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릉을 보면 조선의 역사가 보인다

순릉에 묻힌 '소녀 왕비' 공혜왕후

등록 2004.09.08 17:09수정 2004.09.09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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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딱따구리 나무 아파트

딱따구리 나무 아파트 ⓒ 한성희

경기도 파주 순릉 가는 길 옆 숲에는 ‘딱따구리 나무 아파트’가 당당하게 서 있다. 딱따구리가 점찍은 전나무다. 집주인들이 어디론가 사라져 지금은 빈 아파트지만 전나무는 푸른 잎을 달고 꿋꿋하게 서서 돌아올 딱따구리를 기다린다.

아이들에게 딱따구리 나무아파트라고 가르쳐주면 재미있어 눈을 반짝이며 ‘어디 어디’ 다시 쳐다보느라 바쁘다. 이 딱따구리 나무 아파트 못 미처 항상 다람쥐가 나타나는 곳이 있다.


다람쥐는 겁이 많고 재빨라서 여간해서 카메라에 잡히지 않는다. 오늘도 다람쥐가 나타나려나 싶어서 카메라를 꺼내든 채 조심스레 주위를 살피니까 영락없이 한 놈이 개울 쪽에서 나타나 길을 가로질러 숲으로 달아난다. ‘오늘은, 오늘은, 반드시 이놈을 카메라에 담아야지’ 하다가 번번이 실패했다.

항상 나타나는 곳에서만 모습이 보이는 걸로 봐서 자기 영역을 벗어나지 않는 것 같다. 청설모도 빠르긴 하지만 카메라에 담기가 다람쥐처럼 어렵지는 않다.

청설모는 겁 없고 뻔뻔스러워 셔터를 눌러도 눈도 꿈쩍 않는다. 그러나 다람쥐는 청설모처럼 많지도 않거니와 작은 움직임이나 소리에도 잽싸게 나무 위로 도망가기 일쑤다.

a 다람쥐

다람쥐 ⓒ 한성희

이곳을 다닌 지 몇 달만에 겨우 다람쥐를 카메라에 담는 데 성공했다. 줌을 당길 만큼 당겼으니 선명하지는 않겠지만 이렇게 귀여운 다람쥐를 촬영한 건 행운이다. 오늘(5일)은 왠지 운이 좋을 듯한 느낌이다.

그래서인지 다른 날에 비해 유난히 까치들이 많이 나타나 극성스럽게 울어댄다. 한적한 숲길에 까치 몇 마리가 길에 내려와 앉아 유별나게 떠든다. 걸음을 멈추고 바라보자니 순릉 입구에서 까치 여러 마리가 편을 갈라서 싸우는 듯 숲이 떠나가라 시끄럽게 깍깍댄다.


두어 마리가 한 편이 돼서 상대에게 떠들면 마주 보고 있던 두 마리가 종종 걸음으로 총총 뛰면서 쫓아가서 대거리하듯 “깍깍 깍!” 소리 지른다. 하는 짓이 영락없이 사람들 편싸움하면서 소리 지르고 악을 쓰는 것과 똑같다. 이 놈들 진짜 웃기네.

a 물가의 까치. 편 싸움 하던 까치는 아니다.

물가의 까치. 편 싸움 하던 까치는 아니다. ⓒ 한성희

두 마리씩 서로 “깍깍! 깍깍!” 소리 지르며 싸우고 주위에서 가끔 응원하는 놈 서너 마리. 까치도 사람처럼 편싸움을 하다니. 그것도 지엄한 왕비 무덤 앞에서 말이다. 겁도 없는 놈들이긴 하지만 사초지 잔디에 내려앉아 벌레를 쪼아먹는 단골 손님들이다.


생각지도 않은 까치 싸움판에 끼어든 것 같아 기가 차서 구경만 하고 있다가 카메라를 들이대니 “몰상식하게 남 싸움하는 걸 찍어?” 하는 듯 일제히 날아가 버린다. 좀더 두고 볼 걸. 싸움 구경처럼 재미난 것도 없는데, 희귀한 까치들의 싸움을 보고 나니 홍살문을 들어서면서도 피식피식 웃음이 계속 나온다.

공혜왕후 이야기

순릉은 성종의 왕비 공혜왕후(1456-1474)의 무덤이다. 언니인 장순왕후와 나이 차이가 많아 언니가 죽었을 당시 대여섯 살에 불과했으리라. 공혜왕후는 한명회의 늦둥이 넷째 딸로 태어나 12살에 자을산군인 성종과 혼인한다.

예종이 일찍 죽지 않았다면 성종이 왕위에 오르지도, 공혜왕후가 왕비가 되지도 못했을 것이고, 조선시대 여인천하가 막이 오르지도, 연산군이 등극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성종은 세조의 맏아들인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이다. 의경세자가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스무 살에 단종 어머니 권씨의 저주(?)로 요절하자 세자빈이었던 소혜왕후 한씨도 사가로 물러가기에 이른다.

정희왕후와 한명회의 정치적인 결탁에 의해 하루아침에 형 월산대군을 제치고 왕위에 오른 성종과 조선역사상 유일하게 왕비를 거치지 않고 대비자리에 오른 소혜왕후, 즉 그 유명한 인수대비는 조선왕조의 역사에 파란만장한 장을 기록하게 된다.

공혜왕후는 총명하고 어질어 정희왕후 윤씨, 소혜왕후 한씨, 예종 계비 안순왕후 한씨를 극진하게 섬겼다고 한다. 14살에 왕비 자리에 올랐지만 시할머니, 시어머니 등 층층시하 시집살이를 한 셈이다. 더욱이 이때는 성종이 소년 왕으로 왕위에 올라 정희왕후 윤씨의 수렴청정을 하던 때였으니 소녀 왕비의 실권은 별로 없었을 것이다.

조선 역사상 자녀가 가장 많은 왕 중 하나인 성종의 왕비로 있으면서도 자녀가 없이 19살에 죽는 비운을 맞은 공혜왕후의 비화를 들어보면 독수공방의 나날이었던 듯싶다. 미녀 후궁들을 찾아다니기에 바빴던 성종은 공혜왕후를 거의 찾지 않았다고 한다. 하늘을 봐야 별을 따지.

a 고추잠자리 (순릉 숲)

고추잠자리 (순릉 숲) ⓒ 한성희

어쨌든 자녀 없이 쓸쓸하게 19세로 요절한 공혜왕후의 뒤를 이어 연산군을 낳은 폐비 윤씨로 인해 훗날 피비린내 나는 사화가 연출된 것은 다 아는 사실들이고….

이 시대 전후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온통 청주 한씨와 파평 윤씨 왕비들이 판을 친다. 정희왕후, 폐비 윤씨, 폐비 윤씨 다음에 왕비에 오른 정현왕후가 모두 파평 윤씨고 인수대비, 장순왕후, 안순왕후가 청주 한씨들이다. 족벌에 의한 권력구조가 확연히 드러난다.

그래서인지 이곳엔 가끔 청주 한씨 무슨 무슨 파 종친회에서 찾아오기도 한다. 기자도 청주 한씨지만 족보에 대한 관심이 없어서 무슨 파 몇 대 손인지 알지도 못하고 그저 몇백 년 전에 죽은 먼 할머니뻘 되는 소녀 왕비들의 비극에 더 호기심이 있을 뿐이다.

변하지 않는 절대권력을 가진 왕가에 들어가는 방법은 왕비나 후궁으로 책봉되는 일밖에 없다. 그래서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끊이지 않았고 심지어는 왕자나 왕의 독살설이 조선시대 내내 장식했다.

제 아무리 명문귀족이라도 죽은 뒤의 무덤을 보면 무덤의 크기와 깊이, 석물 등 서열이 왕릉과 다른 것이 확연히 드러난다. 국장을 잘 치르고 나면 논공행상이 있어 벼슬이 올라가는 계기였고, 이른바 명당자리가 아닌 흉당인 것이 드러나면(상대를 끌어내리고 모함을 하기 위해 풍수를 이용한 사례가 많지만) 수십 명이 목숨을 잃거나 귀양을 가기도 했다.

국장을 한 번 치르는 데 들어가는 비용이 지금 돈으로 2, 3조가 소요되는 대단한 국가사업이었다고 한다. 능을 조성할 때 백성들을 동원해 공짜로 일을 시켰고 수개월 동안 먹을 식량까지 짊어지고 가서 일을 했으니 인건비는 포함하지 않은 금액이다.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긴 한가보다. 이 때문에 왕릉에 오면 ‘조선 팔도가 임금님 것’이라는 말이 실감난다.

a 왕비 능답게 화려한 석물이 서 있는 순릉

왕비 능답게 화려한 석물이 서 있는 순릉 ⓒ 한성희


명당타령은 지금도 이어진다

그래서 왕릉을 보면 조선의 역사가 보인다고 한다. 조선시대 왕 중에서 풍수에 가장 능했던 왕은 세조와 정조다. 이 공릉과 순릉도 세조가 재위할 당시 잡은 자리니 명당이긴 할 터.

푸른 잔디로 덮인 사초지를 올라 공혜왕후의 무덤 앞에 선다. 왕비로 죽은 몸이라 이곳 세 능 중에서 석물이 가장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다. 훗날 원에서 능으로 격상해도 석물을 새로 조성하지 않는 이유 역시 무덤을 건드리면 동티가 난다는 속설 때문이다.

문인석과 무인석의 얼굴과 전체 모습을 보면 만든 석공들이 여럿인지 생김새가 다 다른 것도 재미있다. 왕릉은 당대 최고의 지관과 신하들의 엄격한 의논을 거쳐 조성된 것이라 요즘도 풍수를 배우는 사람, 지관, 역학자들이 가끔 찾아오기도 한다. 이곳에서 영릉이 가장 명당자리라고 찾아온 지관들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으니 풍수에 관한 이곳의 일화는 영릉을 소개할 때 자세히 언급하기로 하자.

공혜왕후 능은 모든 능의 구조가 그렇듯이 궁궐의 담장을 본 따서 능상을 둥글게 둘러싼 곡담과, 석난간이 있고 석양과 석호가 각각 두 쌍 무덤을 호위하고 있으며 혼유석(석상) 양 옆에 불쑥 솟은 망주석이 있다. 돌로 만든 단계를 하나 내려오면 장명등과 석마를 뒤에 거느린 문인석이 양쪽에서 호위한다.

이 단계 밑에는 계급에 의해 문인보다 아래인 무인석이 석마를 거느리고 서 있다. 흔히 장군이나 군인 등 무인 출신의 무덤에 무인석을 세운다고 알고 있지만 이것은 잘못된 상식이다. 무인석은 왕릉 외에는 조성하지 않았다. 무인석은 왕이 가진 군사통수권을 의미한다. 국장에 참여했던 대신들이 자신들의 무덤에 왕릉의 구조를 본 따서 문인석을 세우기도 했지만 무인석을 세울 수는 없었다.

공혜왕후 능은 조선 초기의 능제를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 능상 밑에 돌로 두른 병풍석이 없지만 이는 풍수에 능한 세조가 능에는 병풍석을 두르지 말라고 명한 이후 조성된 능이기 때문이다. 돌이 지기를 누른다나, 혈을 누른다나. 하여간 그런 풍수적인 이유 때문이라고 한다.

a 성급한 가을 낙엽이 떨어진 순릉 숲 길.

성급한 가을 낙엽이 떨어진 순릉 숲 길. ⓒ 한성희

유교관습에 따른 국장절차와 능의 조성에 풍수를 가장 고려한 명당타령은 유교와 도교가 뒤섞여서 아이러니컬하다. 요즘도 대통령 선거 때만 되면 언론에서조차 후보들의 선조 무덤을 들썩거리는 것이 단골 메뉴이니 명당에 대한 우리 민족의 대단한 집착과 믿음은 망령까지 이른다고 본다. 이는 조선왕릉의 후손 발복 개념에서 확장돼 민간에까지 내려온 것이다.

이 좁은 땅에 웬 놈의 명당이 그리 많을꼬. 명당의 신앙에 집착하는 모양을 보면 개인적으로는 우습다는 생각이다. 그럼 유럽이나 미국 대통령의 선조들도 다 명당에 묻혀있다는 소린지? 지관들이 외국에 가서 대통령들의 선조 무덤을 보면 어떤 풍수의 해석을 내릴지 궁금하다는 엉뚱한 생각도 든다.

a 순릉 사초지에서 짝짓기하는 나비 한 쌍.

순릉 사초지에서 짝짓기하는 나비 한 쌍. ⓒ 한성희

망주석은 저승과 이승의 경계를 지킨다고도 하고 풍수에서는 혈이 흘러가는 것을 방지한다고도 하나, 주술적인 의미도 있다. 망주석의 모양은 남근을 상징하며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는 토속신앙이 자리잡은 것이다.

공혜왕후 사초지엔 유난히 남보랏빛 작은 나비들이 많이 날아다닌다. 녹색 잔디 위에 팔랑거리며 날아다니는 손톱보다 작은 엷은 보랏빛 나비들이 무수히 팔랑거리는 모습이 녹색과 어우러져 아름답지만 왠지 슬퍼 보인다. 미녀가 아니라서 서방님에게 사랑을 받지 못한 왕비의 한스러운 넋의 몸짓일까.

가끔 잔디 사이에 피어난 작은 꽃이나 풀 위에 내려앉아 날개를 접고 쉬는 나비를 보면 흰색에 점박이 무늬가 박혔다. 날개를 펴야 보라색이 나타나는 작은 나비들을 찍으려고 쫓아다니느라 애를 썼지만 보라색 날개를 펴는 모습을 촬영하는 데는 실패했다. “나비야 제발 가만히 있어 봐라” 속으로 달래면서 셔터를 누르지만 렌즈를 잽싸게 피해 가는 작은 나비들은 말을 듣지 않는다.

a 지금까지 본 것 중 가장 크고 통통한 청설모.

지금까지 본 것 중 가장 크고 통통한 청설모. ⓒ 한성희

숲길엔 벌써 이른 낙엽이 떨어진다. 느티나무가 가을을 가장 성급하게 타는지 푸른 단풍나무들 사이에서 잎을 우수수 떨군다. 여름과 가을이 공존하는 묘한 풍경을 잠시 바라본다. 커다란 참나무 나무에 청설모 두 마리가 장난을 치면서 오르내린다.

청설모는 생김새가 다람쥐와는 달리 흉칙스러운 데가 있어서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이 놈들은 여태 본 중에 제일 큰놈들이다. 머리에서 꼬리까지 길이가 어른 팔뚝만하고 공릉 숲에서 얼마나 잘 먹었는지 통통하게 살이 찐 놈이다.

나무에 달라붙은 놈을 살살 다가가서 촬영에 성공했지만 참나무 밑둥치에 커다란 말벌이 붙어 앉아 있는 것을 보고 혼미백산 해서 행여 왕벌 성질을 건드릴까 조심조심 물러났다. 말벌에게 쏘이면 거의 죽음이라는데 말벌을 보니 소름이 끼친다.

나비와 말벌과 다람쥐와 청설모, 새들이 같이 살아가는 곳이 숲이다. 숲에서 살아가는 동물과 식물들은 주어진 생을 치열하게 살고 내세나 부귀영화 따위엔 관심조차 없다. 제 아무리 명당자리라도 그들에겐 현재 삶의 터일 뿐.

a 공순영릉 개울마다 물봉선화가 한창 피어 자태를 뽐낸다.

공순영릉 개울마다 물봉선화가 한창 피어 자태를 뽐낸다. ⓒ 한성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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