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정모 연재소설 <수메리안> 78

검은머리 사람들(하)

등록 2004.06.10 10:02수정 2004.06.10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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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이었다. 뱀이 슬며시 머리를 내려뜨리고 다시금 닌의 주위를 맴돌기 시작했다. 닌은 이제 떨지도 못하고 파리하게 굳어 눈까지 꼭 감고 있었다. 물길이 쿨쿨 흘러 그녀 허리를 휘감아대는 데도 말뚝처럼 그렇게 박혀 있었다. 뱀이 다시 그의 앞쪽으로 지나갔다. 그리고 닌의 허리 저쪽으로 돌아갈 때 놈이 뒷모습을 보였다. 바로 그때 에인이 뛰어들어 왼손으로 닌을 왈칵 끌어당기는 한편 오른 손으로 뱀을 후려쳤다.

어찌된 일인가. 내려친 것은 뱀이었는데 쩍 갈라진 것은 시냇물이었다. 에인은 갈라진 물속을 쏘아보았다. 물은 한자 이상 잘려졌고 뱀의 머리는 그 아래편 물 벽에, 몸뚱이는 위쪽에 걸려 서로 다가가 붙으려고 버둥거리고 있었다.


에인이 한번 더 놈의 머리를 쳤다. 그러자 아래쪽 물이 쏴하고 밀려갔고 놈의 머리도 그 물살에 떠내려갔다.
'윗물은 좀더 붙잡아둬야 한다. 몸뚱이가 따라가서 들러붙기 전에.'

에인은 지휘 검을 칼집에 넣고 돌아섰다. 이제 어서 닌을 이끌고 밖으로 나가야 했다. 한데 닌이 보이지 않았다. 그때 닌은 이미 물길에 휩쓸리고 있었다. 그가 지휘 검을 칼집에 넣는 순간 막혔던 물길이 왈칵 흐르면서 닌의 몸을 덮친 것이었다.

그는 황급히 뛰어들어 닌을 건져 올렸다. 벌써 축 늘어져 있었다. 그는 닌을 들쳐 안고 시냇가로 나가 거기에 눕힌 뒤 흔들어보았다. 움직이지는 않았지만 숨소리는 들려왔다.

닌이 살아 있는 것이 확인되자 별안간 피곤이 몰아쳐왔다. 견딜 수 없는 피로였다. 땅바닥조차 그를 잡아당기듯 했고 그는 그대로 고꾸라져서 닌 곁에 쓰러져 누웠다.

온몸이 혼곤하게 가라앉았다. 그럼에도 그의 귀는 징징 울리는 어떤 소리를 감지했다. 지휘 검이 우는 소리였다. 칼집에 물이 들어갔으니 어서 그 물부터 빼내라는 신호였음에도 그는 그만 그대로 잠이 들고 말았다.

짧은 잠에서 깨어보니 닌은 아직도 자기 옆에 누워 있었다, 그는 상체를 들어올려 닌을 내려다보았다. 아직도 발가벗은 그대로였다.
"닌…."
그때 닌도 눈을 떴다.
"아, 나를 구해주신 분…."
그녀가 그런 말을 할 때 그녀의 젖가슴과 복부도 숨을 쉬는 것이 보였다. 그 순간 그의 온몸이 욕망으로 끓어올랐다. 마치 자주 여인을 탐해보았던 사람처럼 온 육신이 단박에 뜨거운 불기둥이 되는 것이었다.


"나, 그대를 가지고 싶소."
그는 닌을 내려다보며 주저하지도 않고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닌은 살래살래 고개를 저었다.
"아직 때가 아니랍니다."
"때가 아니라니, 그런 게 무슨 소용이요, 내 몸을 지금 타버릴 것 같은데…."
"그래도 아니 되어요."

그리고 닌은 몸을 일으켰다. 어서 가서 옷을 입으려는 것이었다. 에인이 그녀를 왈칵 끌어당겨 도로 앉혔다. 닌이 애원하듯 말했다.
"이러면 장군님께 좋지 않아요. 그러니 오늘은 제발 참으셔야 해요."


그렇게 달랜 후 닌은 그의 곁에서 재빨리 달아나버렸다. 도대체 왜 그런 욕정이 삽시에 자기를 지배했는지 그는 알 수가 없었다. 머리도 뜨거웠다. 그는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열기로 곤두섰던 머리카락이 비로소 차분해졌다.

에인은 벌떡 일어나 지휘 검을 잡았다. 칼집 속에 차 있던 물이 쿨렁하고 기척을 알렸으나 그는 그것을 살필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저 모든 것이 이상하고 생소했고, 그런 감정만이 온 몸에서 아가미처럼 벌컥벌컥 숨을 쉬었다.

'오,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가!'
그는 부르짖으며 하늘을 쳐다보았다. 벌써 해는 져버렸고 나뭇잎 사이로 이내가 묻어오고 있었다. 그는 급히 천둥이를 불렀다. 하지만 녀석조차도 거기에 없었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이 시내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여태 한번도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장면들이 마치 미로의 문처럼 하나하나 열렸다가 닫혀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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