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녘 동포들에게 사랑의 감자를

북한 동포들을 돕는 연변 감자농장 신부님의 애환

등록 2004.06.09 14:54수정 2004.06.09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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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대전교구 소속 230여명 사제들 중에 황용연(예레미아) 신부님이 있다. (필자는 천주교 신자이므로 '신부님'이라고 표기함을 독자들께서는 이해해 주시기 바란다.)


황용연 신부님은 현재 대전가톨릭대학교 교수로 사회복지학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니까 주로 생활하는 곳이 대전가톨릭대학이다. 그러나 일주일에 이틀씩은 서울에서 산다.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사회복지위원회(위원장 장봉훈 주교) 총무 일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주교회의 사회복지위원회는 전국 모든 교구의 사회복지 업무를 총괄 리드하는 곳이므로 업무가 광범위한 편이다. 그 기구의 총무를 맡고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하느님의 크신 소명일 터이다.

a 용정 성당 봉사자들이 씨감자를 고르는 장면. 서 있는 이들은 황용연 신부(모자 쓴 이)와 김종기 신부

용정 성당 봉사자들이 씨감자를 고르는 장면. 서 있는 이들은 황용연 신부(모자 쓴 이)와 김종기 신부 ⓒ 황용연

충남 연기군 전의면에 있는 대전가톨릭대학교와 서울 명동 CCK(천주교중앙협의회)를 오가며 바쁘게 생활하면서도 그는 일년에 서너 번씩 비행기를 탄다. 중국 연변을 가는 일 때문이다. 연변의 20만 평에 이르는 감자 농장에서 감자 농사를 짓는 일 때문이다.

파종하고 수확하는 일을 그는 손수 한다. 수확을 하면 그 감자들을 포대에 담아 트럭에 싣고, 또 열차에 옮겨 실어 북한으로 보내 주는 일까지 직접 한다. 완전히 농부이고 잡역부다. 그는 그 일을 1998부터 시작했으니 벌써 6년 세월을 헤아린다.

나는 황 신부님을 1997년 여름 금산의 적벽강변에서 처음 뵈었다. 대전교구 홍보국 산하 사도직단체 합동 하계연수회에 참가한 덕이었다. 그때 황 신부님은 대전교구 사회복지국장을 맡고 계셨는데 홍보국 산하 단체들의 합동 행사에 오셔서 점심식사를 같이했다.


교구 사회복지국장으로 교구의 열개도 넘는 사회복지시설과 봉사단체들을 총괄하는 황 신부님은 그 일만도 바쁘고 벅찰 터인데, 이미 교구 밖으로 활동의 영역을 확장하고 있었다. 95년부터 나라 밖인 만주 연변을 다니며 조선족 동포들을 돕는 일을 하고 있었다.

a 감자 나르기 작업에 열중하고 있는 황용연 신부

감자 나르기 작업에 열중하고 있는 황용연 신부 ⓒ 황용연

그가 연변 동포들을 위해 주로 하고 있는 일은 안과 의료진을 데리고 가서 백내장 녹내장 무료 수술을 해주고, 용정시 등의 병원들에 의료장비들을 제공해 주는 일이었다. 그는 이미 그때부터 극심한 식량난을 겪고 있는 북한 동포들을 돕는 운명적인 일의 길목으로 들어선 셈이었다.


내가 적을 두고 있는 대전교구 태안교회의 11대 주임사제로 1999년부터 2002년까지 사목을 하셨던 김종기 신부님(현 대전교구 가정사목 담당 겸 대전가톨릭문화회관 관장)은 매년 한 번이나 두 번씩 연변을 가시곤 했다. 한 번 가면 보름 이상 머물다가 오셨는데, 감자농장에서 직접 파종 작업이나 수확 작업을 하고 오신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얼굴이 검게 그을린 상태로 돌아오시곤 했다.

그런데 김종기 신부님은 자신만 그렇게 연변 감자농장에 가서 노동을 하고 오실 뿐 신자들에게 감자농장의 확실한 사정을 말해주지 않았다. 신자들은 연변의 그 감자농장이 우리 대전교구에서 마련을 하고 또 직접 운영하는 것인 줄로만 알았다.

간혹 보도 매체에서 사진을 보면 '천주교 대전교구'라는 글자가 찍힌 감자 포대들을 볼 수도 있어서 정말 그런 줄로만 알았다.

a 트랙터로 감자를 수확하는 장면

트랙터로 감자를 수확하는 장면 ⓒ 황용연

그런데 사실을 알고 보니 만주 연변의 그 감자 농장은 황용연 신부님 단독으로 마련을 하고 또 운영을 해온 것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는 참으로 크고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그 어려움은 아직 현재진행형이지만, 자칫하면 매우 좋지 않은 방향으로 과거완료형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다. 그 감자농장이 지금 존폐의 기로에 처해 있다는 얘기다.

그런 사실에 관한 이야기들이 대전교구의 사제들 사이에 조금은 화제가 되었던 모양이다. 그 얘기를 들은 우리 태안 성당의 현 구본국 주임 신부님이 황용연 신부님께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고 한다. 황용연 신부님으로 하여금 우리 성당에 와서 미사를 지내며 강론 시간에 연변 감자농장의 존재 의의와 조성 과정, 현재의 실상을 설명해 보시도록 배려해 드린 것이다. 신자들이 얼마나 동감을 하고 협조를 하게 될지는 미지수지만, 그것은 우리 본당 신부님이 황 신부님을 도와 드릴 수 있는 최선의 일이었다.

나는 그 사실을 알고 우리 본당 신부님께 크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다. 대전교구의 100개가 넘는 본당들 중에서 황 신부님께 그런 배려를 드린 본당이 그 동안 하나도 없었다는 사실이 적이 실망스럽고 섭섭하면서도, 우리 태안 본당이 최초로 그런 일을 했다는 사실에서는 묘한 자부심마저 느끼는 기분이었다.

a 열차 운송을 위하여 감자 포대를 나르고

열차 운송을 위하여 감자 포대를 나르고 ⓒ 황용연

아무튼 그런 연유로 지난 5월 29일 황용연 신부님이 우리 본당에 오셨다. 그리고 토요일 저녁 특전미사부터 다음날 30일 '성령강림대축일'의 저녁까지 네 번의 미사를 모두 집전하며 강론을 하셨다. 신자들은 한결같이 숙연한 모습이었다. 감동한 나머지 눈물을 짓는 신자들도 있었다.

그리고 거의 모든 신자들이 특별헌금에 참여했다. 신자들 중에서 황 신부님께 큰 금액의 도움을 드리는 신자가 혹 있을지, 또 앞으로 계속 자동이체로 소액이나마 돕는 신자들이 얼마나 될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모든 신자들에게 만주 연변 감자농장의 존재 이유와 실상을 확실히 알리는 계기가 된 것은 분명하다.

신자들에게 깊은 감동을 준 황용연 신부님의 강론 원고를 입수했다. 처음에는 발췌를 하려고 했으나 아까운 얘기들이 많아서 글의 전체 양이 너무 길어지는 것을 무릅쓰고 전문을 소개하기로 한다.

†. 우리 하나되리

해마다 6월이 오면 한반도는 커다란 집단적 몸살을 앓습니다. 분단 반세기 동안의 한이 해마다 6월이면 폭발합니다. 이때가 되면 너도나도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를 목놓아 부릅니다.

자유당 시절, 북진 통일을 가르치던 때도 이 노래는 많은 사랑을 받았고, 군부독재의 권위주의 정권 아래서는 소위 운동권의 저항가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으며, 통일의 열망으로 한반도가 뜨거웠던 국민의 정부 이후, 참여정부 시대에도 6월이면 어김없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노래가 바로 '우리의 소원은 통일'입니다.

6월 19일부터 한국 천주교는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위한 9일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본당에 따라서는 미사의 입당 성가로, 혹은 퇴장 성가로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노래하기도 합니다. 미사 시간에 신자들의 기도에도 통일을 갈구하는 타는 목마름이 빠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6월이 지나면, 우리의 입에서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가 사라집니다. 바로 이런 현실에서 우리가 외치는 이 노래는 통일을 위한 몸부림과 구체적인 행동이 없는, 한 마디로 피상적인, 관념적인 통일의 노래일 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1998년 5월 초순, 저는 중국의 연변, 우리 옛말로 북간도를 찾아갔습니다. 북간도에 간 이유는 모든 언론이, 연변에 탈북자들이 많고 그들이 고생을 많이 한다 하여 혹시라도 그들을 도울 일은 없을까 해서였습니다.

참으로 많은 탈북자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을 찾아내어 안전한 곳에 정착하도록 멀리 흑룡강성으로, 내몽고로 이주시키는 일을 여러 차례 하였고, 이리저리 주선하여 10여 명의 북한 사람들을 한국에 데리고 오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탈북의 근본적인 원인은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기 때문이고, 북한에 식량을 지원하는 일이 우선적인 일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그 일을 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1999년부터 저는 감자농사를 시작했습니다. 하필이면 왜 감자냐구요? 중국이나 북한에서 감자는 구황 작물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굶주릴 때 먹는 가장 천한 음식입니다. 반면에 온갖 영양소가 골고루 들어있는 완전식품입니다.

그리고 감자는 오랫동안 보관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북한의 권력자들에게 빼앗길 리도 없고, 소위 군량미로 바뀔 가능성도 없는, 한마디로 먹을 것 없는 북한의 가난한 이들, 굶주린 이들의 양식이기 때문입니다.

1999년 봄, 용정시 동불사진의 땅 5만평을, 화룡시 팔가자진에 15만평을, 도합 20만평의 땅을 중국 정부로부터 50년 간 임대하였습니다. 해마다 20만평의 땅에 감자를 심고 수확하여 북한에 식량으로, 그리고 씨감자로 지원하고 있습니다.

원종 씨앗은 대덕연구단지 생명공학연구소 정혁 박사님과, 씨알바이오택의 정경호 박사님이 무균 상태의 우량 종자를 지원해 주셨습니다. 이 일에는 북간도의 우리 동포 교우들도 동참하고 있습니다. 지난 5월 초순에도 선교 100주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길림성 용정시 팔도 성당 교우들, 용정 성당 교우들 80여명이 함께 나서 굶주리는 동포를 돕는 일이라 하여 씨감자를 파종하였습니다.

간혹은 농사가 마음대로 되지 않아 소출이 적은 경우도 있었지만, 그동안 해마다 평균 1000톤 이상의 식량용 감자를 북한의 민경련에 보내주었고, 작년과 금년에는 민경련을 통하여 씨감자를 북한의 농업성에 보내고 있습니다.

북한 농업성에서는 이 씨감자를 두세 차례 증식하여 더 많은 양의 씨감자를 농부들에게 분배하고 있습니다. 고기를 먹여주는 것이 아니라 고기를 잡아먹는 법을 가르치는, 이런 방법만이 북한의 식량 자급을 가능하게 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비록 적은 양이라도, F2(2세대) 1000톤 정도면 북한의 감자밭 500ha에 심을 씨앗이 되고, F3(3세대)가 되면 5000t 이상이 수확되어 2,500ha에 심을 씨감자가 되며, 4세대에서 25,000t의 수확량을 얻을 수 있는데, 이는 북한 주민 전체가 하루를 먹을 식량이 됩니다.

혹자는 "아니, 농사 질 돈으로 감자를 사서 보내주면 되지 왜 고생을 사서하느냐?"는 말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명절 때마다 어렵사리 귀향 길에 올라 고향을 찾고, 다시 서울로 올라올 때 고향의 부모님이 조금씩 담아주시는 농작물을 소중하게 생각하듯 우리의 땀방울이 밴 감자, 우리의 부르튼 손으로 수확한 감자를 전해주는 것이 통일을 위해, '하나되리'를 위해 더 소중하고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네 옛말에 호사다마라는 말이 있는데 지금 제 처지가 그런 경우입니다. 굶주리는 동포를 돕는 일을 하면서도 이제는 더 이상 감자농사를 할 수 없게 되어 안타깝습니다. 원인은 농사를 지을 영농경비를 조달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 일을 시작하면서 저는 교회의 도움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교회에서 북한을 도와주는 조직은 크게 두 개가 있는데 '민족화해위원회'와 '사회복지위원회'가 바로 그것입니다.

민족화해위원회는 북한 선교를 기본 노선으로 한 대북 지원을 하고 있고, 북한천주교 신도회를 파트너로 하고 있어, 식량 자급을 기본 노선으로 한 저의 농업성 씨감자 지원사업과는 코드가 맞지 않아 지원이 불가하다고 합니다.

다른 조직은 사회복지위원회인데 제가 사회복지 위원회의 책임을 맡고 있지만, 이 조직은 주교님들의 지시로 국제 까리따스와 연대한 대북 지원을 하고 있는데, 국제 까리따스는 북한의 식량 자급을 위한 씨감자 지원을 고려하지 않기에, 저의 북한 식량자급을 위한 씨감자 지원사업은 교회로부터 공적인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가슴 아픈 일이지만, 뜻이 있으면 길이 열리겠지 하는 마음으로, 저의 형제들을 설득한 후, 부모님께서 물려주신 재산을 처분하여 중국의 땅을 빌렸고, 트랙터를 비롯한 영농장비를 구입하였고, 영농경비도 해결하였습니다.

그러나 해가 거듭되자 돈도 다 바닥났고, 그때부터는 형제들을 설득하였습니다. "일제 때 독립군들이 어떻게 독립운동 했냐? 다 자기 재산 팔고 조국을 위해 죽기까지 했지 않았느냐?" 반은 공갈이었지요.

착한 동생들의 협조가 고마웠지만, 지금까지 반대도 못하고 남편 눈치만 보는 제수씨들 볼 면목이 없습니다. 이제는 동생들 집까지 다 잡혀버려, 더 이상 얻어 쓸 것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기다리던 수호천사도 없었습니다.

2000년도부터 지금까지 TV와 신문에 여러 차례 제 일이 소개되었고, 지난 3월 6일 중앙일보에 제 사업이 전면으로 소개되었는데, 도움을 주겠다는 손길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고 했던가? 마침 그 날 전국적으로 큰 눈이 내렸고, 천안지역 폭설이 고속도로를 막아 서울을 제외하고는 전국 어느 곳도 신문이 배달되지 못했다나요?

"아니, 돈 없으면 농사를 쉬고 나중에 온 교회가 동참할 만큼 여건이 성숙될 때 다시 하면 되지 왜 그렇게 고생을 사서하느냐"고 하실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그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농사를 한해라도 짓지 않으면 50년 간 임대한 토지를 중국 정부가 몰수합니다. 아니, 그보다 더 큰 이유는 해마다 1000톤 이상의 감자를 기다리는 북한 동포의 굶주린 모습이 눈앞에 선하여 온 교회가 함께 나설 때까지 기다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용천역 폭발사고 이후, 요즈음 매스컴에서 북한을 많이 다루고 있고, 우리 국민적 지원은 용천을 더 나은 도시로 복구시키고 있지만, 지금 북한의 식량난을 거론하는 언론은 없습니다. 북한은 해마다 500만 톤 이상의 식량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북한 땅에서 생산되는 식량은 350만 톤밖에 되지 않습니다. 해마다 150만 톤 이상의 식량이 부족한데, 해결하는 방법은 감자밖에 없습니다. 김정일은 기아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감자를 주곡으로 선포하였습니다만, 양질의 씨감자가 확보되지 않는 한 기아와의 전쟁은 해결되지 않습니다.

실제로 지난 1월 중순에 지금껏 식량을 분배하던 WFP, UNICEF, Caritas 관계자들이 모두 북한을 떠났습니다. 더 이상 분배해 줄 식량이 없어서입니다. 3월 말부터는 북한 정부가 식량을 분배하던 창구도 문을 닫았습니다.

지금 북한은 최악의 식량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만, 이를 위해 노력을 기울이는 모습은 국제사회에서도, 한국에서도, 우리 교회에서도 보이지 않습니다.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 구체적인 도움을 주지 않은 채 “가서 따뜻한 음식을 먹고 좀 쉬라”고 말만 하는, 그런 잘못된 믿음을 질책하신 야고보 사도의 말씀이 절로 생각납니다.

최근 정부에서 식량 40만 톤을 지원하기로 하였습니다만, 해마다 반복되는 식량난에 확실한 해결 방법은 씨감자 지원밖에 없습니다.

해마다 20만평의 영농경비와 1000톤의 운송비 등을 계산하면 우리 돈으로 약 1억 원 정도 소요됩니다. 그만한 양의 감자를 한국에서 사서 보낸다면 5억 원 이상이 들어갑니다. 중국에서 사서 보낸다 해도 우리 돈으로 약 2억 원 이상 들어갑니다. 저렴한 경비로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는 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농경비가 없어 중단해야 하는 안타까움에 여러 날을 괴로워하던 중 마침 구본국 신부님께서 각별한 관심을 보여 주셔서 오늘 이 태안 성당을 처음으로 찾았습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힘차게 부르며 남과 북을 하나로 묶는 길, 그 길에 태안 본당 교우님들의 동참을 호소합니다. 여유가 있으시거나 큰 뜻을 가지신 분이라면, 트랙터가 많이 낡았으므로 100마력급 트랙터를 한대 구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만, 그보다는 조금씩 십시일반의 마음으로 정성을 나누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나누어드린 유인물에 감자사업의 계좌번호가 있습니다. 작은 금액이라도 자동이체를 해 주신다면 이 사업에 지속적으로 동참하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나누시는 정성은 북한 동포에게 천주교를 알리는 간접 선교의 몫을 할 것이며, 조국 통일의 밑거름이 될 것이고, 남과 북이 하나되는 끈이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여러분이 동참하는 이 사업으로 북한의 식량 자급이 이루어진다면 조국 통일은 성큼 앞당겨질 것이며 동북아에 우뚝 선 통일조국 대한민국을 만들어 갈 것임을 확신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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