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안초등학교 뒤편 백화산 기슭에 서 있는 '갑오동학혁명군추모탑'. 그 뒤로 보이는 큰 바위가 '교장바위'다.지요하
태안문학 대특집이 소개한 갑오동학혁명 희생자 186명이 우리 고장에서(충남 태안군) 산화한 선열들의 전체인 것은 물론 아니다. 무수한 희생자들 중에서 우리 고장에 적을 두었던 이들만을 가려서 명단을 만들었다. 하지만 이 명단 안에 오르지 못한 우리 고장의 희생자들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태안문학 창간호 대특집은 1978년 태안 백화산 기슭 교장바위 아래에 세워진 '갑오동학혁명군추모탑' 관련 사항도 소개한다. 1894년 갑오동학혁명 당시 북접 기포지인 태안군 원북면 방갈리의 접주(接主)였던 문장로님의 손자로서 백화산 추모탑 건립에 큰일을 한 문원덕 선생이 제막식 현장에서 직접 낭독했던 긴 '위령문(慰靈文)'의 전문을 수록했다.
아울러 향토사학자 박춘석 선생의 북접 동학혁명 관련 논고와 필자가 원북면 방갈리 기포지에서부터 태안읍 백화산까지 100여 년 전 동학농민군이 밟았던 60리 길을 따라 걸으며 떠올린 동학 관련 생각들을 정리한 '수상문'을 수록했다.
1894년 10월 1일 기포한 북접 동학군은 태안군을 접수한 다음 22일 태안을 출발 24일 해미 승전곡에서 관군·유회군·일본군으로 이루어진 연합군과 접전을 벌여 승리하고 당진을 거쳐 예산까지 나아가 또 한번의 대격전을 승리로 이끌었으나 28일의 홍주 전투에서 신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에게 참패를 당하고 만다. 그리고 태안으로 패퇴한 동학군은 백화산에서 마지막 항전을 한다.
백화산에서 마지막 항전을 하다가 붙잡힌 동학군들이 현장에서 어떻게 죽었을 지는 여러 가지로 상상이 가능하다. 그리고 유족들이 북접 동학군의 마지막 항전 장소요, 일본군에 의한 살육의 현장이었던 백화산 기슭에 추모탑을 세운 이유도 얼마든지 유추가 가능하다.
현재는 태안여자고등학교 운동장이 차지하고 있는 야산 기슭에 1970년대까지만 해도 무덤이 많았다. 임자 없는 무덤도 많았는데 동학혁명 때 죽은 이들의 무덤이라고 했다. 그러니 그 산에다 추모탑을 세워도 무방할 터였다.
하지만 문원덕 선생과 유족들은 백화산 기슭을 고집했다. 그곳이 마지막 항전지이고, 살육의 현장이었기 때문이다. 추모탑이 선 자리에서 교장바위는 바로 위에 위치한다.
갑오동학혁명 당시 태안읍은 작은 마을이었다. 마을 규모가 관아(현 읍사무소)를 중심으로 남으로는 오늘의 농협 앞 사거리, 동으로는 구세군 자리, 서쪽으로는 구시장 언덕을 벗어나지 못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 작은 마을에서 백화산 교장바위는 지척이고 또 질감적으로 상당히 중심적인 장소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 바위에서 벌어지는 일은 전체 주민들에게 효과적으로 충분한 '육감'을 안겨주었을 것이 분명하다.
읍내와 인접한 백화산 기슭으로부터 가까운 그 두드러진 바위에서 '교장(絞杖)―목 졸라 죽이고 때려죽이는'이 벌어졌다면 그 후 사람들은 그 바위를 보면서 자연적으로 교장이라는 단어와 그 상황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 교장의 규모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소수, 또는 한두 사람이 교장을 당했더라도, 그 교장의 실체적 이미지는 그 순간부터 그 바위와 손쉽게 밀착이 되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