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정모 연재소설 <수메리안> 79

검은머리 사람들(하)

등록 2004.06.11 16:20수정 2004.06.11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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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한 밤이었다. 에인은 깊이 잠들어 있었다. 할머니가 준 계피 꿀물을 마시고 그렇게 세상모르게 잠을 자는 것이었다. 두두는 살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어둠에 눈이 익자 그는 소리죽여 에인이 침대 곁으로 다가갔다. 그 머리맡에 칼과 칼집이 따로따로 세워져 있었다. 칼집에 든 물을 빼고 그걸 말리기 위해 지난 밤 그렇게 세워둔 것이었다.


두두는 조심해서 칼과 칼집을 집어든 후 소리죽여 방을 나갔다. 어두운 거실이 그를 가로막았다. 넘어지면 거실이 아닌 칼이 자기를 동강낼지도 몰랐다. 그는 쥐가 나도록 긴장해서 가만가만 외삼촌 방으로 향했다. 복도를 지나 안채, 외삼촌 방 앞에 서자 안에서 기척을 알고 양가죽 커튼을 들어주었다. 외삼촌이었다. 그가 방안으로 들어서자 외삼촌은 양가죽 커튼을 다시 내렸고 안쪽에 앉아 있던 아버지는 불을 켰다. 두두는 아버지 앞으로 가서 조그맣게 말했다.

"가져왔어요."
"잘했다."

제후가 불빛으로 지휘 검을 확인한 후 그 칼을 조심스럽게 칼집에 넣었다. 그때 제후의 손이 매우 떨렸다. 두두도 두려웠다. 그 칼이 주인이 아님을 알아차리고 아버지를 베일지도 몰랐다. 다행이 칼은 별 투정 없이 칼집에 꽂혀주었고 아버지는 그걸 외삼촌에게 내밀며 말했다.

"잘 보관해두시오. 그리고 주인이 이 집에서 떠날 때까지는 절대로 만지거나 건드리지도 마시오."
외삼촌 역시 조심스럽게 그 칼을 궤짝에 집어넣은 후 얼른 몸을 일으켰다.
"이제 나갑시다."

외삼촌이 먼저 뒷문으로 나섰고 제후와 두두도 그 뒤를 따랐다. 밖으로 나오자 칠흑 같은 어둠이 그들을 에워쌌다. 외삼촌이 익숙한 걸음으로 앞장을 섰다. 집과 멀어졌을 때 제후가 두두 곁으로 다가서며 말했다.

"말고삐를 단단히 잡아야 한다. 그리고 곧장 딜문으로 가거라."
두두가 발길을 멈추고 물었다.
"아버지, 이렇게 하면 정말로 장군님을 잡아둘 수 있나요?"
낮에 아버지는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쉬며 '장군이 우리 곁을 떠난단다'라고 말했다. 둘이 강변으로 내려가더니 그 이야기를 한 모양이었다.


'안돼요!'
두두는 비명처럼 소리 질렀다. 별안간 말 뒤꿈치로 뻥 차인 듯이 충격적이어서 절로 그런 소리가 입에서 튀어나온 것이었다. 떠나다니, 날 두고 떠나다니, 안돼! 안돼! 난 장군님 없이는 살 수 없어. 그러나 두두는 곧 정신을 수습하고 말했다.

'저도 장군님을 따라가겠어요.'
'그는 아무도 데리고 가지 않는다.'
그리고 제후는 지그시 아들을 바라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러나 잡아둘 방법은 있다.'
'어떻게요?'


두두가 절박하게 물었고 아버지가 대답했다.
'장군에게는 지휘 검이 있지 않느냐?'
'있지요. 내가 마술에 걸릴 뻔 했는데도 그 지휘 검이 나를 풀어주었지요.'
'그래, 그것이다. 만약 장군이 그 지휘 검을 잃는다면 그는 여기서 떠날 수가 없다.'
'장군님이 어떻게 지휘 검을 잃어요?'

'잃는다는 게 아니다. 당분간만 그 지휘 검을 장군과 떼어놓자는 것이다. 그러면 그는 아주 오래오래 딜문에 있게 된다.'
'하지만 그 지휘 검은 장군님과 떨어지지 않아요.'
'그가 잘 때는 지휘 검을 풀어놓을 것이다. 그가 아주 깊이 잠들면 네가 그걸 들고 나오너라.'
'그래서요?'
'그럼 네 외삼촌이 보관했다가 그의 마음이 돌아서면 다시 돌려주는 것이다.'

그래서 두두는 그 지휘 검을 훔쳤다. 장군이 자기 곁을 훌쩍 떠나는 것보다는 그 모험이 백배 나았다. 처음엔 겁이 나기도 했다. 자기가 주인이 아니라고 칼이 그를 찌르거나 아니면 주인에게로 뛰어가 장군을 깨울지도 몰랐다. 하지만 칼도 칼집도 얌전하게 그의 손에 잡혀주었다. 물에 젖어서인지 아니면 두두가 장군과 친해서 믿어주었는지 알 수 없으나 어쨌거나 확실한 것은 이제 장군은 떠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절대로 두두를 두고 혼자 떠날 수가 없는 것이다.

갑자기 외삼촌이 두두 앞을 가로막았다. 어느새 마구간 뒤에 도착한 것이다. 그는 멈춰 서서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가슴이 팽팽해지자 두려운 생각도 이내 사라졌다. 그때 아버지가 가만히 그의 등을 밀었다. 천둥이가 눈치를 채기 전에 얼른 움직이라는 지시였다.

두두는 마구간 앞으로 걸어갔다. 걸어가면서 그는 흥얼흥얼 노래를 불렀다. 그래야만 말들이 자기 목소리를 알아차리고 긴장을 하지 않을 것이었다.

천리마 두 마리는 그의 기척을 알고 벌써 킁킁 거리도 있었다. 그는 먼저 간짓대를 내려놓았고 그리고 안으로 들어가 양 팔로 천리마 두 마리의 목을 쓰다듬었다. 그들의 신경을 자신에게 집중시키기 위해서였다. 한참 목을 쓰다듬다가 마침내 입을 열어 신호의 말을 던졌다.
"너희들은 정말 착하구나!"

그리고 두두는 두 마리의 말고삐를 잡아 쥐었다. 이제 외삼촌은 불을 지를 것이다. 마른 갈대더미는 거기에 준비되어 있었고 삼촌이 불씨를 놓으면 불길은 삽시에 번져오를 것이다.

그때 작은 불빛이 보였다. 그럼에도 두두는 서두르지 않고 잠시 더 말을 쓰다듬었다. 마침내 불길이 확 번져 올랐다. 그제서야 두두는 급히 자기 천리마 등에 오르며 소리쳤다.
"천둥아, 불이 났어! 우린 어서 장군님한테로 가자!"

두두는 천둥이의 고삐를 잡고 마구간을 확 차고 나갔다. 그리고 달렸다. 불길에 놀란 천리마들도 그냥 달리기만 했다. 모든 것이 의도대로 척척 진행되었다. 만약 그와 같은 방법을 쓰지 않았다면 결코 천둥이를 속일 수는 없었다. 또 만에 하나 아버지나 삼촌의 일이 서툴렀다면 천둥이는 당장 장군이 자는 데로 달려가 자기 주인을 깨우고 말았을 것이었다. 집 벽을 부수는 한이 있어도 그랬을 터이다. 그리고는 등이나 배에 태워서 쏜살같이 사라져버릴 것이었다.

'그래, 천둥아, 잘 따라온다, 딜문까지만, 딜문까지만….'
두두는 달리면서 그 말만 되풀이했다.
'딜문에서 사흘만 기다리면 장군님이 오신다. 그때까지만 참아다오.'
니푸르에서 백리쯤 벗어났을 때 두두는 이제 장군을 향해 말했다.

'장군님, 좀만 참으셔요. 며칠만 참으시면 지휘검도 천둥이도 다 되찾으실 수 있어요. 그러니 어서 아버지에게 약속을 하세요. 여길 머물겠다고, 두두와 함께 있겠다고….'

얼마나 달렸을까, 동이 터왔다. 저만치 아카시아 숲이 보였다. 사마라가 가까운 모양이다.
'그새 멀리도 왔구나.'
두두는 비로소 안심이 되었다. 니푸르에서 사마라까지는 6백리 길이었다. 그들은 한번도 쉬지 않고 그렇게 달려온 것이었다. 티그리스 강줄기를 지도삼아 달리고 또 달려왔다. 별안간 피로가 몰아쳐왔다.

'너희들도 목이 마렵지?'
그는 말들을 풀어주었다. 그리고 자신도 강가로 내려가 물을 마셨다. 얼마나 마셨는지 배가 올챙이 같아졌고 그러자 별안간 잠이 쏟아져왔다. 걷잡을 수 없는 잠이었다.
'우리 여기서 조금만 자고 가자.'
두두는 강가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밤새워 달려온 피곤이 두꺼운 수면 층이 되어 그를 휘덮어버린 것이었다.

해가 그의 얼굴에서 벌침처럼 따끔따끔 쏘아댈 때 두두는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떠보니 자기의 천리마가 걱정스레 내려다보고 있었다.
"알았다. 이제 가자꾸나."
두두는 몸을 일으키고 주위를 살펴보았다. 천둥이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벌떡 일어서며 천둥이를 불렀다.
"천둥아! 천둥아!"
그러나 천둥이는 오지 않았다. 재빨리 강변길로 나와 찾아보아도 천둥이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달아났나? 아니야, 그럴 녀석이 아니지. 그럼 다시 니푸르로 돌아갔나? 아니야, 그러기엔 너무 멀어. 또 말은 불이 난 곳은 다시 되돌아가지 않는 습성이 있다고 했다. 그래, 녀석은 딜문으로 갔을 거야.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을 거야.'

두두는 자기 말 등에 뛰어올라 황급히 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달리다보면 중간에서 천둥이를 만날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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