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결 같았던 우리 가족의 3박4일 중국 여행

등록 2004.08.26 15:11수정 2004.08.29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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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자체는 시작도 끝도 없는 것이지만, 그 안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과 이루어지는 모든 일들은 한결같이 시작과 끝이 있는 법이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기 마련이고, 지나고 나면 모두가 한 순간이다. 그래서 모든 일의 시작과 끝은 '동시(同時)'이기도 하다.


a '명13릉'중의 한 건물 앞에서 가족 모두. 맨 왼쪽의 기를 들고 있는 이는 현지 가이드 한연희씨

'명13릉'중의 한 건물 앞에서 가족 모두. 맨 왼쪽의 기를 들고 있는 이는 현지 가이드 한연희씨

우리 가족의 3박4일 중국 여행도 시작과 끝이 동시였다. 지난 21일부터 24일까지의 일정이 순식간에 꿈결같이 지나가 버렸다. 그래서 그 시간은 벌써 아련한 그리움이 되었다.

비록 이상한 허무감 같은 것이 가슴에 맴돌지만, 우리 가족의 중국 여행은 참으로 즐겁고도 재미있었다. 여행에 참여한 가족 모두의 가슴에 좋은 추억이 자리하게 되었다.

최초가 되는 이번의 '범(範) 가족' 중국 여행에는 모두 12명이 참가했다. 올해 여든 한 살이신 어머니를 비롯한 우리 가족 5명, 가운데 제수씨와 초등학생들인 두 자녀, 가운데 누이동생과 초등학생 딸, 중학생인 생질, 사촌형수님 한 분이었다.

처음 가족 여행을 준비할 때는 14명이었으나 사촌형수님 한 분이 포기를 했고, 대학생 생질은 취직에 따라 일본 연수를 가게 되어서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초등학생 3명을 포함한 12명으로 '단체' 요건이 되었다. 성수기를 피한 데다가 단체를 이루었기 때문에 비교적 싼 비용으로 중국 여행을 할 수 있었다.

비용 문제와 관련하여 성수기를 피하면서 무더위가 한풀 꺾이는 시기를 택하자니 고등학생 딸아이와 중학생인 아들녀석과 생질은 개학과 동시에 이틀을 결석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내가 일찌감치 세 아이의 담임 선생님께 전화로 사정을 말씀드렸다. 물론 수업 결손은 피할 수 없는 것이지만, 이런 경우에는 '현장체험학습'으로 간주해서 결석으로 처리되지는 않는다고 했다.


초등학교 1학년인 일곱 살 손녀부터 여든 한 살 할머니까지 포함된 우리 가족 12명 중 10명은 태안에서부터 내 12인승 승합차로 함께 출발했다. 오후 5시까지 인천공항으로 와달라는 여행사의 부탁에 따라 우리는 12시에 태안을 출발했다.

인천공항까지 2시간 30분 정도 걸리는데, 주말이라 도로에 차들이 밀릴지도 모르고 또 만약 사고 차량이라도 있게 되면 시간 손실이 생길 것을 감안해서 일찌감치 출발을 한 것이었다.


중간에 화성휴게소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그리고 4시쯤에 인천공항에 도착하니 경기도 안산에서 사는 누이동생 모녀가 미리 와 있었다. 12명 가족 중에서 역시 초등학생 세 아이가 가장 즐겁고 설레는 표정이었다. 오랜만에 보는 올해 6학년인 안산의 생질아이는 외삼촌 덕분에 처음 비행기를 타게 되었다며 제법 어른스럽게 내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기도 했다.

우리는 무려 1시간 연착 후 8시 30분에 뜨는 중국 비행기를 탔고, 북경 공항에서 '지규빈 가족'이라는 팻말을 든 여성 가이드 한연희(28)씨와 만났다. 한연희씨는 용정시 출신인 연변 동포로 아직 미혼이라고 했다.

우리 가족으로만 이루어진 단체의 총 인원이 겨우 12명인데도 우리를 마중 나온 버스는 중형이었다. 자리가 많이 남아서 우리는 정말 편하게 이동을 할 수 있었다.

가이드 한연희씨로부터 3박4일 여행 일정과 관련, 여러 가지 설명을 듣고 첫날은 호텔에 투숙하는 것으로 일정을 마쳤다.

둘째 날 오전에는 첫 번째 코스인 '명 13릉'을 관광한 후 옥(玉)을 생산 판매하는 곳과 한방 파스와 연고를 생산 판매하는 곳을 들렀다. 아무도 옥을 사지는 않았지만, 파스와 연고를 산 사람은 여럿이었다.

a 자금성 안의 한 궁 앞에서 가족 모두

자금성 안의 한 궁 앞에서 가족 모두

내가 가이드 한연희씨에게 쇼핑 가게에는 들르지 않을 수 없느냐고 묻자, 그건 가이드 임의로 하는 일이 아니라고 했다. 중국 정부에서 지정한 일이고 또 보고되는 일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오후에는 '용경협'과 만리장성을 구경했다. '소(小)계림'으로도 불린다는 용경협의 호수를 배를 타고 유람했다. 깎아지른 듯한 수많은 단애로 첩첩이 이루어진 계곡 사이를 돌 때 내 노모는 탄성을 연발했다. "여기엘 오지 않았더라면 큰 손해날 뻔했다"고 말해 모두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또 케이블카를 타고 만리장성을 볼 때는 내 노모께서 "옛날에 순전히 인력으로 이걸 만드느라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을까. 수많은 사람들의 뼈를 밟고 선 기분이네"라고 말해 모두 숙연한 기분이 들었다.

만리장성에서 북경으로 돌아온 다음 우리 가족은 모두 함께 발 마사지를 받았다. 12명 전원이 한 방에서 1시간 정도 상체 안마에 이어 발 마사지를 받았는데, 모두 함께 여러 번 웃음을 터뜨렸다.

음양 법에 따라 여자들에게는 남자들이, 남자들에게는 여자들이 붙어서 발 마사지를 해주는데, 일곱 살 규빈이가 "간지럽다"며 깔깔거려서 모두 웃고, 어머니가 "나는 발 마사지가 전기 같은 것으로 어떻게 해주는 것인 줄 알았더니 순전히 손으로만 해주는 것이구먼. 괜히 미안한 마음도 생기네"해서 또 모두 웃었다.

셋째 날은 오전에 '이화원'을 구경했다. 중국 청조 말의 서태후가 30만 명의 인력을 동원하여 만들었다는 인공호수를 배를 타고 건너며 이화원의 전경을 보기도 했다.

이화원을 가고 오면서 가이드 한연희씨는 이화원을 지은 서태후에 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이야기들을 특히 내 어머니가 귀담아들었다. 서태후가 늙지 않기 위해 아기를 갓 낳은 젊은 산모들을 데려다가 붉은 천으로 온몸을 감싸게 하고 침대 곁에 무릎 꿇려놓고 누워서 젖꼭지를 빨았다는 이야기는 어머니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것 같다.

어머니는 그 이야기를 머리에 잘 담아두었다가 밤에 룸메이트인 조카며느리에게 들려주었다고 했다. 조카며느리가 낮에 버스에서 잠을 자느라 그 얘기를 듣지 못했는지 전혀 기억을 하지 못해서….

이화원 다음에는 진주를 생산 판매하는 곳을 들렀다. 어머니께 진주목걸이 하나를 사드렸다. 고작 2만 원짜리 목걸이건만, 한국에서는 10만원도 넘는다고 하시며 어머니는 무척이나 좋아하셨다. 아내에게는 팔찌 하나를 선물했다.

다음에 들른 곳은 북경대학 중의과대학에서 정년 퇴임한 중의(中醫)들이 진맥을 해준다는 '유붕관(有朋館)'이었다. 한국말을 잘하는 중년 남의(男醫)로부터 중의학에 대한 강의를 듣고 할머니 중의에게서 진맥을 받았다.

그리고 오후에는 자금성과 천안문 광장을 구경했다. 원래는 천안문 광장을 거쳐 자금성으로 들어갈 예정이었으나 관광객이 밀리는 사정을 고려하여 뒤에서부터 앞쪽으로 이동했다.

자금성과 천안문 광장을 가로지르는 그 긴 길을 여든 한 살의 내 노모는 무난히 걸어내었다. 그것은 예순이 훨씬 넘은 데다가 관절 계통의 오랜 지병을 가지고 있는 사촌형수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자금성과 천안문 광장을 걸으며 마음 속으로 내내 어머니와 사촌형수님께 고마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천안문 광장 근처에서 다시 버스를 탄 다음 시간 관계상 명나라 때부터의 상가(商街)라는 '왕부정거리' 구경을 포기하고 우리 가족은 예술관으로 가서 서커스를 구경했다.

a 만리장성 위에서 딸아이와 함께

만리장성 위에서 딸아이와 함께

지난 3월 금강산에 갔을 때 보았던 북한 서커스보다 전체적으로 좀 약하다는 느낌을 가지면서도 나는 틈틈이 우리 아이들을 둘러보았다. 넋이 빠진 듯한 아이들을 보면서 혼자 웃음을 짓곤 했다.

소수민족인 '다이족'이 운영한다는 '태가촌'이라는 데서 저녁식사를 한 다음 우리는 호텔로 가는 도중 중국의 전통 차(茶)를 생산 판매하는 곳엘 들렀다. 연변 출신 교포라는 묘령의 아가씨로부터 차에 대한 설명을 듣고, 사촌형수님과 제수씨는 차를 샀다. 나도 딸아이가 원하는 고감로차를 한 병 사주었다.

다음날은 마지막 날이었다. 3박4일이 순식간에 지나갔다는 아쉬움 같은 것이 아침부터 감돌았다. 일곱 살 규빈이와 오빠 규왕이는 벌써 집에 가는 날이냐며 집에 가기 싫다는 말도 했다.

우리는 오전에 천단공원을 구경했다. 명조 때부터 황제가 옥황상제께 제를 지내던 곳이라고 했다. 역시 규모가 장대하고도 거창했다. 여전히 수많은 관광객들로 북적이는 모습이었다. 어제의 자금성보다는 덜하지만 역시 긴 걸음이 필요한 곳이었는데 어머니와 사촌형수님은 어제처럼 잘 걸어주었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갖가지 실크 제품을 생산 판매하는 곳을 들렀다. 누에고치에서 실을 뽑아내는 장면을 오랜만에 볼 수 있었다. 아이들은 신기해하는 표정이었다. 나는 내후년에 딸아이가 대학에 진학하면서 서울로 거처를 옮기게 되면 주고 싶다는 어머니의 뜻에 따라 누에고치로 만든 일인용 솜을 샀다.

그리고 우리는 중국에서의 마지막 식사를 하고 북경공항으로 향했다. 버스 안에서 나는 마이크를 잡고 가족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선 좋은 날씨와 기온으로 우리 가족의 중국 여행을 돌보아주신 하느님께 감사합니다. 우리 가족의 즐거웠던 3박4일 중국 여행 일정이 이제 끝이 납니다. 중국에 온 것과 가는 것이 동시 같습니다. 왔으니 돌아가는 것이야 정한 이치입니다만, 이 '순간' 속에서도 우리는 하느님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찰나'를 살면서 그 허무감 속에서도 시간의 주인이신 영원하신 하느님을 생각한다는 것은 실로 복된 일입니다.

3일 동안 중국의 관광지 여러 곳을 다니면서 관광객들의 모습도 눈여겨보았습니다. 유감스럽게도 노인 관광객의 모습을 거의 볼 수 없었습니다. 노인들만의 단체관광은 더러 있다는 말은 들었습니다만, 노인도 함께 하는 가족의 오붓한 모습을 내 눈으로 볼 수 없었던 것은 분명히 서운한 일이었습니다.

전에 홀로 외국 여행을 할 적마다 미안한 마음으로 가족 생각을 많이 했지요. 지난해 여름에 우리 가족이 백두산에 갈 때는 어머니를 모시고 가지 못해서 죄스러운 마음이 컸지요. 그런데 이번에 비로소 어머니를 모시고 온 가족이 외국 여행을 할 수 있어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더욱이 이렇게 누이동생과 제수씨, 조카들과 생질들, 사촌형수님까지 함께 하셨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릅니다.

a 이화원의 장대한 회랑 앞을 어머니, 아내와 함께 거닐다.

이화원의 장대한 회랑 앞을 어머니, 아내와 함께 거닐다.

늙으신 어머니께 효도를 하고, 어린 자식들과 조카들에게 좋은 추억거리를 만들어주고, 또 나 자신도 뭔가 심기일전하는 마음을 가져보기 위해서 우리 가족의 중국여행을 계획했습니다만, 어머니께 무리가 없을지 속으로는 걱정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우리 어머니께서 여든이 넘으신 연세에도, 또 2001년에 대장암 수술을 받으신 몸임에도 불구하고 기운이 팔팔하신 모습을 보여주시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우리 다같이 우리 어머니께 감사의 박수 한 번 쳐 드립시다."

이렇게 어머니를 시작으로 가족 모두에게 일일이 박수를 선물했다. 일일이 박수를 유도하면서 개인 별로 여행 중에 있었던 에피소드를 곁들여 소개하니 버스 안은 웃음으로 가득했다.

나는 나에게도 박수를 유도했다. 이번 여행을 기획하고 추진한 '아무개'씨에게도 감사의 박수 한 번 쳐주자고 하니 모두들 깔깔 웃으며 박수를 보내 주었다. 아이들 중에는 "속보인다"고 하는 녀석도 있었다.

마지막으로 여행사 직원 김백섭 과장과 버스 기사 왕씨와 가이드 한연희씨에게 감사의 박수를 선물했다. 가족들은 그새 정이 담뿍 든 가이드 한연희씨와 헤어지는 것을 몹시 섭섭해했다.

우리는 북경공항에서 오후 3시 15분발(중국 시간) 비행기를 탔고, 5시 40분쯤(한국 시간)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장기주차장에다 놓은 내 승합차에 12명 가족과 여행사 직원 김 과장도 함께 타고 인천공항을 빠져나왔다. 안산에 잠시 들러 누이동생 모녀를 내려주고, 화성휴게소에서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 예산군 덕산면 사람인 여행사 김 과장을 이웃 동네인 해미에다 내려주고, 해미성지에 들러 두 통의 물을 길었다. 다음날 새벽에 딸아이를 천안으로 데려다줄 때 원룸의 주인댁에 드릴 물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밤 10시 30분쯤 태안에 도착했다.

이로써 3박4일의 중국 여행 일정이 모두 끝났다. 그 즐거웠던 시간은 금세 지나가고 이제는 그 모든 일들이 추억의 자리에 남게 되었다. 모두에게 좋은 추억이 될 것은 분명하다. 우리 가족의 중국 여행을 기획하고 추진한 내게 가족 모두는 감사했다. 모두의 그 좋은 추억 속에는 내게 감사하는 마음도 오래 자리할 것이다.

여행 중의 셋째 날 저녁에 나는 버스 기사와 가이드 한연희씨에게 별도의 팁을 주었다. 여행사 김 과장은 굳이 그럴 필요 없다고 했지만…. 여행사에서 그들에게 지급한 각 30만원 금액의 10분의 1인 3만원씩을 주었는데, 어머니는 너무 적게 주었다고 했다. 가이드만이라도 더 주라고 했다. 나는 마지막 날 아침에 어머니의 지시라고 하면서 한연희씨의 가방에다가 2만 원을 더 찔러주었다.

단 4일 동안 함께 했던 그 인연과 정을 귀하게 여기고, 가이드라는 직업이 무척 고된 직업임을 아신 나머지, 또 고향인 용정을 떠나 먼 북경에서 생활하는 한연희씨의 처지를 가엾게 여기신 까닭에 넉넉지 못한 형편에도 팁을 한푼이라도 더 주고 싶어하신 내 어머니의 따뜻한 마음도 내 가슴 속에 오래 자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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