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판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 시민단체는 고민중

[정치 톺아보기 69] 국정원의 속내와 시민단체의 속내

등록 2004.08.31 09:13수정 2004.08.31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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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일 오후 서울 내곡동 국가정보원 면회실 앞. 인권운동사랑방 대표를 역임한 박래군 인권운동사랑방 상근활동가, 박석운 전국민중연대 집행위원장, 그리고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회장 이석태 변호사 등 인권·노동운동으로 잔뼈가 굵은 시민·인권·민중단체 관계자들 8명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피의자로서 '조사'를 받거나 변호사로서 '접견'을 하기 위해 국정원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접수'하러 가는 길이었다. 국정원 수사관이 피의사실을 첨부해 '소환'을 통보했거나, 역시 국정원의 사법경찰관이 피의자에 대한 '신병 유치' 사실을 통보한 것이 아니라 바로 국정원장이 이들을 오찬에 정중하게 '초청'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은 간단한 신원 확인절차를 거친 후에 국정원 직원의 안내를 받아 인근 '국정관'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이들은 고영구 국정원장과 오찬을 함께 하면서 시민단체가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이하 발전위) 구성을 제안받았다.

'허원근 일병 의문사 사건'에서 얻은 교훈

고 원장의 제안은 아무리 그가 인권 변호사 출신이라고 하더라도 도무지 국가정보기관의 수장으로서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파격적이었다.

우선 발전위는 시민·인권단체나 NGO 쪽에서 참여해야 구성이 성립하게 돼 있다. 즉 고 원장은 시민·인권단체 인사들의 참여가 전제되지 않고서는 독자적으로 진상규명 기구를 가동할 뜻이 없음을 천명하고 있다.

이는 국방부와 관련된 ·허원근 일병 의문사 사건·에서 얻은 교훈이다.


유족들과 인권단체들이 의문사한 허원근 일병의 타살 의혹을 제기하자 국방부는 의혹을 해소하려는 차원에서 군 자체 특조단을 구성해 허 일병 사건을 파헤쳤고 그 결과를 발표했다. 그러나 자체 조사는 오히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로부터 은폐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더 나아가 심지어는 '권총 협박설' 폭로를 계기로 두 국가기관이 감사원의 감사를 받는 등 '너 죽고 나 살자'는 식의 극한적 갈등 상황으로까지 전개되었다.

국정원은 또 "모든 조사 대상은 국정원이 과거 진상규명을 위해 설치를 추진하고 있는 발전위에서 결정할 것"이라고 말해, 이 위원회에 국정원 관련 과거사 조사의 전권을 위임할 것임을 강력히 시사했다.


고 원장의 제안은 쉽게 말해 '국정원판 이제는 말할 수 있다'를 시민단체의 '협찬'을 받아 찍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시민·인권단체들은 국정원 때문에 고민이 많다. 차라리 '예전 국정원' 같으면 이런 고민을 안하는데 '최근 국정원'의 고해성사(告解聖事)를 하고야 말겠다는 그 '진정성' 때문에 안해도 될 고민을 하게 된 것이다.

국정원과 운명을 함께 할지도 모르는 상황

우선 시민단체들에게는 국정원과 운명을 함께 할지도 모르는 상황에 처한 것이 '고민박두'이다. 인권운동으로 잔뼈가 굵은 박래군씨는 그 고민을 이렇게 말한다.

"이번에 어두운 과거를 털고 가겠다는 국정원장의 진정성에 대해서는 다들 긍정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부담들이 있다. 국정원의 제안을 받아서 (함께) 간다는 것이 정말 국정원하고 '운명'을 같이 하는 것인데 왜 부담스럽지 않겠냐. 우리(인권운동사랑방) 같은 경우도 진짜 (제안을) 받아야 될지 말아야 할지 정말 고민된다."

오랜 기간 노동운동 판에서 심신이 단련된 박석운 전국민중연대 집행위원장은 좀더 신중하다.

"시민단체들의 견해는 거의 같지만 국정원이 양다리를 걸친 상황일 수도 있기에 조금 더 두고 보는 것이다. 어떤 방식으로 접근할지 등을 포함해 아직 '점검'이 필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어쨌든 지금 검토는 심도 있게 하고 있다. 그러나 성사 가능성은 예단할 수 없다. 현재로서는 아주 조심조심 이런저런 사안들을 검토하는 단계이고 내부논의도 아직 공개적으로 안하고 있다."

그 다음은 국정원의 정체성을 못믿어서가 아니라 좀더 현실적 고민이다. 그 가운데 하나는 노무현 대통령이 방향을 제시한 이른바 '포괄적 과거사 진상규명 특별위원회'와 아직 그 설치 여부가 불확실한 '제3기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와의 상충 가능성이다.

시민운동 단체의 시각에서는 포괄적 과거사 청산의 '큰판'에서 보자면 우선 포괄적 진상규명 특별기구가 잘 짜여져야 하는데, 그 기구의 위원과 조사관 몫으로 보낼 이 동네(시민운동 단체) 인력풀도 부족한 처지에 발전위에 보낼 사람이 과연 있겠느냐는 회의다.

한계가 있는 시민운동단체 인력풀

게다가 지금 과거 청산으로 발전을 꾀하겠다는 데는 국정원만 있는 것도 아니다. 윤광웅 국방부장관도 각종 의문사 사건을 포함해 군 관련 과거사 사건을 청산하고 가겠다고 공언하고 있고, 허성관 행자부장관도 경찰 관련 사건에 대한 검토 지시를 내린 만큼 군경(軍警)에도 시민·인권 단체 인력을 '파견'해야 할 것이 뻔하다. 또 '약자에 강하고 강자에 약한' 검찰이 어떻게 나올지도 모르는 일이다.

국정원은 발전위에 참여하는 외부인사들에게는 조사대상 사건과 관련된 국가 기밀자료들을 취급할 수 있도록 '2급 상당 비밀취급인가증'을 주고 신분보장을 위해 이들을 특별채용 형태로 위촉하는 방안도 고려하고 있다.

그러나 시민·인권운동 활동가의 처지에서 보면 상당 기간 직장을 옮기는 것이므로 손쉽게 반길 일만도 아니다. 박래군씨도 "운동을 다 접고 그것만 한다면 모를까, 다시 돌아와야 하는데 누가 쉽게 하겠냐"고 반문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불확실한 것은 관련 기밀에 대한 접근권이 얼마나 보장될지와 얼마나 알맹이 있는 자료가 존재할지에 대한 근원적인 회의감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 시민단체들은 국정원의 진정성을 믿는 가운데서도 '시간 벌기'와 빠져나갈 궁리를 모색하고 있다.

국정원은 지금 시민·인권단체와의 '협찬'을 통해 자신의 어두운 과거를 들춰내는 '국정원판 이제는 말할 수 있다'를 찍고 싶어하지만, 시민단체는 아직 고민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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