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릉 숲을 제패한 엽기 깡패 까치

고요한 숲에서 갑자기 나타난 것은?

등록 2004.09.15 00:37수정 2004.09.16 14:20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a

순릉 입구 방아꽃에 앉은 호랑나비 두 마리. ⓒ 한성희

공릉 숲에 가면 항상 돌아보는 정해진 코스가 있다. 순릉을 들러 영릉을 한 바퀴 돌고 그 다음 순릉 숲속 길로 다시 들어간다. 제일 좋아하는 숲길이기도 하고 사람이 없어 싱그러운 향기를 들이마시고 숲을 감상하면서 천천히 걷기에는 그만이다.

이젠 익숙해진 숲에서 습관처럼 버섯 정원이랑 녹색 양탄자처럼 고운 이끼 정원을 살피고 가끔 검지를 내밀어 살짝 쓰다듬어 보기도 한다. 또 다른 버섯이 솟았는지 나비와 벌이 잉잉거리는 꽃들이 지난 번 왔을 때와 얼마나 달라졌는지 관찰한다.

제 자리에 있는 것 같아도 숲은 조용하지 않다. 바람이 불지 않아도 풀은 격렬하게 흔들리고 있으며 치열하게 사는 모습이 보인다. 바람이 불면 머리 위에서 나뭇잎들이 파도치며 '쏴아' 소리를 내면서 잎의 물결 소리가 흘러내려 간다.

a

노랑 물봉선 ⓒ 한성희

이곳은 공릉 숲을 관리하는 아저씨들이 가끔 지나갈 뿐 아무도 나타나지 않는다. 시간이 있을 때는 더 멀리 소나무 숲이 우거진 곳까지 걸어 나가지만 시냇물 소리가 들리는 곳에서 머물다 돌아간다. 숲길을 걸어가고 있을 때 갑자기 앞에서 뭔가가 나타났다. 이 조용한 숲에서 누가 나타났을까? 화들짝 놀라 그 자리에 멈췄다.

흙투성이 흰 개 한 마리와 검정 개 한 마리가 나와 마주치고 놀랐는지 나와 동시에 그 자리에 섰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으면서 순간적으로 별의별 생각이 다 스쳐갔다.

아무도 올 일이 없는 이 공릉 숲에 어디서 저런 개가 두 마리나 갑자기 나타났을까? 여긴 민가도 먼데 숲에 개가 두 마리나 나타나다니. 혹시 광견병 걸린 떠돌이 개는 아닐까. 덤벼들어서 확 물면 어쩌지? 소리 질러도 아무도 도와줄 사람이 없는 곳인데 어쩐담?

겁에 질려 곁눈질로 개를 살피니 생김새가 아주 순하다. 그래도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개들은 내가 길에 우뚝 서 있자 난처한 지 아예 그 자리에 앉아버린다. 돌아갈 수도 앞으로 갈 수도 없는 그야말로 진퇴양난이 된 격이다. 돌아가다가 개가 뒤에서 덤벼 물면 어쩌나.

a

모른 척 지나가는 개 두 마리. ⓒ 한성희

개 두 마리는 길 한 복판에 앉아서 움직이지 않는다. 길 한 복판에 앉아 있으니 더 두려워졌다. 관심이 없는 척, 다른 곳을 보며 길옆으로 슬슬 물러났다. 계속 비켜서자 앉아있던 개 두 마리가 천천히 일어나서 걸어온다.

자기들도 관심이 없는 척하며 날 거들떠보지도 않는 개 두 마리가 나란히 내 앞을 지나갈 때까지 경계심이 풀리지 않았다. 그렇게 순릉 쪽으로 사라지는 뒷모습을 보자 갑자기 맥이 풀리면서 괜한 겁을 집어먹은 것이 우스워졌다. 이건 사람이 개에게 길을 양보한 격이네.

웬 개가 이 숲에 나타났을까? 조용하기만 했던 숲의 사건은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숲을 나와 공릉 쪽으로 걸어가다가 공릉문화재청관리소 이 계장을 만났다. 날 보더니 대뜸 묻는다.

"고라니 못 봤어요?"
"순릉 숲에서 개는 두 마리 봤는데요. 웬 개가 나타났을까?"

설마하니 내가 개와 고라니도 구별 못할까. 그게 고라니는 아니겠지.

"그 개들이 고라니 쫓아 온 거라니까요."
"그래요? 여기에 고라니도 있어요? 어디 있죠?"
"있죠. 저 쪽으로 갔을 걸요."

개에 쫓기던 고라니가 날 보라고 기다리고 있을 턱이 없다. 고라니를 쫓아다니느라 흰 개가 땅강아지가 됐군. 청설모에 다람쥐에 고라니까지 사는 숲이라…. 숲의 동물 가계 구성이 점점 더 복잡해진다.

엽기 깡패 까치

오후에 여뀌가 얼마나 피었는지 보려고 영릉으로 갔다. 비가 온 뒤의 숲은 가을을 맞을 준비를 한다. 산사나무 열매도 며칠 사이에 빨갛게 익었다. 보름 간 냇가와 습지를 화려하게 장식했던 꽃분홍 물봉선화가 거의 지고 있는 대신 분홍 안개 같은 여뀌가 한창 피었다. 고추잠자리가 갑자기 많아져서 분홍빛 꽃무리 위를 윙윙 날아다닌다.

영릉 숲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숲 입구에서 새털이 무수히 흩어진 것을 보고 가까이 다가갔다. 처참한 새의 주검이 그곳에 있었다. 죽은 지 얼마 안 되는지 피가 선명하고 목이 달아난 산비둘기였다. 그새 쇠파리들이 목 근처에 앉아 포식 중이다.

이건 청설모 짓이군. 청설모는 잡식성으로 잣이나 도토리 같은 나무열매는 물론이고 새도 잡아먹고 먹을 것이 없으면 같은 설치류과인 다람쥐까지 잡아먹는다고 알고 있다. 청설모의 천적은 오소리와 너구리이기에 이 숲에선 천적이 없어 숲의 무법자로 횡포를 부리는 놈이라고 짐작했는데.

관리 일을 하는 오씨 아저씨는 식물과 동물에 대해 해박하니 한번 물어봐야겠다고 작정했다. 청설모가 이런 짓을 하는 걸 오씨 아저씨라면 잘 알 것이다.

a

까치에게 목이 달아난 산비둘기. ⓒ 한성희

"아 , 그거 까치가 한 것이여."
"까치가 산비둘기를 죽여요? 목이 달아났던데요?"
"며칠 전에도 비둘기 집단 공격해서 구해온 걸. 내장이랑 눈알도 다 빼먹어. 청설모한테도 덤벼들어 콱콱 쪼아대는 걸."
"청설모가 까치에게 당해요?"
"그럼 꼼짝도 못 혀. 청설모는 네발이 나무에 달라붙어 있어야 하는데 까치는 날아와서 공격하잖어."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 까치가 벌레나 먹지 같은 조류까지 잡아먹다니. 문화재청 관리사무실로 들어가 박정상 소장에게 다시 물어본다.

"까치 짓 맞아요. 며칠 전에 까치에게 당한 산비둘기 구해다가 며칠 보호하고 오늘 놔줬는데요. 쥐를 잡는 것도 우리가 직접 봤다니까요."

황당하기 이를 데 없다. 길조라 여겼던 까치가 이런 횡포를 부린다니. 이 숲의 패권자는 청설모가 아니고 까치 떼였군. 청설모도 까치의 공격엔 당해내지 못한다고 생각도 못했다. 이래저래 청설모에게 일반적인 상식만 가지고 누명을 두 번이나 씌운 셈이다. 도토리거위벌레가 자른 참나무 가지랑 산비둘기 죽인 죄까지.

아름답고 푸른 숲에서 이런 피비린내 나는 살상이 까치에 의해 일어날 줄이야. 갑자기 나무 위에서 깍깍대는 까치가 포악스럽게 보인다. 우는 소리마저 징그럽다. 아는 게 병이다. 죽임을 당한 산비둘기는 낮에 풀어줬다는 산비둘기였을까. 사람이 구해간 보복으로 먹지도 않을 산비둘기를 죽이고 분풀이를 한 것일까?

"까치가 산비둘기 죽인 거 봤는데 진짜 맞니?"
"그럼요. 뱀도 잡아요."
"진짜야?"

이곳 수표소에선 공익 청년 4명이 근무한다. 청소도 하고 표를 받는 일을 한다. 몇 달 지나니 낯이 익어서 제법 친해졌다. 뱀까지 잡는다니 갈수록 까치의 죄가 더 드러난다. 몇 번이나 확인했는데도 지금까지 머리에 박힌 상식이 뒤집혀지는 걸 받아들이자니 잘 믿어지지 않는다.

"까치는 머리가 좋잖아요. 과수원에서 까치 못 먹게 그물 씌워 놓으면 밑으로 싸악 날아 들어와서 먹고 밑으로 날아 나가요."
"청설모도 쫀다던데?"
"맞아요."
"그럼 깡패네?"
"깡패 맞아요."
"엽기 깡패 까치군."
"난 까치보다 청설모가 더 미워. 저걸 한 마리 산 채로 꼭 잡아야겠는데."

a

'엽기 깡패' 까치. ⓒ 한성희

공익 청년들은 문을 닫을 시간이면 입구에 놓은 쓰레기봉투를 치운다. 청설모가 쓰레기봉투를 찢어버리고 뒤지는 일을 해서 미운 거다. 까치도 먹을 곳만 딱 알고 부리로 쪼아 봉투에 있는 먹을 것만 쏙 빼먹는단다. 청설모가 찢는 것보단 덜 찢어질 것이다.

"그걸 잡아서 뭐에 쓰게? 약으로 쓸 수도 없잖아. 청설모 약으로 쓴다는 소리 여태 못 들어봤다."
"잡아서 두고두고 머리 때려주려고요."

청년들의 밝은 웃음소리가 퍼지는 가운데에도 머리 위에서 까치 떼 짖는 소리가 섬뜩해지며 요란스레 들린다. 이 숲의 진정한 패권자는 까치였다. 자연의 법칙은 냉혹하다. 인간의 잣대로 어찌 자연의 순리를 바꿀 수 있겠는가. 까치를 없애면 또 다른 패권자가 이 숲을 지배하겠지.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군산 갯벌에서 '국외 반출 금지' 식물 발견... 탄성이 나왔다
  2. 2 20년만에 포옹한 부하 해병 "박정훈 대령, 부당한 지시 없던 상관"
  3. 3 광주 찾는 합천 사람들 "전두환 공원, 국민이 거부권 행사해달라"
  4. 4 남자의 3분의1이 이 바이러스에 감염돼 있다고?
  5. 5 "개발도상국 대통령 기념사인가"... 윤 대통령 5·18기념사, 쏟아지는 혹평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