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억은 1억 원짜리 수표로 10장 주세요!"

아내는 시골생활이 정말 행복하다고 느끼고 있을까?

등록 2004.06.05 07:51수정 2004.06.05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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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동에서 살면 가장 좋은 점 가운데 하나가 돈이 없어도 어느 정도 버틸 수 있다는 것이다. 주로 돈을 쓰게 되는 경우는 배를 타고 뭍으로 나갈 때이다. 먹는 것이야 대충 자체 해결을 할 수 있으니 돈이 떨어져도 아이들한테 들어가는 돈만 없으면 그다지 크게 불편하지 않다. 지난 달 큰아들 등록금을 송금하고 나서 생활비가 떨어진지 두 주가 지났다. 그런 일이 만성이 되어서 아내도 툴툴거리지 않는다.


생활비가 바닥이 났는데 외출할 일이 생겼다. 강화에서 회의가 있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느릿느릿'의 새 가족이 된 분을 만나기로 했다. 아침부터 주머니란 주머니를 다 뒤졌더니 3만원 쯤 돈이 모아졌다. 차를 갖고 나가야 하니 차를 배에 싣는 왕복 선적료를 빼고 나면 1만원이 남는다. 크게 돈을 쓸 일도 없으니 그것이면 되겠다 싶었다.

배를 타고 창후리 선착장에 도착하여 차를 운전하여 강화읍내로 향했다. 날씨는 망종(芒種)을 이틀 앞두고 한여름의 찜통더위를 방불할 정도였다. 아내는 아는 사람에게 얻어 입었다며 철이 지난 긴소매 정장을 입고 한껏 멋을 내고 차에 달려 있는 거울에 얼굴을 비춰보고 있었다. 차 안에서는 Peter Paul and Mary의 '500마일'이라는 노래가 흘러나온다. 요즘 이 노래를 부쩍 많이 듣는다.

잠자코 있던 아내가 불쑥 한마디를 던진다.

"여보, 돈이 똑 떨어졌는데 아무래도 둘째 넝쿨이 통장에서 돈 좀 빼내야겠어요. 나중에 도로 넣어주면 되겠지."
"얼마나?"
"5만원 만."
"통장이랑 도장은 갖고 왔어요?"
"갖고 왔어요."
"그럼 뭘 물어봐요. 마음대로 하시오. 나야 돈과 거리가 먼 사람이니."


강화읍내에 도착해서 차를 세워 둘 때가 없어 빙빙 돌다가 후미진 골목에 차를 주차시켰다. 나는 모임장소로 바로 가고 아내는 은행에 가서 돈을 찾은 다음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꼬박 1시간 넘게 회의를 하고 단체로 점심식사를 했다. 메뉴는 '아구찜'이었다. 아구찜이라고 하기보다는 '콩나물찜'이라고 해야 맞을 것 같았다. 얻어먹는 주제에 음식 타박을 할 수도 없고, 잘 먹었다고 인사를 하고 식당에서 나왔다.


바닷가에 서있는 아내의 모습
바닷가에 서있는 아내의 모습박철
주차해 두었던 차에 올라타자 차 안은 한증막은 저리가라였다. 매운 음식을 먹은 데다가 날씨까지 덥자 땀투성이었고 얼른 읍내를 벗어나야 할 것 같았다. 오늘 아침 전화로 약속한 느릿느릿의 새 식구를 만나기 위해 외포리 방향으로 차를 몰았다. 그런데 조수석에 앉아 있던 아내가 갑자기 웃음을 터트리는 것이 아닌가. 얼마나 크게 소리를 내고 웃었던지 나도 모르게 급정거를 하고 말았다.

"아니, 갑자기 왜 웃어. 놀랬잖아. 뭘 잘못 먹었나? 아님 더위 먹은 것 아니요?"


아내는 대답도 하지 않고 한참을 웃더니 자기가 크게 웃게 된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오전에 강화읍내에 도착해서 나는 바로 약속장소로 가고 아내는 K은행으로 갔었는데 바로 거기에서 있었던 이야기이다. 아내가 청구서를 써서 순번표를 들고 차례를 기다리며 있는데, 바로 앞에 허름한 옷차림의 할머니가 청구서와 통장을 내밀자 은행직원이 다음과 같이 말하더란다.

"할머니, 찾는 금액이 많으시네요? 어떻게 드릴까요?" 그랬더니 할머니가 "땅을 사려고 하는데 10억은 1억 원짜리 수표로 10장을 주고, 나머지는 현금으로 주세요"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 할머니가 엄청난 액수의 돈을 찾은 다음에 똑 같은 자리에서 현금 5만 원을 찾는데 웃음이 나왔단다. 돈 액수도 액수지만 그것도 아들 통장에서…. 나는 운전을 하면서 아내가 크게 웃은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30도가 넘은 무더운 날씨에 남한테 얻어 입은 철지난 긴소매 정장을 입고, 생활비가 떨어져 아들 통장을 들고 은행에 가서 고작 현금 오만 원을 인출했다….'

아내가 무슨 생각을 하면서 돈을 찾았을까 대충 그림이 그려진다.

'나이 50이 다 되어서 여태 신용카드 한 장 없는 가난한 시골목사 아내가 되어 돈이 떨어져도 버틸 수 있다고 남들에게 자랑을 하지만, 정말 시골생활이 행복한 것일까? 은행에서 겪은 작은 해프닝이 불현듯 생각나자 박장대소할 만큼 자신의 존재가 초라하게 여겨진 것은 아닐까?'

나는 하나도 우습지 않았다.

일을 모두 마치고 교동에 도착해서 대룡리 시장 앞을 지나게 되었다. 나는 무심코 아내에게 "여보, 찬거리 살 것 없어요?"하고 물었더니 1초도 안돼서 "돈 없어요!"하는 말이 튀어나온다.

신작로는 더운 김으로 이글이글거리고 있었다.

"아, 덥다. 더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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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 기자는 부산 샘터교회 원로목사. 부산 예수살기 대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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