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의 시간을 겪지 않으면 못 피는 '나팔꽃'

내게로 다가온 꽃들(79)

등록 2004.09.07 07:00수정 2004.09.07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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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팔꽃과 가을강아지풀
나팔꽃과 가을강아지풀김민수
밤 새워 별과 바람과 달빛의 기운을 받아 새벽이면 화들짝 피었다가 아침이 다 지나가기도 전에 시들어 가는 꽃이 있습니다. 어둠의 시간을 겪지 않으면 꽃을 피우지 못하는 식물, 해가 질 무렵부터 온 밤을 지새워 꽃을 피울 준비를 한 후 여명의 아침이 아직도 먼 곳에 있는 새벽에 피어나는 꽃, 싱그러운 아침햇살에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내는 꽃의 이름은 나팔꽃(Morning glory)입니다.

잠시 피었다가 시들어 버리는 꽃의 속성을 담아 '덧없는 사랑'이라는 꽃말도 있지만 온 밤을 지새우고 맞이한 아침의 소중함을 담아 '깨끗한 사랑, 기쁜 소식'이라는 꽃말도 가지고 있습니다. 나팔처럼 생긴 꽃의 모양새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기쁜 소식'이라니 흉흉한 소식들, 듣고 싶지 않는 소식들이 난무하는 이 세상에 꼭 필요한 꽃인 듯합니다.


김민수
반나절을 채 못 피었다가 지는 꽃의 다른 이름은 '견우화(牽牛花)'입니다. 이 꽃 이름을 들으신 분들은 아마 '견우와 직녀'를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일년에 한 번 칠월 칠석에만 만날 수밖에 없는 견우와 직녀의 사랑, 그 사랑을 이어주는 오작교와 이 꽃은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그것은 이 꽃에 전해지는 이야기를 보면 알 수 있답니다.

아주 먼 옛날 중국에 그림을 잘 그리는 화공이 있었단다. 오늘날의 화가라고 할 수 있지. 화공의 부인은 천하절색의 미인이었는데 그 마을의 원님이 화공의 부인을 잡아 가두고 수청을 들것을 강요했단다. 그러나 화공의 부인이 끝까지 거절하자 원님은 화공의 부인을 높은 성에 가두어 버렸던 거야.

매일매일 화공과 화공의 부인은 서로를 그리워하면서 지냈지만 만날 수가 없었어. 화공도 자신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했지만 못된 원님의 세력이 워낙 드세다보니 어쩔 수가 없었단다. 화공은 아내를 보고 싶어하는 마음을 담아 그림 한 장을 그렸단다. "여보, 내가 기어이 당신이 있는 높은 성에 올라가리다." 그리고는 그 그림을 아내가 갇힌 성 밑에 파묻고는 아내를 그리워하다 죽게 되었단다.

그 날 밤부터 화공의 부인은 매일 같은 꿈을 꾸었단다.

"사랑하는 그대여, 나는 매일 밤 꿈속으로 당신을 찾아가는데 당신과 만나려고 하면 아침이 되니 늘 하고 싶은 말을 못하고 떠나갑니다." 매일 같은 꿈을 꾸는 화공의 부인이 이상히 여겨 아침에 일어나 성 아래를 쳐다보았단다. 그 때 그는 성벽을 타고 올라오는 꽃을 보았지. "아, 당신이군요." 그러나 이내 꽃은 시들어버리고 가녀린 줄기와 이파리만 바람에 파르르 떠는 거야. 화공의 아내는 일찍 일어나면 꽃을 볼까 생각해서 동이 트기도 전에 일어났겠지.


그런데 활짝 핀 꽃은 보이는데 성벽이 너무 높아 미처 벽을 타고 화공의 부인이 있는 곳까지 올라갈 수가 없었지. 먼발치에서 그것도 아침햇살이 따가워지기 전 그들은 서로를 그리워하며 사랑의 이야기들을 나눴단다. 사랑은 소곤소곤 속삭여야 제 맛인 법, 꽃은 아내의 작은 소리를 듣기 위해, 또 아내에게 작은 소리로 말해도 잘 들리게 하기 위해 나팔모양의 꽃이 되었고, 서로를 그리워하면서도 만날 수 없는 안타까움을 담아 '견우화'가 된 것이란다.


김민수
연약한 나팔꽃은 소낙비라도 내리면 꽃이 이내 짓물러 버립니다. 줄기도 그리 강하지 못해서 뚝뚝 잘 끊어집니다. 줄기가 약하기로는 장모님의 사위사랑이 담겨있는 '사위질빵'이 있긴 하지만 그보다도 더 약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지난 밤처럼 태풍이 온 밤을 뒤흔든 날이면 여기저기 찢기어 있기 마련입니다. 그 연약함, 가녀림은 어쩌면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대로 흔들리며 살아가는 풀과도 같은 삶입니다.


그러나 바람에 풀이 누움으로 인해 바람보다 먼저 일어날 수 있는 힘을 가진 꽃이기도 하니 연약함 속에 들어있는 범접할 수 없는 강인함을 보게 됩니다. 더군다나 '고난'으로 상징되는 어둠을 이기고 피어나는 꽃이니 그냥 그렇게 약하고 연약한 꽃이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김민수
김민수
나팔꽃의 줄기는 무엇이든지 휘감는 속성이 있습니다. 근처에 있는 것들을 가리지 않고 잡고 놓아주지 않습니다. 잡을 것이 없으면 자기들끼리라도 서로 부여잡고 온 들판 여기저기로 줄기를 뻗어갑니다. 때로는 높게, 때로는 낮게 그렇게 부여안고 살아갑니다. 어쩌면 사랑하는 아내와 남편이 생이별을 해야만 했던 그 아픔이 '이젠 다시는 떨어지지 않을 거야!'하며 부둥켜안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엇을 붙잡을 것인가?

그것에 따라 그들의 피고 지는 터전이 바뀌게 됩니다. 담장의 담쟁이덩굴을 붙잡으면 그들만큼 높이 올라가고, 들판의 풀을 잡으면 그들만큼 올라가고, 나무를 붙잡으면 그만큼 올라갑니다. 자기가 잡은 것만큼, 부여안은 것만큼 올라가서 넉넉하게 피는 꽃이 나팔꽃입니다.

김민수
김민수
그러나 어떤 나팔꽃도 그저 올라갈 수 있다고 다 올라가지 않습니다. 바람을 이길 수 있는지, 그 곳에서 꽃을 피울 수 있는지를 살피면서 올라가는 지혜를 가지고 있습니다. 남들이 올라간다고 무조건 올라가지 않고, 올라갈 수 있으되 오히려 땅을 향할 줄도 아는 것이 나팔꽃입니다.

트리나 폴러스의 <꽃들에게 희망을>이 생각나게 하는 꽃입니다. 자기가 어디를 향해 뛰어가는지, 올라가는지도 모르면서 사는 삶은 허망한 것입니다. 자기가 올라갈 수있을 만큼에서 자족할 줄 아는 것도 지혜로운 삶일 것입니다.

애기나팔꽃
애기나팔꽃김민수
나팔꽃의 종류도 참 다양합니다.

형형색색의 나팔꽃말고도 이렇게 작은 '애기나팔꽃'이 있답니다. 애기나팔꽃의 크기는 대략 어른의 엄지손톱 정도의 크기입니다. 애기나팔꽃의 꽃은 일반 나팔꽃에 비해서 조금 더 두껍고, 꽃이 작아서 그런지 단단한 느낌이 듭니다. 그래서인지 한 낮에도 햇살만 뜨겁지 않으면 활짝 피어있답니다. 마치 아이들이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가득한 것처럼 말입니다.

김민수
어둠은 '고난의 시간'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나팔꽃은 바로 이 어둠, 고난의 시간이 없으면 피어나지 못하는 꽃입니다. 싹을 내어도 가로등 아래 싹을 낸 것들에서는 꽃이 풍성하지 못합니다. 밤새 불빛에 시달렸기 때문입니다. 식물도 잠을 자야 건강하게 자라는 법입니다. 기나긴 밤, 열심히 꽃을 피우기 위해 준비를 하는 나팔꽃들이 밤새 눈이 맞아 사랑을 나누고, 그 사랑이 '애기나팔꽃'으로 피어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성서에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라는 의미심장한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 삶에서 만나는 모든 것들을 어떻게 맞이하는가에 따라서 그 삶도 달라지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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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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