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친북의 의미를 아느냐? ①

어느 날의 일기 / 백화산에서

등록 2004.09.22 12:05수정 2004.09.22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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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형. 또 한번 당신을 생각하며 이 글을 씁니다. 2001년 7월 <보수, 모호하고도 음울한 혼탁의 강/보수주의자임을 자처하시는 K형에게>라는 이름의 글을 썼지요.


벌써 3년이 흘렀습니다. 여기에서도 세월 빠름을 느끼게 됩니다. 세월 빠름을 느낄 때마다 나는 시간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생각합니다. 짧고 덧없는 한 세상 어떻게 사는 것이 하느님께 바르게 나아가는 삶인지를 늘 생각하는 것이지요.

며칠 전 백화산에서 내려오다가 중봉재 근처에서 형을 만났지요. 형은 철봉대와 허리운동 기구가 설치되어 있는 그곳에서 골프채 휘두르는 연습을 하고 있었지요. 우리 일년 후배인 C사장이 형과 동행을 하고 있었고….

형은 나와 초등학교 동창이지만 나이가 세 살이나 많고 해서 나는 청년 시절부터 해온 버릇대로 형에게 존댓말로 인사를 했지요. 그리고 우리가 모처럼 만에 만난 것을(내가 동창회의 계절 모임에 두 번이나 빠진 탓에…) 반가워하는 형이 고맙기도 해서 나는 잠시 그곳에 머무르며 형과 얘기를 나누게 되었지요.

형은 판판한 땅바닥의 잔디 위에 작은 솔방울을 놓고 골프채로 정확히 맞춰 날려보내는 동작을 간간이 계속하며 그 날 내게 참으로 많은 얘기를 했습니다. 맨 먼저 한 얘기는, 형의 얘기들을 내가 다 듣고 나서 사리에 맞게 하나하나 반박을 해보라는 것이었지요. 내 반박들이 사리에 합당하면 승복을 하겠다는 말도 했고, 제발 자신을 설득해 달라는 부탁도 형은 했지요.

하지만 나는 형의 얘기를 들으면서 그냥 듣는 것으로만 그쳐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반박이라는 것은 아예 처음부터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제발 나를 설득해 달라"는 말을 할 때부터 형은 꽤나 자신에 차 있는 모습이었고, 형을 설득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임을 나는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또 형의 방만한 이야기들을 내가 입 다물고 끝까지 다 들어주는 것처럼 형도 내 얘기를 끝까지 들어줄지 의문이었습니다. 중간에 말을 자르고 끼어 들고 하는 법 없이 내 말을 모두 차분하게 들어줄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형은 정말 자신만만한 모습이었습니다. 그야말로 나라를 사랑하고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는 우국충정의 사나이였습니다. '친북'이니 '좌경'이니 하는 말들을 참 많이도 사용했고, 노무현 김대중 김정일이라는 이름들과 '빨갱이'라는 용어를 입에 담을 때는 분노로 얼굴이 붉어지는 것도 같았습니다.


나는 형의 청산유수 같은 말이며 걱정과 노여움이 수시로 교차하는 모습을 듣고 보면서 형이 운영하는 체육사 가게 안에 노상 펼쳐져 있던 <조선일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동창회 때마다 다변가 기질을 발휘하는 형이 옛날부터 조선일보의 앵무새가 되어 있다는 것은 내가 일찍이 잘 알고 있는 사항이었습니다.

이윽고 형의 얘기가 다 끝났을 때 나는 호주머니의 휴대폰을 꺼내어 시계를 보고 나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김형의 얘기 잘 들었지만, 내가 이미 옛날에 다 알고 있는 얘기들이요. 수없이 들어온 얘기들이지요. 그런 얘기들에 일일이 답변을 할 필요는 없을 것 같고…. 또 오늘은 내 마누라 퇴근 시간에 학교로 가서 같이 병원에 가는 날이거든요. 시간이 없어요. 그래서 다른 건 다 생략하거나 다음 기회로 미루고, 오늘 한 가지만 물어볼 게요."

골프채 휘두르는 동작을 잠시 멈추고 조금은 긴장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형에게 나는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습니다.

"나를 친북 세력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김형이 오늘 나를 붙들고 그렇게 많은 말을 했다는 건 내가 잘 알아요. 내 말 맞지요?"
"그거야 뻔한 거지. 친구가 좀 걱정스럽기도 하고 섭섭한 점도 있고 해서 말야."

그러자 옆에 있던 후배 C사장이 형을 거들어주었습니다.

"지 작가가 지역신문에 쓰는 글들 때문에 그간 이런저런 얘기들이 많았어. 그래서 앞으로는 좀 한쪽으로 너무 기울지 말고 균형을 잡아주었으면 해서…."
"그런데 말야. 친북이라는 말이 도대체 뭐지요? 설마 나를 빨갱이로 보는 건 아니겠지?"
"그거야…."
"나를 빨갱이로 본다고 해도 좋아요. 당신들로서는 친북 세력을 모조리 빨갱이로 보지 않을 수 없을 테니까…. 그렇다면 친북이라는 말의 의미는 뭐지?"
"그거야 북한에 붙어서 김정일 정권을 도와준다는 뜻이겠지…."
"천만에!"

내 어조가 너무 강했기 때문인지 그 순간 형과 후배 C사장은 조금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습니다. 나는 짐짓 웃음을 머금으며 말을 이었습니다.

"아직 친북의 뜻도 모른다니, 솔직히 말해 실망이네요. 친북이라는 말의 뜻을 그 정도 천박한 수준으로밖에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과 내가 무슨 말을 하겠소. 하지만 그래도 오늘 친북의 확실한 뜻을 잠시 설명해 줄 게요."

필경은 헛수고일 것임이 너무도 빤한 일이었지만, 그래도 말을 꼭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친북은 우리와 한 민족이요 한 핏줄인 북한 주민들의 처지를 가슴아파하고 사랑한다는 뜻이요.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김정일 정권을 압박하고 배격한다는 뜻이요. 더불어 그런 방식으로 민족통일을 꾀한다는 뜻이요."

"북한 주민들의 처지를 동정한다는 말은 알겠는데, 김정일 정권을 압박하고 배격한다?"

"그렇소. 우리가 북한 주민들의 처지를 생각해서 이렇게 저렇게 북한을 돕는 일을 하는 것은 지금 당장에는 김정일 정권을 이롭게 하는 일로 당신들 눈에 보이겠지만, 장기적으로는 김정일을 어렵게 만드는 일이 되는 거요. 북한 주민들의 삶을 돕고 갖가지로 북한과 교류를 확대하는 일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필연적으로 한 걸음씩 북한의 변화를 유도하게 되는 거요. 어떤 급격한 변화보다는 자연적인 변화가 평화 통일을 가능케 하고, 언젠가는 오게 될 통일의 충격을 남한과 북한 모두에게 최소화해줄 수 있는 거요."

"그런 걸 보고 감상적 통일론이라고 하는 거야."

"수구 반공주의자들의 그런 논박에도 불구하고, 친북의 최고 목표는 북한 사회의 변화를 꾀하면서 늘 민족통일에 대한 희망을 유지하는 거요. 북한 사회의 변화를 누가 가장 싫어하고 두려워하며 고민을 많이 하겠소? 그건 바로 김정일이요. 우리는 바로 김정일을 압박하고 더 많이 고민하도록 하기 위해서 친북을 하는 것이요. 그러니 그것은 어느 모로는 김정일을 배격하는 일이 되지 않겠소?"

"그건 환상이야. 김정일이가 누구라고…. 인간 백정 개정일이가 뭔 고민을 해, 고민을…."
"당신들보다 김정일이가 더 고민을 할 수도 있는 거요. 김형이 고민이라는 말의 뜻을, 또 그 실체를 알기나 해요?"
"뭐? 세상에 고민 안하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어? 지 작가만 고민을 하는 줄 아남?"
"고민을 하려면 좀 제대로 깊이 있게 해야 한다는 거요, 내 얘기는."
"그려? 그럼 지 작가의 고민을 좀 더 얘기해 봐."
"고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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