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견공 부부의 아름다운 순애보

안흥 산골에서 띄우는 편지 (18)

등록 2004.07.30 18:46수정 2004.07.31 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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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 배추밭을 지켰던 부부 개


오늘이 중복 날로, 이름값을 하는지 올 들어 가장 무더운 날씨 같다. 아마도 어제 오늘은 숱한 견공들의 제삿날이었을 거다. 사람들이 더위에 지친 몸을 추스르는 데 멍멍탕보다 더 좋은 음식은 없다고 한다. 그래서 보신탕이라는 별칭까지 생겨난 모양이다. 하지만 필자는 아직 그 맛을 모른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람과 가장 가까이 지내는 동물은 견공(개)들이 아닐까? 독일 사람들은 개를 너무 좋아하는 나머지 아침 산책길에 이웃집 개를 흠 잡으면 그게 두 집간에 싸움으로 발전할 만큼 개는 가족의 일원으로 생활하고 있다.

가끔 해외 토픽을 보면 죽음의 직전 노인들이 자기가 데리고 살았던 개에게 유산을 물려 준다는 유언 얘기도 심심찮게 보도되곤 한다.

a 순애보의 주인공 흰발이(오른쪽)와 흰돌이

순애보의 주인공 흰발이(오른쪽)와 흰돌이 ⓒ 박도

옆집 노씨네 부부는 농사꾼으로 주로 고랭지 배추와 무를 길러서 서울 가락시장에 내다 판다. 산골 밭에 배춧잎이 한창 좋을 때는 밤이면 노루나 멧돼지, 산토끼와 같은 산짐승들이 애써 가꾼 배추를 뜯어 먹기에 골치를 썩였다.

하루 이틀도 아니라 날마다 지킬 수도 없는 일이기에 오래도록 생각한 끝에 나온 발상이 개를 그곳에다 묶어서 기르는 것이었다. 그랬더니 과연 한밤중에 산짐승이 얼씬도 않았다.


그래서 노씨는 배춧잎이 한창 무성할 때는 당신 개를 데려다 산골 밭둑에다가 묶어 놓고 길렀다. 마침 지난해 여름 방학 때 필자가 이 마을에 와서 지낼 때였다.

그날이 말복 날이었는데 노씨 말이 이른 새벽 산골 밭에 개밥을 주러 갔다. 그런데 개 한 마리(암캐로 이름이 흰발이)가 없어져서 온 마을을 뒤지고 다녀도 없었다고 했다.


집으로 돌아와서 가만히 생각하니 남은 한 마리(수캐로 이름이 흰돌이)조차 이 복날 누군가 데리고 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 길로 다시 산골 밭으로 갔더니 없어졌던 흰발이가 제 자리에서 당신을 보고 좋아서 펄쩍펄쩍 뛰더라는 것이었다. 아마 어느 개도둑이 주인이 식전 댓바람부터 설치는 걸 보고 지레 겁을 먹거나 양심의 가책을 느껴서 도로 제자리에 가져다 놓았나 보다고 추리했다. 개도 그날 자기가 용궁 갔다가 살아온 줄 아는 모양이라고 했다.

노씨 부부가 개 얘기를 감칠맛이 나게 잘도 하거니와, 듣고 보니 재미도 있어서 곧장 두 마리 개를 데리고 산골 밭에 가 보았다.

서울로 돌아간 후 그 이야기를 한 편의 글로 써서 필자가 연재하고 있는 <전원생활> 2003년 11월 호와 <오마이뉴스> 2003년 9월 23일 자에 “산골 배추밭을 지키는 흰돌이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실었다. 또한 필자가 근무하던 학교의 주보에도 그 이야기를 올린 바, 동료 직원도 학생들도 모두 재미있어 하면서 개의 안부를 자주 물었다.

a 새끼를 낳다가 죽은 흰돌이, 산골 배추밭을 지킬 때.

새끼를 낳다가 죽은 흰돌이, 산골 배추밭을 지킬 때. ⓒ 박도

아내를 따라 죽은 수캐 이야기

두 달 후쯤 필자가 다시 안흥 마을로 내려오면서 곧장 노씨 집에 들러 개의 안부부터 물었다. 그런데 노씨 부부가 모두 개 이야기에 풀이 죽어 있었다.

“선생님, 제 잘못으로 그만 다 잃어 버렸어요. 그렇잖아도 얼마 전에는 원주 방송국에서 면사무소로, 면에서 우리 집으로 개 이야기가 사실이냐고 방송에 내 보내겠다고 문의까지 왔어요.”
“네에?!”

“흰발이란 놈이 새끼를 낳던 날이었어요. 초저녁부터 낳기 시작했는데 다섯 마리를 낳았을 때 마침 옆집 아우가 형님 술 한 잔 하자고 오래요. 그래서 별일 있겠느냐고 한 30분 다녀왔지요. 그런데 돌아와 보니 여섯 번째 놈이 거꾸로 나오다가 걸려버린 거예요. 어미가 안간 힘을 쓰다가 어미마저 숨을 거둔 거예요.

죽은 어미와 새끼를 모두 아우네에게 주고 살아있던 새끼 다섯 마리까지 아우 보고 기르라고 다 줘 버렸어요. 그런데 그 옆에서 모든 걸 지켜보았던 수캐 흰돌이란 놈이 그날부터 잘 먹지도 않고 시름시름 앓더니 그 놈마저 닷새 만에 죽어 버렸어요. 아우 집에 보낸 새끼 다섯 마리도 매일 한두 마리씩 모두 다 죽었어요. 참 개란 놈이 보통 영물이 아니라요. 술이 원수지요.”
“…….”

개집에는 한 마리도 없었다. 노씨 부부는 졸지에 개 여덟 마리를 모두 잃어 버렸다. 그런데 신기한 일은 수캐 흰돌이의 죽음이다. 암캐가 죽자 밥도 먹지 않고 시름시름 앓다가 암캐를 따라 죽었다는 개 이야기는 금시초문이었기 때문이다.

흔히 사람들은 정숙치 못하거나 부도덕한 짓을 할 때, 가장 많이 앞에다가 갖다 붙이는 동물이 개다. 어려서 시골에서 자랄 때 이따금 암캐가 새끼를 낳으면 여러 종류의 색깔 새끼를 낳기도 하는데, 그러면 어른들은 저 검은 강아지 애비는 앞집 검둥이요, 저 흰 놈 애비는 뒷집 흰둥이라고 했다.

아닌 게 아니라 학교 가는 길이나 돌아오는 길에 보면 암캐가 하루는 이 놈하고 짝짓기를 하고, 다음 날에는 또 다른 녀석과 짝짓기를 하곤 했다. 암캐만 그런 게 아니라, 수캐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사람도 아무나 사귀고 파트너를 자주 바꾸면 앞에다가 개X라는 불명예스런 호칭을 붙인다.

하지만 이제까지 내가 가졌던 고정관념과는 달리 암캐를 따라 죽는 수캐의 그 순정이 사람보다 더 아름다운 부부애로 감동치 않을 수 없었다. 그들 부부는 평생 동안 서로밖에 몰랐다. 긴 여름날 아무도 없는 산골에서 하루 종일 마주 보면서 지냈다. 어쩌다가 주인이 와서 먹이를 주고 잠깐 목줄을 풀어줄 때 서로 만나서 사랑을 나누곤 했다.

원천적으로 다른 개를 넘볼 수도 없었다. 흰발이와 흰돌이는 오직 둘이서만 고독한 나날을 보내며 마주 보며 대화를, 눈빛을, 사랑을 나누었다. 그래서 마침내 그들의 순수한 2세가 태어나는 날이다.

초산이지만 아내는 자식들을 쑥쑥 잘도 낳았다. 그런데 다섯 마리까지 잘 낳던 아내가 여섯 마리째에서는 새끼가 자궁에서 나오지 못하자 살려 달라고 비명을 지른다.

자기가 가서 입으로 물어서 새끼를 꺼내고 싶지만 주인이 목줄을 묶어 놓은 때문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주인은 그런 것도 모르고 옆집에 가서 술잔만 들이키고 있다.

아내는 계속 죽는다고 비명을 지르다가 그만 지쳐버렸는지 소리도 없다. 목줄을 잡아당겨보아야 내 목만 조일 뿐이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사람들, 정말 너무하다. 저희들은 자식도 낳지 않나. 이럴 때라도 내 목줄을 좀 풀어 주면 안 되나?

헐떡이던 아내가 흰눈을 뜬 채 다섯 새끼를 남긴 채 숨을 거뒀다. 그리고 하루에 한두 마리씩 새끼들이 “엄마 없는 세상이 싫어!”하면서 아내를 따라갔다. 곰곰 생각할수록 남편 노릇도 애비 노릇도 하나도 못했다.

더 살아 봐야 사람들에게 개 취급밖에 더 받겠는가? 실컷 부려 먹고 복날 개 패듯 두들겨 패서 죽일 테다. 그래 나도 순정파답게 죽자. 더 이상 열 받아서 못살겠다.

그리고 아내 흰발이가 죽은 지 닷새 후, 흰돌이는 아내를 따라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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