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의 속내를 가장 잘 아는 '해당화'

내게로 다가온 꽃들(59)

등록 2004.06.10 10:09수정 2004.06.10 2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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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수
꽃은 새로운 꽃을 피어내기 때문에 아름답습니다. 새롭게 피어나지만 어제의 그 꽃과 다르지 않아 아름답습니다. 어제의 그 꽃은 아니지만 향기는 그대로여서 만나면 늘 반갑습니다. 꽃이 시들고 다시 피지 않는다면 이렇게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을까요.

해안가에 핀 해당화를 바라보며 '왜 꽃이 아름다운가?'를 생각해 봅니다. 자연은 늘 변하는 듯하면서도 변하지 아니 합니다. 자연, 그 중에서도 꽃은 그 모습, 그 향기로 다가옵니다.

김민수
해당화가 곱게 핀 바닷가를 보면 행복해집니다. 파도가 잔잔한 날이면 그윽하면서도 알싸한 해당화의 향기가 바다의 풋풋한 해초 내음과 함께 밀려옵니다. 그러면 저의 마음이 바다와 해당화를 닮아가는 듯합니다.


해당화(海棠花)는 장미과 꽃답게 줄기에 작은 가시들을 총총하게 달고 있습니다. '참 잘했다!' 만일 그렇게라도 자신을 지키지 않았다면 아마도 그 아름다움이 모두 뽑혀 나갔을 것입니다.

흰해당화
흰해당화김민수
만해 한용운님의 <해당화>라는 시가 있습니다.

당신은 해당화 피기 전에 오신다고 하였습니다. 봄은 벌써 늦었습니다
봄이 오기 전에는 어서 오기를 바랐더니,
봄이 오고 보니 너무 일찍 왔나 두려합니다

철모르는 아이들은 뒷동산에 해당화가 피었다고, 다투어 말하기로 듣고도 못 들은 체 하였더니
야속한 봄바람은 나는 꽃을 불어서
경대 위에 놓입니다 그려
시름없이 꽃을 주워서 입술을 대고 "너는 언제 피었니"하고 물었습니다
꽃은 말도 없이 나의 눈물에 비쳐서 둘도 되고 셋도 됩니다


김민수
봄이 지나가고 여름이 되면 해당화가 핍니다. 계절은 속절없이 지나가고 간절히 원하는 것은 아직 오지 아니하였습니다. 거기에다 그 계절을 상징하는 꽃까지 피어나니 그 안타까움이야 오죽하겠습니까. 한용운님처럼 애써 눈감아 보고 싶었을 것입니다.

오늘은 1987년 6·10항쟁이 있었던 그 날입니다. 저도 그 뜨거웠던 여름의 함성 속에서 함께 목 터져라 민주주의를 외치며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 시절, 20대의 저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나이 서른에 우린 어디에 있을까?"하며 "이 다음에 우리 아들딸이 "아빠는 그 때 어디에 있었어?"할 때 자랑스럽게 "난 거기에 있었단다"하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이제 불혹의 나이를 훌쩍 넘기고 나니 나에게 그런 시절들이 있었는가 아련하기만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6월 10일만 되면 그날의 사람들이 떠오르고 그 뜨거운 6월에 제가 서있던 자리를 기억하게 됩니다.

김민수
제주의 바람이 세서일까요. 앙다물고 있는 해당화 몽우리가 활짝 피어나면 바람은 기다렸다는 듯 꽃잎을 훔쳐 달아납니다. '때가 차면' 그 화사한 꽃잎을 떨구는 아픔을 겪어야 하지만 해당화는 피어납니다.

해당화의 몸은 바람에 흔들리고 여리디 여린 꽃잎은 바람에 쉬 떨어집니다. 하지만 해당화의 향기는 파도와 함께 온 바다를 떠돌며 인간과 자연에게 그 향기를 전해 줍니다.

김민수
당(唐) 나라의 시인 두보(杜甫). 그는 중국 최고의 시인이라는 뜻에서 시성(詩聖) 이백(李白)과 아울러 일컬을 때는 이두(李杜), 당나라 말기의 두목(杜牧)과 견줄 때는 노두(老杜)·대두(大杜)라 불리웁니다. 하지만 두보는 수많은 시를 지으면서도 다른 시인들이 노래하는 해당화를 주제로는 시를 짓지 아니했다고 합니다. 어머니의 성명과 꽃 이름이 비슷해서였다고 합니다. 아마도 시성 두보는 효자였던 것 같습니다.


김민수
해당화는 잔잔하게 찰랑거리는 작은 파도에서부터 태풍이 불어와 온 세상을 집어 삼킬 듯 포효하는 파도까지 모두 보았을 것입니다. 바다의 깊은 속내를 가장 잘 아는 꽃이 해당화가 아닐까 합니다.

태풍이 단지 세상을 집어삼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을 탄생하기 위한 것임을 해당화는 알고 있을 것입니다. 잔잔하기만 하면 바다가 썩는다는 것을 알기에 해당화는 자신의 편안함을 위해 고요한 바다를 위해 기도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비록 제 몸이 찢기고 죽어가도 해당화는 담담히 받아들였을 겁니다.

김민수
그렇게 꽃이 지고 나면 이렇게 붉디 붉은 열매가 열립니다. 터져 버릴 듯한 붉은 열매는 앵두의 빛깔보다 더 붉습니다. 저 열매 안에는 바다가 들려준 이야기들이 가득 들어 있을 겁니다. 따가운 여름 햇살로 더욱 야물어진 초록 이파리는 겨울이 오기 전가지는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테죠.

그래요.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 항상 잔잔할 수만은 없습니다. 척박하고 광풍이 몰아치는 날도 있을 겁니다. 그 때 참고 인내하면서 주어지는 모든 것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살아가는 것이 참 아름다워 보입니다. 그리고 그런 삶 속에서 이전과는 다른 나, 그러면서도 이전의 나를 잃어 버리지 않는 또 다른 나로 성숙하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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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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