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감사합니다"

안흥 산골에서 띄우는 편지 (24) - 고구마를 캐면서

등록 2004.08.28 19:42수정 2004.08.29 12:10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a 넝쿨에 달린 고구마

넝쿨에 달린 고구마 ⓒ 박도

자연은 거짓이 없다고 하더니, 봄이 지나면 여름이 오고, 여름이 지나면 가을이 틀림없이 온다.


며칠 전부터 아궁이에 군불을 지피고 잔다. 풀벌레들이 가는 여름이 아쉬운 양 한층 더 요란하게 목청을 돋구고 있다.

30여 년간 태우던 담배도 끊어보니까 보름에서 한 달 사이가 가장 힘들더니, 30여 년간 눈만 뜨면 학교에 가던 출퇴근 생활이 하루아침에 바뀌고 40여 년 간 살아왔던 서울생활을 딱 자르고 이 산골마을로 내려온 지 5개월, 요즘 무척 힘들다.

생활도 나태해지고 글밭 가꾸는 일도 생각처럼 잘 되지 않는다. 이럴 때는 훌쩍 어디론지 떠나면 좋으련만 그것도 마음대로 잘 되지 않는다. 텅 빈 집에 우두커니 앉아서 아테네 올림픽 중계방송을 맥없이 보고 있는데 뜻밖에도 멀리서 처제와 처조카가 찾아왔다.

산골마을에 대접할 것도 없어서 궁리 끝에 고구마를 캤다. 고구마 잎과 줄기를 걷어내고 호미로 둑을 헤치자 새빨간, 주먹만한 고구마가 넝쿨째 달려 올라왔다. 조카가 아주 신기해 하면서 심은 지 몇 달만에 캐느냐, 거름은 뭘 주었냐는 둥 여러 질문을 쏟았다.

a 지난 봄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시들한 고구마 순

지난 봄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시들한 고구마 순 ⓒ 박도

지난 봄, 고구마 순을 밭에다 심어두고 순이 뻗어나지 않아서 무척 애태웠다. 두 번 세 번 흙을 다져주고 물을 주면서 공들여 길렀다.


갓 캔 주먹만한 고구마를 손에 잡고 나는 마음 속으로 "하느님, 감사합니다"라고 중얼거렸다. 이 얼치기 농사꾼이 심은 농작물에도 열매를 맺어주시니 얼마나 고마운가.

며칠 전에는 잠시 날이 갠 틈을 타서 옥수수를 꺾어서 이웃과 나눠먹기도 하고 서울 이웃집에 나눠주기도 했다. 우리집 옥수수를 맛본 사람들이 하나 같이 맛이 있다고 인사를 옥수수 값보다 더했다. 아닌 게 아니라 내 땀방울이 젖었기 때문인지 엄청 맛있었다.


심을 때는 옥수수를 꺾으면 여기 저기 맛보여야겠다고 작정했지만 공교롭게도 계속 날이 궂었고, 막상 거둬들여 보니 양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한 그루에 하나 아니면 두 자루가 고작이라 모두 합해야 백여 자루에 지나지 않았다.

막상 농사를 지어보니까 옥수수 한 자루가 일천 원도 비싸지 않게 생각되었다. 그런데 시장에서는 한 자루에 500~600원에 지나지 않는다.

시장에서 만난 한 할머니의 이야기다. 용돈이나 마련하고자 이른 아침 텃밭에 가서 깻잎을 한 보자기 땄다. 장에 내다 팔려고 집을 나서는데 손자 녀석이 "할머니, 나도 따라가"하기에 데리고 나왔다.

한나절 걸려 팔고 나니까 4000원이 손에 들어왔다. 손자가 목마르다고 하여 주스 한 병 사주고 두 사람 차비하니까 1000원짜리 한 장 남는다고 푸념했다.

요즘은 농사도 투기라고 한다. 우선 작물 선택을 잘 해야 한다. 풍년이 들면 값이 폭락해서 재미를 못보고 흉년이면 그나마 시장에 내다 팔 것이 없기에 빈손이란다. 다른 이는 흉년인데 나만 잘 지어야 소득이 많다고 하니 고약한 심보가 아닐 수 없다. 막 고구마를 캐고 돌아오자 앞 집 노씨 부인이 왔다.

a 텃밭에서 거둔 옥수수

텃밭에서 거둔 옥수수 ⓒ 박도

영감님이 올 농사를 망쳐 요즘 걸핏하면 당신에게 신경질을 내서 속이 몹시 상한다고 했다.

지난 번 양배추는 뿌리에 무슨 병이 들어 씨앗 값 정도밖에 수익을 올리지 못했고, 곧 이어 심은 무는 그동안 날씨가 너무 뜨거워서 다 녹아버렸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서 살림에 보탤 요량으로 내일부터는 찐빵 집에 빵 만드는 품일에 나가야겠다면서, 남자들은 그저 밥 한 술 먹고 밖에 나가야 하는데 하루 종일 집안에 있으니 당신까지 힘들다고 한바탕 푸념을 늘어놓고는 집으로 돌아갔다.

어찌 들으니 나에게도 해당되는 말 같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사람, 이럴 때는 6개월이나 한 일 년 겨울잠을 자는 약을 개발하면 요즘 같은 불황에는 아주 불티나게 잘 팔릴 게다. 부부 싸움도 이혼도 훨씬 줄어들 것이다.

그 새 조카가 고구마를 삶아서 쟁반에 담아왔다. 밤고구마로 맛이 아주 좋았다. 순간 이런저런 수심이 모두 사라졌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얼굴 창백한 계산원을 보고 손님이 한 행동 얼굴 창백한 계산원을 보고 손님이 한 행동
  2. 2 유럽인들의 인증샷 "한국의 '금지된 라면' 우리가 먹어봤다" 유럽인들의 인증샷 "한국의 '금지된 라면' 우리가 먹어봤다"
  3. 3 일타 강사처럼 학교 수업 했더니... 뜻밖의 결과 일타 강사처럼 학교 수업 했더니... 뜻밖의 결과
  4. 4 알고도 대책 없는 윤 정부... 한국에 유례 없는 위기 온다 알고도 대책 없는 윤 정부... 한국에 유례 없는 위기 온다
  5. 5 체코 대통령, 윤 대통령 앞에서 "최종계약서 체결 전엔 확실한 게 없다" 체코 대통령, 윤 대통령 앞에서 "최종계약서 체결 전엔 확실한 게 없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