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정모 연재소설 <수메리안> 104

검은머리 사람들(하)

등록 2004.07.22 09:33수정 2004.07.22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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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장수는 권좌를 앞으로 끌어당겼다. 팔걸이 장식도 상아로 되어 있어 그만하면 에인에게도 어울린다 싶었다.

'에인이 권좌는 그대 손으로 바쳐야 한다.'


그가 소호 국에서 기병을 이끌고 떠나올 때 태왕이 당부한 말이었다. 그것은 자기도 바라던 일이었고 또 반드시 그래야 했다. 그는 권좌를 한 가운데로 옮겨둔 후 곧 에인을 찾아 밖으로 나갔다.

에인은 선인들과 함께 성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에인 앞에 다가가서 엄숙한 목소리로 아뢰었다.

"궁정 안은 모든 것이 정리되었습니다. 장군께서도 이제 들어가시지요."
"수고하셨소."

에인이 강 장수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이쪽이 먼저입니다."


강 장수는 먼저 집무실로 들어가 두 손으로 권좌의 등걸을 잡으며 말했다.

"여기에 앉으십시오. 이젠 장군님의 자리입니다."

에인이 다가왔다. 강 장수의 두 팔이 감격으로 떨렸다. 임무를 완수해서만이 아니었다. 에인은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자신에겐 특별한 기억 하나가 있었다. 에인과 자기 아들에 관한 일이었다. 자신의 아들은 에인보다 두 살이 어린데 그 아이가 이상한 병을 앓은 뒤 다리를 절게 되었고 그래서 친구들의 놀림이 싫어 늘 병영에 와서 놀았다.


그 무렵 에인이도 아버지를 따라 병영에 온 적이 있었다. 대저 아버지를 따라다니는 아이들이 그러하듯 에인이도 아버지가 일을 보는 사이 혼자 마당에서 놀았고 그때 강 장수는 검사장 안내역을 맡았다.

그가 에인 아버지를 모시고 군복 창고까지 다 돌아본 뒤 밖으로 나왔을 때 에인은 그 마당에 없었다. 병사들도 보지 못했다고 해서 그는 자기 아들이 잘 노는 병영 뒤 씨름 터로 가보았다. 에인이는 거기 모래바닥에 자기 아들과 함께 나란히 다리를 펴고 앉아 있었다. 에인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물어보았다.

'너희들 지금 무슨 놀이를 하고 노느냐?'
'놀이가 아니옵니다. 지금 이 아이의 다리를 저와 같게 해주고 있나이다.'

에인이 대답했다. 그때 강 장수는 어린 에인으로부터 깊은 감동을 받았다. 물론 그랬다고 해서 자기 아들의 다리가 나아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여느 아이들처럼 다리가 짧다고 타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짧은 다리를 자신과 같이 해주려 했던, 함께 쭉 뻗고 있으면 상대의 다리도 자신과 같아진다고 믿었던 그 순결한 마음에서 강 장수는 그 보답으로 하늘의 기둥이라도 뽑아다 주고 싶었는데,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인 것 같았다.

한데 에인이 자리에 앉다말고 벌떡 일어났다. 강 장수가 놀라서 물어보았다.

"바닥에 뭐가 있습니까?"
"아니오, 강 장수, 지금 이 자리에 앉는다면 그것은 이 자리를 훔치는 것이오. 보다도 먼저 군주를 찾아야 해요."

에인이 그 앞을 서성이며 말했다. 강 장수가 대답했다.

"이곳 소식을 들었다면 군주는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오, 그가 만약 소식을 들었다면 필시 다른 나라 군사들을 청해 올 것이오. 가족들이 여기 있지 않소."
"그럴 수도 있겠군요. 그럼 제가 나가서 군주를 잡아오겠습니다."

강 장수는 매우 아쉬웠다. 그 순간이 태왕으로부터 받은 임무도 완수하고 또 에인의 지시대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승전임을 정중히 알림으로서, 가장 큰 영광을 바치는, 생애의 가장 멋진 순간이 될 줄 알았다.

그러나 강 장수는 조급한 사나이가 아니었다. 그는 곧 '시간이 조금 지체될 뿐이지'라고 늦춰 생각하며 당장 밖으로 나가 제후를 찾았다.

"군주를 잡아들여야 하오. 어서 수소문해서 길을 아는 사람을 찾도록 하시오. 급하오."

그리고 뒤이어 책임선인에게 지시했다.

"성안을 지키고 있는 기병들을 전원 빼오고 그 자리에 보병들을 대치하라. 다음
안내선인은 곧 은 장수에게 달려가서 이쪽 상황을 알리고 그쪽의 기병 반을 이쪽에 배치하라고 전하라."

선인 둘이 황급히 떠난 얼마 후 제후가 길 안내자를 데리고 왔다. 약제실에 숨어 있던 군주의 집사였다.

"군주는 자그로스 산에 갔는데 오늘 돌아올 것이랍니다."
"자그로스 산? 그럼 강 건너가 아니오?"
"강 건너 다래트 쪽을 지납니다."
"그래요? 그럼 제후는 그 사람과 함께 길 안내를 맡으시오."

그때 실내에 있던 기병들이 몰려 나왔다. 강 장수는 그들의 무장태세를 점검한 뒤 그대로 출발 명령을 내렸다.

말들이 성문 밖으로 달려 나갔다. 거리엔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침략 소문으로 주민들은 그새 모두 집안으로 숨어버린 것이었다. 강 장수 일행은 말발굽소리로 그 빈 거리를 진동시키며 도시를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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