으로 들어갔다. 이모는 거실 의자에 앉아 상아 뼈바늘로 양가죽을 잇대고 있었다. 에인이 들어가도 그저 자기 일만 했다. 그도 말없이 그저 웨브만 그녀 앞에 내밀었다. 그러자 이모가 부루퉁하게 말했다.

"직접 갖다 줘요. 아마 그 애도 그러길 바랄 걸?"
"전 지금 시간이 없어서요."
"나도 그앨 만날 시간이 없다오. 그 앤 나한테 못된 소리를 하고 나갔거든. 난 그 애가 꼴도 보기 싫으니 당신이 직접 가져다줘요."


전날 은근한 눈으로 바라보며 '잘 생겼다'고 추어줄 때와는 딴판이었다. 에인은 '그럼 두두에게 맡겨두지'라고 생각하며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집 앞에는 두두도 두두의 말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천둥이만 홀로 서 있었다.
'두두는 먼저 닌에게 갔는가? 내가 선물을 사왔다고 알려주려고?'

그러나 기다릴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그는 말을 타고 직접 빨래터로 향했다.
세수를 하던 곳에서도 한참 더 위로 올라가자 빨래터가 나왔다. 그러나 두두는 거기에도 없었다. 사람이라곤 오직 닌이 뿐이었다. 그녀만이 홀로 앉아 치마폭에 얼굴을 감싸고 있었다. 정말 어머니와 싸우고 나와 그렇게 우는 모양이었다.


에인이 말에서 내려 닌에게로 다가갔다.
"이것 좀 봐요, 닌…."
그가 불렀음에도 닌은 고개를 들거나 뒤돌아보지도 않았다.
"부탁하던 걸 사왔어요. 이걸 받아요."

그래도 움직이지 않았다. 단단히 화가 나서 그 누구에게도 마음이 풀어질 기색이 아닌가 보았다. 에인은 주위를 살펴보았다. 누가 따서 두었는지 풀섶에 아카시아 꽃잎이 한 무더기 놓여 있었다. 그는 그 위에 천을 내려놓으며 닌에게 알렸다.
"꽃잎 위에 두고 갑니다."

그는 돌아서서 내려오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아카시아 꽃향기가 내려와 그의 발 앞에 깔렸다. 그는 그 향내를 즈려 밟으며 걸었다. 한발 씩 옮길 때마다 향내가 물큰물큰 치솟으며 그의 코를 자극했다. 봄이 이번엔 그에게 마술을 거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어떤 정기가 유리 막처럼 그를 에워싸며 그 마술을 걷어냈다.

"뱀, 뱀이에요!"
그때였다. 저 위쪽에서 닌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되돌아섰다. 뱀에 물리면 온 몸이 마비되거나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만 그의 뇌리로 관통했다. 그는 달려가기 시작했다. 한데 어쩐 일인가? 뱀이 무서워 비명을 질렀던 닌은 발가벗은 몸으로 물 속에 서 있는 게 아닌가! 토실토실한 등으로 흑단 같은 머리가 흘러내려 젖가슴을 가려주긴 했으나 알몸인 것만은 분명했다. 그는 퉁명스레 말했다.

"닌, 왜 사람을 놀리는 거요?"
"목욕을 하려는데, 여, 여기…."

닌이 덜덜 떨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얼굴도 파랗게 질려 있었다. 에인은 얼른 물위를 살펴보았다. 제법 큰 풀색 뱀 한 마리가 닌의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그는 비로소 그 상황이 짐작되었다.

그러니까 그가 사라지자 닌은 안심하고 목욕을 하려 했는데 뱀이 방해를 한 것이었다. 에인은 휙, 하고 지휘 검을 빼들었다. 어서 빨리 닌을 구출해야 했다. 그가 칼을 겨누고 물속으로 뛰어들자 뱀이 별안간 고개를 빳빳이 쳐들었다. 더 가까이 오면 물어버리겠다는 태세로 놈은 닌을 노리는 것이었다. 에인이 그만 멈추어 섰다.

에인은 재빨리 뱀과 자신과 닌이 서 있는 간격을 가늠해보았다. 자신의 칼이 아무리 빠르다 해도 뱀이 닌을 물기 전에 처리하기엔 그 거리가 너무 벌어져 있었다. 이제 지휘 검의 신통력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지휘 검을 꽉 움켜잡으며'한갓 미물에게 사람의 생명을 뺏길 수는 없다. 방법을 찾아라'하고 지시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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