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내가 돈 좀 줄까요?"

우리집 늦둥이 은빈이의 사랑이야기(15)

등록 2004.07.02 19:05수정 2004.07.03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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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포 포구에서. 은빈이는 바다를 좋아합니다.
남산포 포구에서. 은빈이는 바다를 좋아합니다.박철
엊그제 오랜만에 외출을 하고 돌아와서 파김치가 되어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데 은빈이가 내게 다가와 뚱딴지같은 질문을 던지는 것이었습니다.


"아빠! 아빠 지갑에 돈 얼마나 있어요?"
"글쎄다. 한 2만원쯤 있을까?"
"우리 아빠는 너무 가난하다. 내가 아빠보다 부자네. 아빠, 내가 돈 좀 줄까요?"

처음에는 짠순이 은빈이가 심심하니까 괜히 지나가는 말로 한 줄 알았습니다. 은빈이가 자기 엄마에게는 파마하라고 돈을 준 적도 있고 가끔 잔돈을 빌려주었다 받기도 하지만 나한테는 단 돈 천원도 빌려주지 않는 짠순이라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은빈이에게서 뜻밖의 제안을 받고 어떻게 하나 보려고 "그러면 좋지"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랬더니 은빈이가 쪼르르 자기 방으로 달려가 빨간 돈지갑을 갖고 나타났습니다. 그러더니 지갑에서 만원권 지폐 두 장을 빼서 내게 주는 것이었습니다. 솔직히 당황했습니다. 평소 은빈이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기 때문입니다.

"은빈아, 참 고맙다. 우리 은빈이가 짠순인 줄만 알았는데 아빠 쓰라고 돈을 다 주고…. 은빈아, 고맙지만 안 줘도 돼!"
"아녜요, 아빠. 나 돈 많아요!"

그래서 엉겁결에 돈을 받아 내 지갑에 넣어두었는데 다시 돌려주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되었습니다. 어떻게 해서 은빈이가 그런 생각을 했을까 아내를 다리 놓아 알아보았습니다.


그 날 저녁 내가 외출을 하고 돌아와 옷을 갈아입고 주머니에 있던 손전화와 지갑을 책상 위에 꺼내놓았는데 은빈이가 내 책상 위에 있는 지갑을 슬쩍 열어 보았나 봅니다.

지갑에는 만원권 한 장과 천원권 몇 장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걸 보고 은빈이가 자기보다 아빠가 돈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내게 그런 제안을 했다는 것입니다.


평소 은빈이는 단 돈 천원을 허투루 쓰는 법이 없습니다. 내가 그걸 잘 압니다. 도대체 은빈이 지갑에 돈이 얼마나 있어서 인심을 팍팍 쓰는 것일까? 궁금하여 아내에게 넌지시 물어보았습니다.

박철
"은빈이 지갑에 돈이 얼마나 있어요?"
"이제 몇 천원밖에 없을 걸요?"
"정말? 나는 한 십만원 쯤 있다고…그런데 나한테 2만원을 주었단 말이오?"
"올 설날 때 세배하고 받은 돈과 어른들에게 인사하고 받은 돈을 하나도 쓰지 않고 다 모았어요. 처음에는 10만원도 넘었지요. 그런데 올 2월 큰오빠 아딧줄이 필리핀에 공부하러 갈 때 오빠 구두 사 신으라고 5만원을 내놓더라고요. 그리고 지난달에 파마하라고 내게 2만원 주고, 어제 당신한테 2만원 주고, 그러니 남은 돈이 얼마나 있겠어요."

그랬습니다. 은빈이가 나한테 2만원을 주고 나면 몇 천원밖에 남는 게 없다는 것을 알면서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내가 불쌍해 보였을까요? 은빈이는 내 서재에서 팬티만 입고 정신없이 자고 있었습니다. 아내가 학교 지각하겠다고 흔들어 깨우자 간신히 일어났습니다. 세수를 하고 아침밥을 먹고 있는 은빈이에게 내가 물었습니다.

"은빈아, 아빠가 어제 너무 감격했다. 우리 은빈이가 그렇게 속이 깊은 줄 몰랐어. 너도 돈이 많지 않은데 어떻게 네가 준 돈을 아빠가 쓸 수 있겠니? 그러니 다시 돌려줄게."
"아빠, 아녜요. 아빠가 백만원이나 이백만원쯤 돈 많이 벌면 그 때 돌려주라."
"너한테 몇 천원 밖에 없다며?"
"괜찮아요. 내가 돈 쓸 일이 어디 있나요."

자고 나면 은빈이 마음이 바뀔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은빈이가 준 만원권 지폐를 지갑에서 여러 차례 꺼내 만지작거리며 늦둥이의 사랑을 곱씹으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렇게 이틀이 지났습니다. 저녁 나절 뜻하지 않게 서울 처형에게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아내를 바꿔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장난기가 발동이 되어 나한테 말하라고 했지요. 그랬더니 내일이 아내 생일인데, 동생 생일 축하해 주려고 전화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내 생일을 모르고 있었냐고 묻더군요. 옆에서 아내가 다 듣고 있었습니다. 거실에 걸어놓은 달력을 보니 7월 3일(토)에 동그라미를 그려놓았고 김○○ 생일하고 써놓은 것이 보였습니다.

"당신, 내일이 생일이야?"
"달력에 표시해 놓은 것도 못 봤어요."

거실 바닥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던 은빈이가 어지럽혀 놓은 그림도구를 치우고 살며시 내 앞으로 오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낮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빠, 그저께 내가 준 돈 다시 돌려주면 안 될까요?"
"왜? 어디다 쓰려고?"
"엄마가 내일 생신이라는데 가만있을 수 없잖아요."
"……"

접시꽃이 은빈이 키보다 더 크게 자랐습니다.
접시꽃이 은빈이 키보다 더 크게 자랐습니다.박철
은빈이가 나에게 준 2만원은 써보지도 못하고 이틀 만에 고스란히 돌려주고 말았습니다. 자기 엄마 생일 선물을 사기위해 달라는데 어느 강심장 아빠가 안 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조금도 서운하지 않았습니다. 은빈이가 아내에게 무슨 선물을 할 것인가? 그것이 궁금해집니다.

"여보, 생일 축하해! 말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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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 기자는 부산 샘터교회 원로목사. 부산 예수살기 대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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