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우리 애 좀 말려줘요

시험 하루 앞두고 새벽까지 소설 읽은 넝쿨이...도대체 누굴 닮은 것일까?

등록 2004.07.06 13:11수정 2004.07.06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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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새벽, 잠에서 막 깼는데 어디선가 큰소리로 떠드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넝쿨이 방에서 들려오는 소리였습니다. 아내가 넝쿨이를 야단치는 소리였습니다.


'아니, 이 새벽녘에 애를 재우지 않고 왜 야단을 치는 것일까? 내일부터 중간고사인데 시험공부를 안 하고 자서 화가 나서 저러는 것일까?'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a 넝쿨이가 진지한 자세로 사진을 박고 있다.

넝쿨이가 진지한 자세로 사진을 박고 있다. ⓒ 박철

그래도 그렇지 조금 심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아내의 큰소리는 그칠 줄 몰랐습니다. 나는 새벽기도회에 나가기 위해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 일어나 먼저 넝쿨이 방에 갔습니다. 넝쿨이는 겁에 질린 표정이었고, 아내는 분을 삭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왜 새벽부터 큰소리야? 넝쿨아, 뭘 잘못했기에 엄마가 저렇게 화가 나셨니?"

방 안은 살얼음판 같은 냉기가 감돌았습니다.


"도대체 왜 그래요? 넝쿨이가 시험공부를 하나도 안 해서 그런 거야?"
"공부를 안 하고 잤으면 내가 말도 안 하겠어요. 글쎄 이 녀석이 지금 새벽 4시까지 잠도 안 자고 소설책을 보고 있잖아요. 얘가 지금 정신이 있는 애인지 아닌지 모르겠어요."

기가 막혔습니다. 아무리 책을 좋아하는 책벌레라고 해도 그렇지 시험이 내일인데 잠을 하나도 안 자고 이 시간까지 소설을 보고 있었다니…. 학교에 가면 수업시간에 어떻게 하겠습니까?


"무슨 소설책을 읽었는데 그래요?"
"환타지 소설이래요. 요즘 얘가 환타지 소설에 푹 빠져서 틈만 나면 읽잖아요."

정말 대책이 없었습니다. 넝쿨이가 지금 중학교 2학년인데 초등학교 때부터 학교에서 책벌레로 소문이 났습니다. 책을 읽는 것도 잡식성이라 닥치는 대로 읽습니다. 새 책이 손에 쥐어지면 그 자리에서 다 읽어야 직성에 풀리는 모양입니다. 쉬는 시간에 다른 애들은 다 운동장에 나가 노는데 넝쿨이는 그 시간에 책을 읽었습니다.

a 넝쿨이는 늘 환하게 웃는 표정이다.

넝쿨이는 늘 환하게 웃는 표정이다. ⓒ 박철

우리집은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기가 일상화되어 있어서 저녁 9시30분이면 전깃불을 끕니다. 대신 아침에 일찍 일어납니다. 넝쿨이는 나와 아내가 잠이 들면 몰래 일어나 불을 켜고 이불 속에서 혼자 책을 읽습니다. 한번은 학교에서 금강산으로 수학여행을 가게 되었는데도 보통 아이 같으면 마음이 들떠서 잠을 설치고 그럴 텐데, 넝쿨이는 마음에 동요가 하나도 없이 출발하는 날도 손에 책을 들고 있었습니다.

"엄마 아빠, 학교에 다녀오겠습니다."

인사를 하고 방문을 나서서 학교에 간 줄 알았더니 자기 방에 들어가 몰래 책을 읽다가 들킨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언제나 책읽기에 목말라 하고 있습니다. 읽을 책이 없으면 내가 구독하는 시사주간지나 <한겨레>까지 읽습니다.

여러 해 전부터 일주일에 두 번 집으로 찾아오는 도서관을 이용하여 책을 빌려보고 있는데 책이 배달되는 그날 책을 다 읽습니다. 운동에는 도통 취미가 없습니다. 아무 것도 하지 말고 책만 읽으라고 하면 만세를 부르고 좋아할 녀석입니다.

그렇다고 행동이 민첩한 것도 아닙니다. 어떤 일이든지 급한 게 없습니다. 하도 행동이 굼뜨고 느려서 별명이 '어리버리'입니다. 아침 학교에 갈 시간에도 그렇게 느긋할 수가 없습니다. 아내의 잔소리를 피하기 위해 화장실에 들어가 그 바쁜 시간에 책을 읽고 있습니다.

밤을 꼬박 새운 넝쿨이를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내가 넝쿨이게 빨리 자라고 소리를 지르더군요. 아침 일찍 오는 통학버스를 이용하지 않고 대신 아내가 자동차로 학교에 태워다 주었습니다. 넝쿨이를 데려다 주고 와서 아내가 내게 묻는 것이었습니다.

"넝쿨이 녀석, 도대체 누굴 닮은 것 같아요?"
"글쎄?"
"내가 생각해 본건데, 책 읽는 걸 좋아하는 것은 아무래도 나를 닮은 것 같고, 다음날이 시험인데 시험공부는 하나도 안하고 새벽 4시까지 소설을 읽는 걸 보면, 그건 당신 닮은 것 같아요. 당신도 내일 무슨 일이 있어도 전혀 대책 없이 있다가 당황해 할 때 많잖아요."

저녁 무렵 넝쿨이가 내일부터 시험이라고 학교에서 일찍 돌아왔습니다. 눈이 퀭하게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얼굴 표정은 밝습니다.

"넝쿨아, 너 오늘 수업시간에 졸았지?"
"아녜요. 하나도 안 졸았어요. 정말이에요."

넝쿨이가 오늘 새벽에 있었던 일이 마음에 걸렸던지 책가방을 내려놓자마자 시험공부를 한다고 자세를 가다듬고 보란듯이 책상머리에 않았습니다.

"그래 열심히 해라, 졸리면 자고…."

a 아딧줄과 넝쿨이 형제. 형 아딧줄이 공부하러 필리핀으로 떠나자 넝쿨이가 이틀을 울었다.

아딧줄과 넝쿨이 형제. 형 아딧줄이 공부하러 필리핀으로 떠나자 넝쿨이가 이틀을 울었다. ⓒ 박철

책을 열심히 읽는다고 넝쿨이가 공부를 매우 잘 하는 것은 아닙니다. 만날 책 속에 파묻혀 있다고 표정이 어둡거나 성격에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평범한 아이일 뿐입니다.

아내는 볼 일이 있어 외출하고 집에 없었습니다. 오늘 아침 아내와 나눈 이야기가 자꾸 꼬리를 물고 따라오는 것이었습니다.

'넝쿨이가 도대체 누굴 닮은 것일까?'

잡지사에 보낼 원고를 붙들고 있는데 생각이 모아지질 않아 포기하고 바깥으로 나갔습니다. 잠시 바람을 쐬고 들어와 넝쿨이 방문을 여니, 이 녀석이 방바닥에 엎드려 책 위에 얼굴을 파묻고 쿨쿨 자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자는 모습을 보니 피식 웃음이 나왔습니다.


'이 다음에 도대체 무엇이 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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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 기자는 부산 샘터교회 원로목사. 부산 예수살기 대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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